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27화 (127/276)

12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외전 : 루드바하 이야기 (3)

저벅저벅.

조금은 서두르는 듯한 그의 걸음걸이와 그 걸음걸이만큼이나 세차게 뛰는 심장이.

곧 어느 지점에서 쿵.하고 멎어 버렸다.

조금은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작은 외궁. 그 외궁의 정원에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가지는 그녀, 르베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긴장이라곤 해본 적도 없던 루드바하가 흠,흠 목을 작게 가다듬고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또 만나게 되다니, 대단한 인연이군요.”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그의 심장은 이유도 없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인연이라고 하기에… 이곳은 제 궁입니다만.”

고저 없는 목소리, 심지어는 싸늘하게까지 들리는 대답의 목소리가 가차 없이 들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무안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그의 딸이 루드바하의 말에 대답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곧 르베나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은 루드바하가 말했다.

“그것을 바로 인연이라 하지요. 제가 마침 딱 여기를 오고 싶었는데 마침 여기 딱 계시니 말입니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능청맞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루드바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자기발견의 시간을 확인할 틈도 없이 르베나는 역시 그의 딸답게 쉽지 않았다.

“나가는 길은 저쪽입니다.”

명백한 축객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드바하는 웃으며 르베나의 앞에 자리했다.

어떠한 결례를 저질러도.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루드바하는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래야만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숱한 의문을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야만 그와 이 세상에 조용히 평화를 주고 간 그에게 보답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마음 한 켠에는 순수하게 르베나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곁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그녀, 르베나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매일매일 루드바하는 외궁의 작은 정원에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와 함께하면서 루드바하는 르베나가 아니라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그에 대해 발견해나갔다.

가령,

곱게 치장한 어느 여인의 손보다도 검술연습으로 투박한 한 여인의 손에 더 눈길이 가는 취향이라던가. 아한이라는 꼬마 베이라가 괜히 눈엣가시처럼 보여서 싫다는 그답지 않은 감정이라던가. 그래서 혼자 잘 놀고 있는 라웅을 억지로 데려가 아한을 르베나의 곁에서 떼어놓는 유치함이라던가. 여유롭게 티를 마시는 누군가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도 붉은 눈길이 본인을 향하면 괜히 더워지는 당혹스러움이라던가. 상냥하고 곱게 치장한 향기로운 누군가의 말보다 직선적으로 짧은 누군가의 말에 크게 웃어버리는 모습이라던가.

그는 매일같이 발견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신기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스스로를 경계했다.

‘세츠는 절대로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유파시드인 나는 더욱 흔들리지 않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가, 르베나가 그의 딸일 거라는 생각만으로 그는 이미 그녀 앞에서 너무 다른 모습들을 노출하고 있었다.

세츠는 이성을 사랑하고 싶어도 감정이 결여된 사람처럼 활활 타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요즘의 그는 자꾸만 이상했다. 분명 누군가와 깊은 감정을 나누고 싶어도 높은 순도의 신력으로 인해 막이 있는 것처럼 막힌다 했는데. 왜 자꾸 그녀가 보고싶고 생각이 나는 건지.

이 생소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루드바하는 르베나와 조금 거리를 두기로 했다.

일단 확인은 했으니까. 그의 딸이 무사히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그런 마음은 어느 날 그의 방에 찾아온 한 눈물진 꼬마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작은 베이라 꼬마.

언제나 르베나 앞에서는 세상 순한 아이의 얼굴을 하고선 뒤에서는 그를 경계하는 그 꼬마가 잔뜩 눈물바람이 되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잘게 날뛰는 아한의 모든 마력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그 순간부터 루드바하는 어떤 생각으로 아한을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단지 기억하는 건 도착한 그녀의 궁에서 언제나 누구보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티타임을 가지던 그녀가 나무기둥에 묶인 채로 드록 왕자의 칼에 사정없이 베여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닮은 탐스러운 검은 머리는 잔뜩 땀에 절어있었고 그를 닮아 무엇보다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는 분노가 어렸으며 언제나 건강하고 자유롭던 그녀의 몸은 밧줄에 묶여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루드바하의 온몸에서 신력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분노로인해 곧 살기가 된 신력들이 드록 왕자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폐하!! 여기 어린 베이라가 있잖아!! 정신 차려!!!”

하지만 다행인지 그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온 라웅의 고함에 놀란 루드바하의 푸른 눈이 움찔 떨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아한을 향했다.

“아……!!”

순간 루드바하가 놀라 빠르게 신력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아한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비명 소리가 외궁을 가득 채워 나갔다.

“…꺄아악!”

“왕자님!!”

“드록 왕자님!”

손에 쥐었던 찻잔을 던지고 벌떡 일어난 이아린 그리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드록의 시종과 기사들. 그들의 비명 소리가 외궁에 가득 울려 퍼진 것이다.

그리고 루드바하의 벽안도 크게 떠지며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록의 칼날에 제 밧줄을 갖다 댄 르베나가 한순간의 깔끔한 동작으로 은빛의 검을 차 올린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드록 왕자의 목에 제 검을 가져다 대었다.

땀으로 젖어있던 머리칼이 바람에 흘려 나부꼈고, 그녀의 붉은 눈은 언제나처럼 고고하게 빛났으며 드록에 의해 여기저기 붉게 베인 자국마저 그녀의 초연함을 빛바래지 못했다.

쿵쾅쿵쾅.

루드바하의 심장이 더없이 거세게 뛰었다.

쿵쾅! 쿵쾅!

바람결에 흔들리는 르베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드록을 향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더없이 루드바하의 숨을 꽉 조여 왔다. 그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에 멋대로 루드바하의 신력이 반응해 날뛰었다.

따뜻한 듯 부드러운 바람이 강하게 일대를 쓸어왔다. 르베나의 미소에 빠져있던 외궁의 모두가 그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의 바로 옆에 있던 라웅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이 인간이……. 오늘 왜 이래?”

하지만 지금의 루드바하에게 라웅의 목소리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 왜 저러냐?”

또 이어진 라웅의 물음에 아한마저 고개를 돌려 루드바하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 역시도 알지 못했다.

그의 짙은 푸른 눈은 오직 르베나를 향해 곧게 뻗어있었다.

쿵쾅쿵쾅……!

그의 푸른 눈에는 불에 타듯 뜨거운 그녀의 모습이, 그의 빨개진 귀에는 터질 듯 박동하는 그의 심장소리가. 그리고 그의 전신에는 르베나를 향해 요동치는 그의 신력이 가득 찼다.

겨울이 오기 얼마 전.

그렇게 루드바하의 심장은 온전히 한 여자의 것이 되어 버렸다.

* * *

그 후로 르베나는 훌쩍 드록 왕자와의 내기를 위해 길을 나섰다. 궁을 떠난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루드바하는 저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르베나가 떠나자 디오니스 전체에 텅 비어버린 것 같은 허무가 찾아왔다.

설렘. 분노. 살기 그리고 허무.

단 한 번도 그가 갖지 않았던 낯선 감정들이 그녀를 만난 며칠 동안 수도 없이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괜찮았다.

아직은.

아직은 충분히 그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기로 한 르베나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래서 충동적으로 가스트를 따라 길을 나섰을 때, 루드바하는 태어나 처음으로 숨통을 조여 오는 불안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세츠들의 중심, 유파시드. 이것이 그가 가진 칭호였건만. 르베나 앞에만 서면, 그녀와 관련된 일에만 나서면 무엇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어 버리는 것 만 같았다. 동시에 그가 느끼는 이 두려움의 정체가 지독히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르베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라웅의 말에 준비도 없이 떠나버린 건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의 딸을 꼭 지켜주겠다는 약속.

생명을 보장받았고 덕분에 유파시드가 된 루드바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루드바하는 절대로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스트와 그의 눈앞에 강한 마력의 파장과 함께 나타난 디오니스 제1기사단을 본 순간.

그의 심장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독한 분노였고 실망감이었으며 또한 지독하게도 아픈 그리움과 뜨거운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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