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아벨디온 上 외전 : 루드바하 이야기 (2)
“아니! 폐하 말대로면 그 남자 벌써 사십대나 오십대 아니야?
그런데 그만한 힘을 가진 그 나이 대 마법사를 우리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디오니스를 향하는 길, 라웅이 유안과 루드바하를 향해 물었다. 질문을 던지는 라웅의 입안에는 채 씹지 못한 감자가 한 가득이었다.
“…하아, 라웅!”
한숨을 내어 쉰 유안이 손으로 라웅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에 욱욱!! 하며 발버둥을 치는 라웅을 짜게 식은 눈으로 본 유안이 말했다.
“상황으로 추측하건데, 그는 그 날 폐하께 많은 양의 힘을 양도했으니 어쩌면 지금은 평범한 사람일지도 몰라. 아니면 힘이 강하지 않은 베이라가 됐을지도.”
유안의 말에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꿀꺽 감자를 힘겹게 삼킨 라웅이 유안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힘을 느끼냐? 어? 그것도 디오니스에서 발산한 힘을 젠에서 느낄 정도면 그게 작은 힘이야? 응??”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는지 유안은 다시 한번 라웅의 입을 막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루드바하를 바라보며 무언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유안의 시선과 라웅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루드바하가 말했다.
“글쎄… 나도 모르니까 가보는 거 아니냐.”
루드바하의 싱거운 대답에 라웅과 유안은 실망스러운 시선을 돌린 채 다시 투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며 피식 미소 짓던 루드바하의 얼굴로 다시 옅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딸이라고 했던가.’
쓰러지기 직전 들었던 말이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루드바하는 기억했다.
‘그를 닮은 딸이라면 분명 그와 같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가졌겠지.’
루드바하가 순간 이유 없이 두근대는 심장을 남몰래 가만히 눌러보았다.
“진짜 제대로 느낀 건 맞아?”
입 안 가득 쿠키를 물고 이야기하는 라웅의 물음에 루드바하의 무표정한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어렸다.
“그걸 모르니까 며칠째 찾고 있는 거 아닌가, 라웅.”
분명 미소 짓는 얼굴임에도 루드바하의 얼굴을 본 순간, 라웅은 입 안에 남아있던 쿠키를 몽땅 꿀꺽 삼키고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루드바하의 지금 미소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라웅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루드바하의 얼굴에서는 다시 미소가 사라져 버리고 냉기만이 감돌았다.
“하아… 도대체 어디있는거지!”
작은 그의 한숨소리가 조금은 짜증스러운 말소리와 함께 새어나왔다.
디오니스에 온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그가 찾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일단 혹시 그가 아닐까 의심되었던 제노스 왕을 만나고는 확연히 다른 외양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는 확실하지 않은 기억을 탓하며 그가 말한 것이 딸이 아니라 아들일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드록 왕자에게도 기대를 했지만 그 역시 아니었다.
그나마 그 와중에 제노스 왕이 꽤 실력 있는 베이라라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그런 비밀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다섯 살, 그 날 이후 애타게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과 아마도 그가 부탁했던 그의 아이였다.
게다가 두 번째로 기대를 걸었던 드록 왕자는. 그의 자식이 아닌 게 정말 천만다행일 지경이었다.
“…하.”
다시 한번 허공에 흩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루드바하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분명 얼마 전 젠에서 느낀 그 기운은 그의 것과 많이 닮아있었다.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인,
상냥하면서도 폭발적인.
살면서 딱 두 번 느낀 그 기운은 분명 이곳 디오니스에서 전해진 것이 맞았다. 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인물에 그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불안과 초조함 같은 건 느껴본 일이 없는 그로써 이 감정은 매우 낯설면서도 기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국으로의 승격을 눈앞에 둔 현 상황에 디오니스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나마 역대 실력 있는 베이라를 배출해낸 가문 중 유일하게 생존한 왕가에 기대를 걸었건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는 상황. 루드바하는 자꾸만 한숨을 삼켜보았다.
“어쩔 수 없나.”
하는 수 없는 마음으로 반쯤은 마음을 놓은 루드바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요동치는 자신의 신력을 가만히 눌러두었다. 정말로 기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니,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마력이 전혀 없는 드록 왕자가 혹시라도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 더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가정이었지만 현재로써 루드바하의 발길을 붙드는 유일한 이가 불행하게도 그였다.
루드바하의 발걸음은 천천히 드록 왕자의 방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존경과 부러움 또 설렘을 가지고 그를 향했다. 하지만 그는 옅은 미소만을 지은 채 그들을 조용히 지나쳐 어느새 드록 왕자의 방 앞에 도달했다.
루드바하의 방문을 보고 놀란 시종이 얼른 방 안에 그의 방문을 고했다.
“왕자님, 유파시드께서 방문 하셨습니다!”
“…….”
하지만 무슨 일인지 시종이 루드바하의 방문을 알렸음에도 안에서는 허락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시끄러운 말소리가 계속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루드바하의 벽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 아주 짧은 순간. 그는 미약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그렇게도 만나고 싶었던.
그 기운을.
꾹.
루드바하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그, 또는 그의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이 한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방안에 있는 게 그 드록 왕자라고 생각하니 하염없이 들뜨던 마음이 순간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는 루드바하를 보고 시종은 그만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 버리고 말았다.
감히 유파시드를 방 앞에 계속 세워두는 이 상황에 그가 언짢아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좀처럼 방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의 흔적이 이 안에 있다니……!‘
그런데 그게. 드록 왕자라니…
“하아…….”
평생 쉬어보지도 않았던 한숨을 어째 디오니스에 온 며칠 동안 몰아 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조금은 실망한 제 마음이 우습고 그에게 미안하기도 한 그 순간, 열린 방 문틈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석을 보여 주면 제가 똑같은 것으로 구해 오도록 하죠.”
흠칫.
순간 목소리를 들은 루드바하의 몸이 알 수 없는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떨려왔다. 더없이 차분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는 분명 여성의 것이었다. 하지만 왜 저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토록 그를 끌어당기는 것인지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루드바하는 무엇인가에 이끌린 사람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루드바하조차 그의 걸음을 옮기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그는 그렇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까지 그의 옆에 유안이 함께했다는 사실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곧 실성한 듯 웃어대는 드록 왕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하하. 진짜 미친년이네. 야 머리에 뭐 맞았냐? 이건 드워프의 창고에서 구해온 보물이야! 너 따위가 어디서 손쉽게 구해올 게 아니라고!! 얼굴 좀 반반하다고 몸이라도 이용할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어.”
멈칫.
드록 왕자의 말을 들은 루드바하가 순간 이끌리듯 옮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세상에 태어나 저렇게 저열한 말을 그는 맹세코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모범을 보여야 할 한 나라의 왕자가 여성한테 저런 말을 내뱉다니.
앞에 있는 여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드록의 저열한 말만으로도 루드바하의 신력이 분노로 잘게 날뛰었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그 모든 신력을 꾹 눌러 담았다. 그의 분노보다도 더 그를 강하게 잡아끄는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드바하의 붉은 입술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그럼 내기를 하면 되겠네요. 괜찮다면 제가 증인을 서도 되겠는지요?”
누군가의 일에 이토록 즉흥적이고 대책 없이 나선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던 그이건만
어째서인지 생각보다 말이 더 앞섰다.
그리고.
휙.
루드바하를 향해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모습이 천천히 그의 벽안에 박히듯 들어왔다.
칠흑 같이 어두운 검은 머리. 태양보다 뜨겁고 밤보다 어둡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세상의 모든 유혹과 매혹은 뭉쳐놓은 것 같은 자태.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그를 향하고 잠시의 깜빡임으로 그 빛을 잃은 찰나
쿵쾅쿵쾅
그의 심장이 아프도록 뛰어댔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딸인지, 그의 마력인지,
그가 젠에서 느꼈던 그 기운이 눈앞에 선 그녀의 것인지 따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절대 그의 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쿵쾅쿵쾅.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뛰어대는 심장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루드바하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분은… 누구시죠?”
그답지 않은 말투와 그답지 않은 멘트가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르베나.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그의 심장은 이미 폭주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