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외전 : 루드바하 이야기 (1)
창밖을 보며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남자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은발은 여타의 귀족여성들보다 결이 좋아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에 티끌조차 없는 하얀 얼굴은 신이 모든 정성을 쏟아 부은 듯 완벽한 한 점의 그림 같았다.
거기에 시리게 빛나는 벽안은 언뜻 보면 서늘해 보였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뜨거워 보이기도 했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콧날 아래 자리 잡은 입술은 단정했지만 언제나 걸려있던 미소가 보이지 않아 지금만큼은 그를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행히 인명피해 없이 구출했다 합니다.”
부하의 보고가 끝났지만 그, 루드바하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언제나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적절한 언급을 해주었던 유파시드건만 어째서인지 반응이 없자 괜히 보고를 하던 성기사의 몸에 긴장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성기사를 향해 뒤로 돌아선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다행이군. 디오니스와 자칸에 각각 축하와 위로의 의미를 담아 선물을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정보부에게 ‘보토니에’에 대한 조사를 좀 더 서두르라고 전하도록.”
곧 언제나와 같이 말을 전하는 루드바하의 모습을 보고 겨우내 긴장을 푼 기사가 예를 갖춰 부복을 한 후 방을 나섰다.
그리고도 한참동안 방은 침묵에 싸여있었다.
“…하아.”
나직하게 내뱉는 루드바하의 한숨이 큰 방 가득 울려 퍼졌다. 그러고는 곧 의자에 앉은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아 제 벽안을 감추었다.
“…베나… 르… 베나.”
그의 단정한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한숨에 사무치도록 그립고, 사무치도록 뜨거운 감정은 전혀 숨겨지지 않은 채였다.
* * *
번쩍.
방 한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루드바하의 깊이 모를 어두운 청색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환희가 감돌기 시작했다.
“동쪽… 인가”
듣기 좋은 그의 저음이 방안을 감돌 때 쯤, 벌컥 문이 열리며 그의 친구이자 수하인 라웅과 유안이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예의 없는 라웅의 행동거지와 루드바하를 향한 반말에 유안은 라웅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부었고 그들은 한동안 제국으로의 격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중요한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유안은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이는 루드바하를 보며 물었다.
“유파시드, 오늘의 미소는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군요.”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입 꼬리 가득 치미는 미소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찾은 것 같다. 드디어.”
그리고 이어진 루드바하의 말에 유안과 라웅 모두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라웅이 루드바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말을 건네는 라웅의 얼굴에는 꽤나 흥분한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찾았다고? 그… 그 사람 힘을? 정말? 어디서?”
두서없이 쏟아지는 라웅의 말이 언제나 유안에게 지적받던 반말임에도 이번엔 유안조차 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 루드바하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창문 너머 먼 곳을 한참 미소 띈 얼굴로 바라보던 루드바하의 입술이 이내 부드럽게 풀어졌다.
“…동쪽. 아마도.”
“디오… 니스?”
루드바하의 말을 받아 한 왕국을 떠올린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전히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유안에게 말했다.
“우리의 첫 번째 일정은 디오니스. 그곳으로 하지.”
말을 하는 그, 루드바하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정중함을 가장한 여느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보였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루드바하의 나이 고작 다섯 살에 그는 최연소 유파시드가 되어 젠의 왕이 되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고 앞으로도 없을 유례적인 일에 젠을 비롯한 모든 왕국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칭송하고 이야기하길 멈추지 않았지만 오직 단 한사람.
루드바하 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에게 쥐여 준 운명이었음을.
분명 루드바하는 누구보다 큰 신력을 타고난 세츠였다. 아마 그대로 성장했다면 그는 무리 없이 유파시드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타고난 큰 신력의 각성을 무사히 넘겨 성인이 될 수 있었다면 말이다.
예로부터 신력이나 마력을 어린 나이에 크게 타고난 아이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는 육체 때문에 단명하기 일쑤였고 루드바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례없이 큰 신력을 타고난 아이는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염려의 대상이었다. 능력 있는 세츠였던 루드바하의 부모는 수시로 아들의 신력을 봉인했지만 고작 아기일 뿐인 루드바하의 신력은 시도때도 없이 그들의 봉인을 뚫고 날뛰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루드바하는 여느 때처럼 부모님의 봉인을 뚫고 나온 신력 때문에 결계가 쳐진 놀이방에서 잠시 혼자 놀고 있었다.
“…심심해… 하우……!!”
작게 중얼거린 귀여운 아이의 머리는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눈부시게 빛났다. 통통하게 올라온 새하얀 볼 살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고 밝은 청색의 눈은 마치 깨끗한 호수와도 같아 보는 이의 마음마저 정화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봉인을 뚫고 나오는 신력 때문에 루드바하는 본의 아니게 결계가 쳐진 놀이방에 혼자 있곤 하였다. 아마도 머지않아 그의 부모님은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를 있는 힘껏 안아주고는 다시 힘을 합쳐 그에게 봉인주문을 걸어줄 것이다.
더 강한 봉인주문을 위해 부모가 힘을 쌓는 잠깐의 시간. 그 시간동안 혹시 모를 사고를 위해 루드바하를 놀이방에 혼자 두는 것을 끔찍이 미안해 할 만큼 그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자애는 넘쳐 흘렀다.
“루시드님 내외는 어떻게 그렇게 강한 신력을 타고나셨는데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지?”
모두가 의문을 가지는 그들이 바로 루드바하의 부모였다. 그럼에도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에게 약 삼 십 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건 꽤 심심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 날도 수많은 동화책과 장난감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루드바하는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때,
“…안녕?”
들려오는 듣기 좋은 소리에 작은 루드바하의 얼굴이 갸우뚱 뒤를 돌아보았다.
“…우와!!!”
그러고는 앙증맞은 작은 입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감탄을 쏟아냈다.
칠흑처럼 어두움 검은 머리. 뜨거운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어느새 루드바하의 앞에 나타난 존재는 루드바하의 다섯 살 인생동안 본 사람 중 단연 가장 멋있는 사람이었다. 천사가 재림했다고 불리는 루드바하의 아버지가 선하고 완벽하게 그려낸 한 폭의 부드러운 그림이라면 지금 눈앞의 남자는 세상의 모든 불꽃과 매혹을 담아내 그린 강렬한 그림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모습에 어린 루드바하의 입은 자연스레 벌어지고 있었다.
“쿡쿡.”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귀엽다는 듯 웃자 루드바하의 청안이 더 크게 벌어졌다. 누군가가 웃는 모습에 이렇게 심장이 떨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벅저벅.
그런 루드바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남자가 곧 루드바하에게로 다가왔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결계가 쳐진 이 방에 이방인이 들어섰다는 것쯤은 그의 화려한 외모에 이미 생각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곧 그가 미소지은 얼굴로 물었다.
“이름이 뭐야, 몇 살?”
목소리조차 듣기 좋은 그의 물음에 어린 루드바하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답했다.
“루,루드바하요. 다섯 살이에요!!”
그런 루드바하를 한참 웃으며 바라보던 남자가 문득 루드바하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쓸며 말했다.
“그래, 루드바하… 음… 아저씨가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까 하는데 괜찮을까?”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선물이요? 음… 부모님이 이유 없이 선물 같은 거 받지 말라 그랬는데……?”
난생처음 반할만큼 멋진 눈앞의 남자가 주는 선물을 꼭 받고 싶으면서도 부모님의 말씀 때문에 고민하는 루드바하의 얼굴이 고뇌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음… 이건 아마 너희 부모님이 꽤 좋아하실 선물일 거야. 왜냐하면 이 선물이… 널 지켜줄 거거든.”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루드바하가 말했다.
“저보다 더 강한 힘만이 절 지킬 수 있다고 했어요!!”
루드바하의 말을 들은 남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 맞아. 아주 잘 알고 있네. 하하하!!! 너무 귀엽다 너. 우리 아기도 분명… 너처럼 사랑스럽겠지?”
루드바하를 보며 가득 미소 지은 남자의 말에 루드바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저씨도 아기 있어요? 몇 살이에요? 그 아기 저랑 친구해도 돼요?”
‘이렇게 멋진 아저씨의 애기라니……!‘
무조건 친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루드바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자 조금은 씁쓸하게 웃어보인 남자가 말했다.
“이제 막 태어나서 정말 아기야… 하지만 분명 아주 예쁘고… 사랑스럽겠지.”
남자의 말을 듣던 루드바하가 처음으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짓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일어나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그에게 다가가 가만히 안아주었다.
짧고 통통한 팔은 큰 체구의 그를 완전히 감싸지 못했지만 아이는 뒤꿈치를 들며 노력했다.
“아저씨… 슬퍼요? 엄마가 슬퍼 보이는 사람은 이렇게 안아주는 거라고 했는데…….”
힘겹게 제 목을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에 남자의 얼굴에 곧 슬픈 미소가 번져갔다.
그러고는 남자가 루드바하를 제게서 부드럽게 떼어내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그래,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너라면 내 선택이 틀리지는 않겠구나.
루드바하. 이제 아저씨가 너한테 선물을 줄 거야. 이 선물은 네가 건강한 성인이 될 수 있게 도와줄 거란다. 그러니 이 선물을 받고 딱 하나만… 약속해줄래?”
남자의 얘기를 듣고 있던 루드바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서부터 철이 일찍 든 루드바하는 알고 있었다. 제 몸 안에 도사리는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힘이 루드바하를 빨리 데려갈까 봐 언제나 남몰래 눈물 흘리는 엄마도 그런 엄마를 다독이면서 한없이 따뜻하고도 슬픈 미소로 루드바하를 안아주는 아빠도.
루드바하는 이제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그만 보고 싶었다. 그리고 왜인지 루드바하의 모든 감각이 얘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눈앞의 이 사람이라면. 그걸 가능하게 해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루드바하가 그에게 말했다.
“선물을 주면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음… 루드바하의 이름을 걸고 약속 할께요!! 무슨 부탁을 들어드릴까요?”
더없이 맑고 투명한 루드바하의 청안을 보며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곧 아무 말도 잇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으며 루드바하의 이마에 크고 따뜻한 본인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화아아악-----!!
뜨겁고도 따뜻한 느낌.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처단할 단호함.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슬픈… 기운.
그런 느낌의 힘이 루드바하의 몸 속으로 속절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슈와아아아악----
루드바하의 몸 속에 맴돌던 신력과 만나 조화를 이룬 그 기운이 폭발하듯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그 기운은 작은 루드바하의 몸을 통해 뻗어나와 아이가 있던 놀이방과 루드바하의 저택, 그리고 젠 제국의 전역을 거쳐 신마전쟁으로 수많은 피를 뿌려대는 전 대륙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강한 기운에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루드바하의 작은 몸을 따뜻하고 큰 손이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갑작스러운 큰 기운에 의해 조금은 힘들어 하는 루드바하를 보던 그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디 이 힘으로 내 딸을… 지켜주렴, 루드바하.”
곧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 오로지 남자의 모습만을 쫓던 흐릿한 루드바하의 마음만이 공중을 하염없이 떠돌았다.
달칵.
“주위를 수색해!!”
“당장 루드바하님을 보호해!!”
순간 루드바하의 놀이방 문이 벌컥 열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누군가의 힘을 느낀 그들은 놀란 얼굴로 하나같이 방에 들어서 신력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들은 방 한 가운데 가만히 앉아 엄청난 힘을 내보이는 어린 루드바하를 너나 할 것 없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루드바하…….”
“맙소사, 루드바하…….”
놀라서 방에 들어온 그의 부모조차 아들의 모습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이신 유파시드에게 언제나 신의 안배가 함께하시길.”
방 안에 들어선 모든 사람이 동시에 어린 루드바하를 향해 존경의 의미를 담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국력 903년.
사상 최연소 다섯 살의 유파시드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