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43)
타닥타닥.
이제는 힘없이 꺼져가는 메마른 가지의 잔불에 마지막 가지마저 앗아가는 소리가 고요 속에서 들려왔다.
르베나의 힘이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타들어가던 모든 것들은 재가 되어 허공을 헤맸고 매캐한 연기가 사라진 곳에는 고요와 적막이 자리했다. 르베나의 눈앞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바스락……!
그때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르베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스트.”
짧게 내뱉은 르베나의 말에 그녀의 뒤로 온 가스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차분히 말했다.
“공주님 덕분에 모두 무사합니다. 아한과 스릴은 정신을 잃었지만 다행히 괜찮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여전히 뒤로 돌지 않은 상태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가… 다행이군.”
하지만 여상히 건네오는 르베나의 대답에 가스트의 회색 눈에 잠시 안타까운 마음이 어렸다가는 사라졌다. 그리고 앙상하게 타버린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부끄러운 얘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 실은 아까 저택에서 아한과 스릴 공주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전… 절망했습니다. 방 안에 흐트러진 모습과 아이들의 피를 보고는 정신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아들내외가 죽고 처음으로 분노로 마력이 일렁였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저를 채찍질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공주님의 마력이 보이더군요.”
조용한 사위에 차분한 가스트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퍼져나갔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저분이 계시는 한. 공주님이 계시는 한 우리는 누구도 잃지 않을 수 있구나. 저분이 우리 모두를 지키고야 말 것이니. 이렇게 말입니다.”
가스트의 눈에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나이를 먹고도 어린 공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만 제가 참 부끄러운 순간이었지요. 하지만 공주님. 동시에 저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런 분이 저희 곁에 계시다는 것에. 그런 공주님이 저희 곁에서 저희를 위해 싸워주신다는 것에 말입니다.”
가스트의 말이 끝났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르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스트가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르베나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포근하게 웃어 보였다.
“아마 그때 제가 포기했더라면, 건물이 붕괴되는 마지막 순간 저는 일행들을 보호할 실드를 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그때 제가 포기했더라면, 화염구가 덮쳐오는 순간 기사들과 아이들을 텔레포트 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아직도 르베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공주님,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아까 화염구를 막지 못한 것은 공주님의 실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주님의 존재 자체에 힘을 얻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었던 감사한 순간이었단 말입니다.”
꽈악.
가스트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흔들리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방금 전 아둘의 화염구가 아벨디온을 향해갈 때 르베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적이 대치중인 자신을 두고 약자를 노릴 거란 생각 자체가 르베나에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염구가 덮친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본 순간 르베나는 또다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래서 더 빨리 가스트의 텔레포트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완벽에 대한 갈망. 그리고 실책에 대한 자괴감.
지금 르베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명 그러한 감정의 파편들일 것이다. 아둘이 죽고 가스트 덕분에 모두가 무사했음에도 황폐해진 이곳에서 르베나가 발을 떼지 못했던 이유는. 또다시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스트는 그런 르베나의 마음을 위로하러 왔음이 분명했다. 가스트의 회색 눈에 스스로의 손을 피가 날 정도로 꽉 쥔 르베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르베나의 손. 그 손은 여느 십 대 소녀들같이 작았지만 두 손 가득 검은 재가 묻어있었고
오래된 굳은살들로 엉망이었다.
혼자서 버텼어야 할 모진 순간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 힘든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을 이 소녀는 저 작은 손을 움켜쥐고 오로지 스스로만을 의지하며 극복해 나갔을 것이다.
주변이 아찔해질 정도의 환한 미소를 차가운 표정으로 감추어두고 주변을 미소 짓게 할 따뜻한 마음을 냉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나무라며 쉼없이 달려왔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구하고 주변을 구해왔던 그녀, 르베나에게는 저 작은 손을 꽉 쥐는 것만이 그녀가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온기였을 것이다. … 이전까지는.
꼬옥.
곧 그 작은 손에 늙고 주름이 가득한, 하지만 온기역시 가득한 가스트의 손이 보태어졌다. 낯선 온기에 르베나가 놀란 눈을 들어 그, 가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멀리서 비춰오는 태양빛에 순간 가스트의 회색 눈이 평소보다 더 맑아보였다.
르베나의 눈을 마주친 가스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이제는 저희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공주님.
저희 모두가 공주님의 존재를 믿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더이상 스스로를 힐난하고 매섭게 몰아가지 마십시오. 공주님은 더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저희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순간, 뒤에서 또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한과 스릴을 안은 아벨디온이었다.
모두 가까스로 화염구를 피한 탓에 잔뜩 재 투성이였지만 돌아선 르베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치아만큼은 하얘보였다. 그리고 기사들이 가스트와 손을 잡고 있는 르베나를 보고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단장님의 실드가 아니었으면 저희는 가스트 님의 텔레포트 이전에 이미 먼지가 되었을 겁니다!! 하하!! 아, 그런데 말입니다 단장님!! 진짜!! 진짜 감사하긴 한데… 저희 과잉보호 좀 그만 하십시오!! 단장님께서 자꾸 실드를 쳐 주시니까 저희 실력을 마음껏 보일 수가 없지 말입니다!!”
룬의 말에 다른 기사들도 하하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진짜 저희 실력을 아주 무섭게 보여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부단?”
한 기사의 물음에 무뚝뚝한 표정의 아를이 다가왔다. 분명 얼굴 가득 무심함이 가득한 그는 나타나자마자 선명한 금안으로 르베나의 몸을 찬찬히 훑었다. 언제나처럼 르베나가 다친 곳이 없나 살피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큰 손으로 르베나의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말했지, 단장은 살아남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는 거 아니라고.”
뜨거운 온기가 가득 담길만큼 큰 아를의 손이 거칠게 훑고 간 제 머리를 르베나가 어색하게 매만지는 순간, 바흐란과 칸, 루안 그리고 자칸의 기사들도 모습을 나타냈다.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 가스트의 실드 덕분에 모두 목숨은 구했지만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빠져나오느라 모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두들 잠든 스릴 공주와 아한을 보며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르베나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전했다. 그리고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자칸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르베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르베나 공주님, 아니 단장님”
“단장님의 은혜를 자칸은 절대 잊지 않습니다. 아니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
자칸 기사들의 뜨거운 진심이 묵직한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여자단장을 무시하던 예전의 모습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르베나를 향한 그들의 눈은 다정했고 따뜻했다.
“하아… 너무 고단한 하루였어요. 얼른 성으로 돌아가 씻고 좀 먹읍시다, 우리!!”
그리고 한 나라의 왕답지 않게 소탈하게 말하는 레턴이 등장했다. 어느새 풀어헤친 그의 붉은 머리와 선명한 선홍빛 눈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는데 그 미소는 언뜻 보면 매우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가 르베나와 사람들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 분위기는 뭐죠? 악당들은 모두 물리치고 우리는 승리했는데! 모두 좀 웃지 그래요?”
소탈한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모든 것이 타버린 대지.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대지를 단단히 딛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더없이 후련해보였다. 저마다의 꺼풀을 하나씩 벗어던진 듯한 그들의 모습이 르베나의 눈에 박혀왔다.
여전히 르베나의 손을 마주잡은 가스트의 늙은 손은 더없이 따뜻했다. 아를이 거칠게 헤집은 머리에는 여전히 그의 손이 전한 뜨거운 온기가 남았다. 그리고 단장님의 실드 혜택을 누가 더 많이 받았는가를 따지다가 아를에게 한 대씩 얻어맞은 아벨디온 기사들의 웃음소리는 무엇 하나 거치지 않고 르베나의 가슴에 온전히 박히어 왔다.
스릴을 챙기면서도 르베나에게 계속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자칸의 기사들과 바흐란에게서는 여성과 타국을 경계하는 예전의 태도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도대체 언제 온 건지도 모르는데 자연스럽게 일행에 스며든 레턴의 모습은 위화감 하나 없이 하나의 따뜻한 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묵직함 뜨거움이 르베나의 목 안쪽을 무겁게 짓눌렀다. 왜인지 가스트의 손이 너무 뜨거웠고 아를의 손이 지나간 머리가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딱 그만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라 생각했다. 어린 르베나를 학대하는 사람들 사이 아무도 르베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르베나는 영원히 고통받아야 했고 그녀의 주위 사람들은 그녀로 인해 하나하나 죽어가야만 했다. 그녀는 아무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조차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이전 생의 일일뿐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지금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함께 뛰어들 아벨디온 이 있었다. 제 심장을 맡겨도 두렵지 않을 아를과 다한이 있었고, 사나와 후벤, 가스트와 아한의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어 르베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조금씩 관계가 회복되는 제노스와 즐기는 티타임도 부쩍 즐거워졌다.
‘그래, 이제는 다르다.’
혼자서 뭐든걸 책임지고 떠안아야했던,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던 이전의 삶과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녀가 완벽하지 않아도, 실수를 하더라도 그 틈을 함께 메워줄 동료들이 생겼다.
그녀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야?”
르베나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오랜 아픔을 담고 터져 나왔다. 동시에 르베나의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흘리는 사람조차 인지하지 못할 눈물 방울이 하얀 얼굴 가득 떨어져 내렸다.
“혼자가 아니라고……?”
다시금 중얼거리는 르베나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그녀의 눈물은 더 많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눈물이, 아주 오랜시간을 버텨온 눈물이. 르베나의 얼굴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내 가스트와 아를, 주변 사람들조차 놀란 듯한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단 한번도 울지 않았던 르베나. 단 한번도 환희 웃지 않았던 르베나.
그런 그녀가 지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하게 미소지으며 눈물을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탄성소리가 새어나왔다.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 아래 검은 머리의 소녀는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미소는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보다 밝았고 환했다. 그런 그녀의 붉은 눈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은 세상의 어떤 샘물보다도 맑고 투명해 보였다.
만약 이 세상에 미소만으로 세상을 구하고 눈물만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가 있다면 그건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저 소녀일 거라고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생각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환하게 웃은 르베나가 제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끝끝내 그녀를 놓아주지 않던 마지막 껍질을 깨게 해준 당신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유일한 의지.”
라고.
태양이 떠오르는 마를한의 이름 모를 작은 마을.
그 마을에서 르베나는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을 벗어던졌다. 오랜 시간 그녀의 마음을 ‘혼자’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었던 속박을 눈물과 함께 흘려보냈고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에 다가온 ‘함께’라는 이름을 가장 환한 미소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 여느 때보다 힘차게 르베나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르베나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더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르베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기에.
환한 르베나의 미소만이 탄성과 고요를 가로지르며 그 공간을 가득 채워나가고 있었다. 어느 겨울의 마를한이었다.
<검을 든 왕녀, 르베나> 제2장 아벨디온 上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