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42)
아둘의 화염구가 아벨디온 기사단을 향해가는 모습이 르베나의 붉은 눈에 뚜렷이 잡혀왔다.
다가오는 화염구를 놀라서 바라보는 룬과 기사들이 정신을 잃은 아한과 스릴 공주를 더욱 꼬옥 끌어안는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보여 졌다.
하지만 그 순간, 르베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한과 스릴이. 아벨디온 기사단이. 저곳에 있는데.
르베나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기도 전인 그 짧은 시간에 화염구가 이미 그들을 덮쳐버렸기 때문이다.
고오오오오----!!!
화염구가 지나감과 동시에 세상은 고요에 휩싸였다.
타닥타닥,
화염구가 뿌린 불씨에 주위에 있던 마른 가지들이 군데군데 타들어가고 화염구에 맞은
자리는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처럼 움푹 패여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세상은 고요했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씨가 사방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르베나의 붉은 눈은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움푹 패인 자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자리.
방금 전까지 놀란 표정으로 아한과 스릴을 꼭 끌어안았던 그들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우리의 목표는 아한과 스릴을 구하는 일이라고. 그곳에 그들을 보냈는데…….’
그곳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그들의 숨소리가, 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르륵.
마치 감정 없는 인형처럼 고개를 돌린 르베나가 아둘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낮은 어조로 묻는 르베나의 말에 아둘이 평온한 자세로 말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주님의 가장 큰 실책은 여기에 아군이 너무 많다는 거라고.
이제 두 명… 남았나요.”
아둘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먼 오른편을 향했다. 카를로를 유인해 아를이 사라진 바로 그 방향으로. 아둘은 여전히 멍하니 서있는 르베나를 한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무서운 곳입니다, 공주님. 그러니 그렇게 멋모르고 날뛰다가 다치는 건 결국. 공주님의 주변 사람들뿐이란 말씀입니다.”
곧 아둘의 손에서 다시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모여든 힘이 어느새 다시 큰 힘이 되고 그 힘이 다시 커다란 화염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는 온 세상이 불에 타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 구실도 못하는 모든 인간들이 이 화염 속에서 고통스럽게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지금의 이곳 처럼 말입니다.”
그러고는 아둘이 제 손에서 피어낸 화염구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멀리 있는 아를을 향해 던지려는 그 순간.
슥각-!!
날쌘 은빛의 빛이 그의 손을 스쳤다.
“으… 으… 으으윽!!!!!!”
동시에 아둘의 비명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검기가 아둘의 손을 베어낸 탓이었다.
저벅저벅.
아둘이 제 손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르베나의 걸음이 조금씩 그에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내 실수가… 이곳에 아군이 많은 것이라고?”
“으아아악!!!”
르베나가 걸으며 작게 읊조리는 말은 고통에 울부짖는 아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걸음을 멈추지도,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아니, 그건 내 실수가 아니라 너의 실책이다.”
저벅저벅.
어느새 아둘의 앞까지 다가온 르베나가 은빛의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검 끝으로 고통에 가득 찬 아둘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흠칫.
더없이 무감각해 보이지만 더없이 강렬하게 들끓고 있는 르베나의 붉은 눈을 본 순간 아둘은 방금 전까지의 고통을 모두 잊을 만큼 압도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아픈가? 고통스러운가? 하지만 네 손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지.”
휙-!!
그리고 다시금 그어진 르베나의 칼날이 이번에는 아둘의 오른쪽 다리로 향했다.
“…으아악!!”
칼날에 베어 다시 고통스러워하는 아둘에게 르베나가 말했다.
“똑똑히 말해두지. 네가 오늘 이곳에서 죽는 이유는. 내가 아니라 내 사람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걸.”
곧 르베나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작은 상처에 몸부림치는 아둘을 냉소적으로 바라본 르베나의 붉은 눈이 선명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르베나.”
작게 소리낸 르베나의 언령에 마력들이 반응해 아둘의 온몸을 꽁꽁 얽어매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랗고 가시 돋은 넝쿨에 묶인 것 처럼 아둘이 고통스러워하며 바둥거렸다. 그가 급히 힘을 끌어올려보았지만 힘을 끌어올리는 족족 그를 옭아맨 르베나의 마력이 그의 힘을 빨아들일 뿐이었다.
아직도 놀랄 정도로 많이 남아있는 르베나의 마력에 아둘이 경악하자 그녀가 말했다.
“아, 나한테는 아군이 워낙 많아서.”
그때 르베나의 품에서 무언가 작은 것이 꿈틀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팅!!”
누가 보더라도 무척이나 분노한 듯 큰 파란 눈이 요요히 빛나는 작은 생명체였다. 아둘의 힘이 그 작은 생명체에게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작은 생명체, 팅의 눈이 검게 물들어 갔다.
“…전설 속의… 나팅……?”
아둘이 넋이 나간 듯 작게 읊조리자 팅이 도도하게 팅! 외치고는 더 빠르게 아둘의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너 같은 게 알아봐 봤자 기분만 나쁘다 같은 도도함이 느껴졌다.
“…크흑!!”
급격하게 힘이 빨려 들어가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둘이 급히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둘은 이전보다 더 큰 공포감에 휩싸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은 그가 만들어낸 화염구에 온통 불타고 있었고 매캐하고 싸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그의 불씨들을 크게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불씨보다 선명하게 이글거리는 붉은 눈을 한 그녀가 서 있었다.
용서와 자비 따위는 절대로 베풀지 않을 그녀가. 오직 처단과 심판만을 내릴 그녀가.
그가 여태껏 저지른 추악한 죄들을 그가 퍼뜨린 불꽃같은 강렬함으로 되돌려줄 그녀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안 돼…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곧 아둘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르베나가 그를 향해 작게 읊조렸다.
“딱 그만큼만 고통스러워해. 네가 다른 이들에게 심판이라는 어쭙잖은 이름으로 내린 그 고통. 딱 그만큼만.”
곧 르베나의 온몸에서 검붉은 색의 마력이 활활 타올라 아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윽… 으윽!! 아아아악!!!”
이윽고 아둘의 비명 소리가 주위를 감싼 불씨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마력이 아둘의 몸 속에 흘러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아둘의 몸 속에 남은 ‘보토니에‘의 힘은 그의 몸 안에서 르베나의 마력과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마력이 더 흘러 들어가면 갈수록 아둘의 고통은 커지고 그의 비명 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어째서 그자의 힘이… 어째서……!!! 아니야… 말도 안 돼… 말도……!!! 아악!!!!”
알 수 없는 말을 소리치던 아둘의 비명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사방에 메케한 연기가 자욱해질 때까지도.
이윽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아둘이 거의 정신을 잃었을 때,
툭.
르베나의 마력이 그를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이제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며 끅끅대는 그를 보며 르베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가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함부로 남을 재단할 권리는 없어. 그러니 나 역시 널 재단할 수 없지. 단지 내가 오늘 네게 행하는 것은, 오로지 내 사람들을 건드린 것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르베나의 응집되었던 힘이 서서히 크기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황홀해질 듯한 검붉은 빛은 점점 주위를 가득 메울 듯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을 바라보던 아둘이 마지막 순간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킥킥 거리며 말했다.
“그게… 아까 그 힘이… 크크… 끝이 아니었다고? 크크… 어차피 날 죽인다고 해도… 큭… 달라질 건 없어… 크크… ‘보토니에’는… 표적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크크… 다행이군… 먼저 간 네 동료들이 있어 심심하진 않겠어…….”
발밑에 누워 킥킥거리는 아둘을 싸늘하게 본 르베나가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힘이 점점 크게 퍼져나가며 사방의 모든 불씨를 꺼트리고 매캐하게 퍼진 연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점점 밝아오는 사위의 빛은 르베나의 검붉은 힘을 비껴 새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무감각하게 바라본 르베나가 마치 혼잣말을 하 듯 아둘에게 말했다.
“그래.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먼저 간 네 동료들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쉬워서 어쩌지.”
르베나의 붉은 눈이 미약한 웃음기를 머물고 그를 향했다.
“ 거기에 내 동료들은 하나도 없을 텐데.”
작게 읊조린 그녀의 말에 아둘이 놀란 눈을 치켜뜨는 그 순간.
“…르베나.”
르베나가 본인의 언령을 내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은 온통 검붉은 빛에 잠겨갔다.
따뜻하지만 강렬한 빛.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빛. 모든 어두운 불꽃을 꺼트리고 모든 매캐한 연기를 몰아내는 빛. 아둘의 몸을 천천히 앗아가는 빛.
르베나의 빛이 주위의 모든 것을 조용하고 광폭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둘이 본 세상의 마지막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