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41)
“너 같은 거하고도 이 정도 놀아 줬으면 되지 않았나?”
…콰악!
이지를 잃은 마법사가 본능에 의해 미처 달아나기도 전, 레턴의 손에서 응집된 신력구가 그의 배 정중앙에 꽂혀들었다.
“끄야아아아아!!!!!!!”
자지러질 듯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찢어지듯 울리자, 레턴이 곧바로 그의 배가 꽂혀있는 마법구에 신력을 더했다.
“우욱……!!! 우우욱!!”
그러자 울컥울컥 무엇인가를 뱉어내는 듯한 그의 입에서 곧 검은 기운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뱉어내는 기운의 양이 많아질수록 몬스터로 변해 기괴하게 일그러졌던 마법사의 몸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잔뜩 벌겋게 충혈 되었던 그의 눈도 서서히 사람의 정상적인 눈동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잃었던 이지도 조금씩 돌아오는지 그가 레턴을 사뭇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노, 안도,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의 눈이 잠시간 벌어진 일에 대한 그의 모든 이야기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조금은 식은땀을 흘리던 레턴의 선홍빛 눈이 그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정신이… 드나?”
레턴의 나지막한 물음에 마법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보토니에’ 힘의 폭주를 막은 것도 모자라 그 힘을 제거해준 레턴에게 마법사는 지금 동경과 고마움 그리고 동시에 대한 레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레턴이 그를 원래대로 돌린 것은 사실이기에 그는 두려움을 묻어두고 애써 레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우욱……!!”
마법사의 얼굴이 곧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몸이 조금씩 모래처럼 무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더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몸에 마법사의 눈에 절망과 공포가 어렸다. 그리고 그 눈을 가까이에서 마주본 레턴이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괴물인 채로 죽이기에는 너무 열 받아서. 감히 겁도 없이 마를한의 백성을 먹어치우고 내 머리카락을 잘라? 아까 내 아기백성이 예쁘다고 한 머리인데!!!”
마법사를 바라보는 레턴의 선홍빛 눈에 살기가 담기자 그가 더욱 절망에 찬 눈으로 레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허물어가는 육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의 구세주가 될 유일한 사람인 레턴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것뿐 이었다. 곧 레턴이 그에게서 미련 없이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너도 ‘보토니에’의 힘을 몸에 담는 순간부터 예상했던 결말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는 마.”
풀썩.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의 몸이 풀썩 허물어졌다. 하지만 ‘보토니에’의 끔찍한 힘은 이 순간마저도 그의 정신을 놓지 않아 그는 허물어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절망과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곧 그의 눈에서 눈물과 같은 것이 떨어졌다.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하는 눈물인지, 지금의 고통을 못 견디겠어서 흘리는 눈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마법사를 바라보던 레턴이 휙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리고 네 생명을 끊는 자비마저 베풀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면,.”
레턴의 선홍빛 눈에 멀리서 점점 주위를 장악해오는 검붉은 빛의 파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그의 서늘한 얼굴이 한 곳에 뚜렷하게 고정되었다.
“너희가 감히 ‘표적’을… 그녀로 골랐기 때문이야.”
풀썩.
등 돌린 그의 뒤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생명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레턴은 제 등 뒤에서 모래처럼 허물어버린 생명의 허무함에 잠시 기대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선홍빛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황홀하게 빛났다.
“…어떡하지.”
나지막이 내어 쉰 레턴의 숨이 무겁게 퍼져왔다. 동시에 점점 멀리서 그를 덮쳐오듯 다가오는 검붉은 힘을 그의 선홍빛 눈동자가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언제가 보았던 색. 언젠가 보았던 힘. 언젠가 보았던 느낌.
어디선가 또 무표정한 얼굴로 붉은 눈을 선명히 빛낼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어느새 멀리서 조금씩 보였던 검붉은 힘은 빠르고 강력하게 이내 그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레턴은 다가오는 그 힘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겁고도 강렬한 이 느낌. 그를 점점 알 수 없는 색으로 물들여가는 이 느낌. 그의 전부를 덮쳐오는 이 느낌. 그의 모든 피를 뜨겁게 만들어 버리는 이 느낌.
이 느낌이.
“하아… 미치도록 좋아…….”
그의 작은 목소리가 이내 해일 같이 몰아치는 검붉은 힘에 덮여 버리고 말았다.
* * *
“너는 얼마나 쓸 만한 지 한번 볼까?”
르베나가 미소 지으며 몸의 마력을 끌어올리자 아둘의 눈썹이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그가 제법 인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히 디오니스 최고의 베이라라고 불릴 만하군요. 정말 쓸 만한 마력입니다, 공주님.”
아둘의 말에 르베나가 가볍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쓸 만해? 그럼 넌 얼마나 쓸 만한지 보여줘 봐.”
말을 끝내자마자 르베나의 손에서 빠르고 강력한 폭풍이 뻗어나갔다. 르베나의 손에서 뻗어나간 폭풍은 아둘에게 다가갈수록 점점 그 크기와 세기를 불려나갔고 이내 그에게 닿았을 때는 세상의 재난이라고 표현될 만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콰과과과곽!!!
엄청난 바람 앞에 아둘의 실드에는 금방 빗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와장창창창……!!!!
아둘의 실드가 유리창처럼 깨져버리고 그 자리를 르베나의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읍……!”
당황한 아둘이 재빨리 두 번째 실드를 치려했지만 르베나의 폭풍은 이를 허락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온몸을 결박하며 몰아쳐대기 시작했다. 점점 난폭해지는 폭풍의 가운데에서 아둘이 이를 한번 꾹 악물고는 자신의 힘을 더 이끌어냈다.
휘와와왕앙!!!!!
곧 르베나의 폭풍이 아둘에게서 뻗어 나온 힘과 대치하며 엄청난 돌풍과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라면 아둘은 제 힘과 르베나의 폭풍 사이에서 고전하며 힘을 계속 불어넣고 있었지만 르베나는 멀리서 무표정하게 이를 바라만 볼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력을 다한 아둘의 노력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곧 르베나의 폭풍은 아둘의 힘에 제압되어 갔고 이내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휙……!
꽤 지친 듯한 표정으로 르베나를 돌아보는 아둘의 얼굴에는 조금의 노기가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아둘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말했다.
“저거 하나 없애는데 삼 분이 넘었어. 벌써 카레 하나는 만들 시간이잖아. 그런거 보면 너는 전혀 쓸 만하지가 않은 것 같네?”
르베나의 어조는 분명 평이했지만 아둘은 그녀의 말에 움찔했다. 르베나의 말대로 그녀의 폭풍을 없애는데 그는 이미 꽤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그러고도 겨우 없앴는데 르베나는 시간을 재고 있었다니……!
괜히 어린 계집에게 시험을 당한 것 같은 수치심이 아둘의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둘은 그런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며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꽤나 기고만장하시군요. 공주님, 좁은 세상에만 갇혀 사신 분께 이 세상은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랍니다. 제가 오늘 친절히 그 세상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말을 마친 아둘이 제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아까 레턴이 마법사의 품에서 꺼낸 것과 꽤 비슷하게 생긴 알약이었는데 새카맣고 작은 원형의 알약에서는 멀리서 보아도 꺼림칙한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그리고 곧 아둘이 그 알약을 삼키고 아그작, 아그작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이이잉--!!!!!
알약을 씹어 삼키자 곧바로 아둘의 주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는 아둘의 주위를 둥글게 몰아치던 바람은 점점 거세게 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무언가 심히 못마땅하다는 듯 아둘을 보며 말했다.
“그게 너희 ‘보토니에’의 힘인가? 생각보다 훨씬 더러운 기운이군.”
르베나의 말에 만족한듯 한껏 웃어 보인 아둘이 말했다.
“인간의 생명력에 깃든 힘을 응축해 만든 힘입니다. 하지만 추출과정이 고통스러우니 자연히 부정적인 감정이 담길 수 밖에 없지요.”
“추출?”
르베나가 아둘의 말에 불쾌한 듯 되묻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가지고 있어도 밥을 먹고 공기를 마시는 거 외에는 쓸 줄도 모르는 머저리들일뿐입니다.
그들에게서 유용한 힘을 거두어 우리가 가치 있게 쓰면 오히려 그들에겐 영광일 테지요.
힘의 추출원이 되는 거야말로 그들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쓰임이 아니겠습니까?”
진실을 읊는 듯한 아둘의 말에 르베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누군가의 쓰임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권리를. 누가 너희에게 주었지?”
르베나의 질문이 꽤나 의외인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아둘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들어본 질문이군요. 그 분도 저희에게 그리 물었다가는 모든 걸 잃고 나서야 후회하셨 더랬죠. 그리고 이젠 공주님께서… 모든 걸 잃을 차례이신가봅니다.”
이내 말을 끝낸 아둘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솟구쳐 나왔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고 난폭한 기운은 금방이라도 일대를 집어삼킬 듯 기어 나왔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르베나의 붉은 눈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생각 이상의 힘이 그에게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르베나의 남은 마력을 모두 끌어내야만 할 것 같다는 경종이 머리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아둘에게서 응집된 검은 기운이 뜨거운 불구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나온 것처럼 검게 불타는 화염의 기운이 집채만한 크기로 날아오고 있었다.
“르베나!”
르베나는 빨리 이름을 통한 언령 마법을 외우고는 자신의 힘을 응집시켰다. 그리고 다가오는 화염구를 향해 커다란 물줄기를 쏘아냈다.
쏴아아아아!!!
곧 검은 불꽃의 화염구와 흰색에 가까운 두꺼운 물줄기의 격돌이 일어났다.
콰콰콰곽!!!!!
천지가 울릴 정도의 소리가 지천을 울려대고 뜨거운 화염구에서 내뿜는 열기가 주위의 모든 것을 녹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차갑게 뻗어나가는 물줄기가 주변의 상처 입은 잿더미들을 씻어 내리고 있었다.
“읍……!”
하지만 아둘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은지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엄청난 양의 마력에 르베나의 입에서 나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콰과광!!
순간 기세를 더한 화염구가 좀 더 물줄기를 치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르베나마저 뜨거운 열기에 땀을 흘릴 정도로 화염구가 점점 더 기세를 더하며 안쪽으로 치고 들어온 것이다.
“공주님의 가장 큰 실책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 순간 르베나를 향해 묻는 아둘의 어조에는 때아닌 평온함이 감돌았다. 약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력을 쏟는 르베나의 붉은 눈이 불쾌감을 담고 그를 바라보자 아둘이 여느 때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아군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르베나를 향하던 아둘의 화염구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쏘아져나갔다.
아한과 스릴에게 다가가 아이들을 제 품 힘껏 안고 있는 아벨디온 기사단.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간 화염구가 그곳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크게 입을 벌린 것이다.
고오오---!!!
그리고 세상은 순식간에 고요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