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21화 (121/276)

12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40)

휙. 챙!!!!

사선으로 찔러오는 쌍검을 여유롭게 쳐낸 아를의 검이 날카롭게 카를로의 뺨을 그어낸 순간이었다.

사악--!

예리한 칼날의 베임에 까무잡잡한 카를로의 얼굴에 사선으로 빗금이 생기더니 이내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할짝. 혀로 입가까지 흘러내린 피를 훔쳐낸 카를로가 씨익 미소 지으며 카를에게 말했다.

“아벨디온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했나? 기사씩이나 되는 남자가 여자한테 이렇게 함부로 칼을 휘둘러도 되는 거야?”

환하게 웃은 카를로가 다시 쌍검을 치켜들고는 아를을 향해 날쌔게 돌진해왔다. 카를로는 여성치고는 큰 키가 아니었지만 그 덕분인지 굉장히 빠르고 민첩하게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를은 롱소드로 투박하게 카를로의 공격을 막아냈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격풍은 점점 더 크기를 불려오고 있었고 그만큼 불어오는 모래바람 역시 강해지고 있었다. 강하게 불어오는 모래 때문에 두 눈을 제대로 뜨기도 어려웠지만 두 사람은 누구하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부딪혔다.

주로 카를로가 날쌔게 틈을 비집고 들어오면 아를이 이를 막는 식이었다.

…챙!!!

다시 한 번의 부딪힘 끝에 카를로가 간격을 벌리면서 말했다.

“부단장이라해도 별거 아닌가 봐? 남자가 계속 방어만 해대고… 너무 재미없는데?”

씨익 웃는 카를로에게서는 여유가 묻어났다. 동시에 요사스럽게까지 보이는 카를로의 미소는 꽤나 매혹적이었다. 육감적인 몸매는 거의 걸치지 않은 옷 덕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고 까무잡잡한 피부는 그녀의 건강미를 부각시켰다. 고양이처럼 치켜뜬 눈매와 붉고 도톰한 입매는 분명 뭇 남성들의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가느다란 칼을 들고 웃는 모습은 꽤 자극적이고 했고 동시에 꽤 도발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들고 서 있는 아를을 보며 카를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정말 지겨워 죽겠네. 자꾸 이런 식이면… 정말 죽여 버린다?”

다시 한번 씨익 웃은 카를로가 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를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전과 똑같이 아를의 검은 카를로를 튕겨내기만 했다. 분명히 틈은 생기는데 생채기는 내지도 못하는 상황.

웃고는 있지만 카를로도 슬슬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카를로는 기어코 아를의 약점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아. 혹시 저 여자가 신경 쓰여서 못 싸우는 거야?”

카를로를 앞에 두고도 계속 먼 곳을 힐끔거리는 아를의 금안을 주시하던 카를로의 말에

처음으로 아를이 반응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만 마주쳐도 짜릿할 정도의 밝은 금안과 검은 머리의 아를은 웬만한 미남은 거들떠도 안보는 카를로의 눈에도 짜릿할 만큼 멋져보였다. 그리고 그런 아를의 눈이 제게로 향하니 카를로는 순간 기분이 꽤 들떴다.

“정말인가 보네? 질투 나게 말이야. 하지만 괜찮아. 곧 죽을 거니까.”

이어지는 카를로의 말에 아를의 눈이 카를로를 향하자 여느 때처럼 매혹적으로 웃어 보인 그녀가 말했다.

“우리 보토니에의 새로운 표적이 저 여자거든. 여기서 살아나가지도 못하겠지만 살아나간다 해도 며칠 안에 죽을걸, 저 여자. 그러니까 곧 죽을 시체 말고 나랑 노는 게 어때? 나 네가 좀 마음에 드는데.”

씨익 웃는 카를로가 제 양손의 쌍검을 가볍게 빙빙 돌렸다. 애초에 표적을 죽이러 온 거지 아를을 죽이러 온 건 아니라 이 정도의 여흥은 임무에 전혀 영향이 없었다. 무엇보다 매혹적인 그녀를 두고 넘어오지 않는 남자는 세상에 없었다. 그게 누구든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넘어오게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카를로의 자신감이었다.

게다가 앞의 남자는 카를로 인생에서 손에 꼽힐 만큼 잘생긴 남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반쯤은 기대 섞인 눈으로 아를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곧 건조하게 미소 짓는 아를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걸 어쩌지.”

꽤나 곤란한 듯 웃는 얼굴이었지만 카를로는 그 얼굴조차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를의 검에서 밝은 금빛의 검기가 날카롭게 쏘아져나갔다. 카를로가 황급히 검을 들어 그의 검기를 막았지만 날카롭게 뻗어나간 검기는 결국 카를로의 쌍검 중 하나를 박살내고야 말았다. 이윽고 다시 주르륵 흐르는 뺨의 피를 닦아내는 카를로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곤혹스러움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이제껏 자신의 매혹적인 모습에 한눈을 파는 머저리같은 사내들은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니었다. 생사의 기로에 선 검투에도 남성들은 그녀의 몸매나 표정 그리고 매혹적인 외모에 아주 잠깐의 동요들을 담아내었고 카를로는 그럴 때마다 그 잠시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뛰어난 솜씨가 아님에도 이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에는 그녀의 외모만을 보고 흔들린 상대방의 아둔함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뭐야 이 남자……!!’

분명 꽤나 매혹적인 표정을 지었음에도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비웃음을 던지는 눈앞의 사내는 카를로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남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곧 카를로의 두 눈이 엄청난 동요로 잘게 흔들렸다.

“…아!”

줄곧 무표정한 얼굴로만 있던 아를의 금안이 곧 놀라울 만큼 부드럽게 휘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내 인생의 여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단 하나뿐이라.”

휘익---!!

순간 휘어지는 아를의 금안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혔다. 그에게 사로잡힌 카를로의 눈역시 떨려왔다. 그리고 또렷한 금안이 가까이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검기보다 또렷하고 밝은 금빛. 현혹될 것만 같은 강렬함. 찔릴 것 같은 예리함.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체모를 열기.

푸욱-!

“으윽……!!!”

곧 카를로의 입에서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방어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르기로 다가온 아를의 금안이 카를로의 지척에 있었다. ‘보토니에’의 힘으로 둘러싸인 검은 무력하게 바닥을 나 뒹글었고 제 몸만큼이나 큰 검에 꿰뚫린 몸에서는 아무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조차, 카를로의 두 눈은 아를의 밝은 금안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지척에서 나는 그의 시원한 향에 도취되어 갔다.

“…쿨럭!!”

이내 붉은 피를 왈칵 쏟아낸 카를로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그러자 그대로 검을 뽑아낸 아를의 눈이 카를로를 향해 다시 한번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내 여자 얘기를 할 때는 조심해야지.”

휘잉---.

아직도 몰아치는 격풍에 곧 카를로의 몸이 폭사하듯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남아 풍화하듯 무너지는 카를로를 바라보는 아를의 금안은 언제 웃었냐는 듯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 * *

“크흑……!”

레턴의 고운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더없이 역한 냄새가 훅- 하고 끼쳐옴과 동시에 익숙한 기운이 날카롭게 베어 들어온 순간이었다. 몬스터로 변해버린 마법사의 공격을 피한 레턴의 선홍빛 눈에 불쾌감이 옅게 어렸다.

“…하아.”

그리고 레턴이 작은 한숨을 내어쉬기 무섭게 ‘보토니에’의 힘이 몬스터로 변한 마법사의 기괴하게 뒤틀린 팔을 타고 전해져 왔다. 뜨거운 화염구가 크고 난폭한 몬스터와 같은 모습으로 레턴을 덮쳐온 것이다.

“…유르.”

자신의 언령 마법을 외침과 동시에 레턴의 주위로 단단한 실드가 씌여졌다.

콰과과광!!!!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는지 몬스터가 쏟아 부은 화염구에 실드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레턴의 얼굴에도 강력한 화기가 느껴졌다.

휘익-!

재빨리 팔을 휘둘러 신력으로 얼굴을 보호한 레턴이 훌쩍 뛰어올라 그와의 간격을 벌렸다. 그러자 곧바로 놀라울 만큼의 신체능력을 갖게 된 몬스터 마법사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레턴은 신력을 줄이지 않고 계속 간격을 벌리며 뛰어 나갔다. 몬스터로 변한 마법사가 바짝 그의 뒤를 따라 왔지만 다행히 둘 사이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뛰어 나가면서도 계속 거리를 확인하는 레턴의 얼굴에 조금의 초조함이 어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렇게 조금은 르베나 일행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에 도착했을 때,

콰과광……!!

날카롭게 쏘아진 얼음마법이 레턴의 바로 옆을 쌩하니 지나갔다. 동시에 얼음마법에 잘린 레턴의 붉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휘날렸고 그의 하얀 얼굴에도 붉은 생채기가 하나 생겼다.

곧 레턴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멀리서 아한과 스릴을 향해가는 아벨디온 기사단. 아둘과 대치중인 르베나. 더 멀리서 카를로를 밀어붙이고 있는 아를.

그들을 확인한 레턴이 순간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 거리면 괜찮겠지…….”

작게 속삭인 레턴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이제까지 본 적 없을 정도의 강한 힘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신력은 레턴의 몸 전체에서 기다렸다는 듯 헤일처럼 일기 시작했고 곧 투명해질 정도의 빛 무리는 레턴의 손에 의해 작고 둥근 구 모양으로 빠르게 응집되어 갔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레턴이 쏟아내는 신력의 양에 압도되어 버렸을 것이다.

“하… 내가 너 같은 거 때문에 개방해야 한다니.”

이 상황이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듯한 말투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개방된 힘에 레턴도 꽤나 만족스럽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신력. 그 신력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건 제약.

그건 바로 힘의 억압이었다.

레턴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신력에 대해 언제나 의구심을 품었고 그 힘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신력은 절대로 정의에서 벗어난 사사로운 감정으로 남을 해칠 수 없는 힘인데 레턴의 신력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감이 아니라 분노로도 신력을 이용해 누군가를 해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제까지 오랜 시간 알려져 온 신력에 대한 이야기들과는 정 반대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턴은 본인의 힘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고 이를 위해 강대한 힘을 언제나 억압하고 강제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고작 눈앞의 저런 조무래기 때문에 힘을 개방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어쩌겠어, 빨리 끝내고 우리 공주님 도와주러 가야하는데.”

레턴이 자조적인 어투로 미소 짓자 상대 역시도 레턴이 보여주는 힘의 크기에 위축되었는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순간 레턴의 선홍빛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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