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20화 (120/276)

120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9)

못 믿을 미소를 야살스럽게 짓는 레턴을 한번 보고는 르베나가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르베나를 감싸던 투명한 유리막이 모두 없어져 있었다.

“이건 그 믿음의 첫 증표입니다. 그리고…….”

레턴이 제 몸에서 엄청난 힘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그 힘의 수준이 르베나가 예상한 것보다도 커서 살짝 놀랄 정도였다. 예리하게 빛나는 선홍빛 눈으로 레턴이 말했다.

“완성되기 전에 날려 버려야 합니다. 혹시 보호할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레턴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괴하게 변해가는 마법사를 향해 빠르게 힘을 쏘아냈다.

아까 르베나를 향해 유리막을 형성하는 마법을 던졌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보니 그의 실력은 르베나의 상상 이상인 듯했다. 그리고 르베나 역시 그와 동시에 마법사의 왼쪽에서 싸우고 있는 아벨디온 기사단과 아한, 스릴을 향해 광범위한 실드를 쏘아 냈다.

그 순간.

콰쾅! 콰과과광캉!!

엄청난 폭발음과 힘의 충돌에 르베나의 실드에 감싸였음에도 아벨디온 기사단은 흔들거리는 몸을 겨우내 바로하며 놀란 눈으로 연기가 자욱하게 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강력한 폭발은 굉장히 광범위해 르베나의 실드에 있지 않던 몬스터들은 모두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나 뒹글고 있었고 덕분에 아벨디온이 상대해야 하는 몬스터의 수가 절반이나 줄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레턴과 르베나의 눈은 더없이 예리하고 매섭게 빛났다.

“이런, 이런. 레턴 전하의 배반이라니……! 조금은 슬프군요.”

기괴하게 비틀려가는 마법사의 앞에 긴 은발에 눈을 감은 한 남성과 헐벗었다고 생각될 정도의 모습으로 쌍검을 든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온갖 괴성을 지르며 뒤틀려가는 마법사를 보던 남성이 르베나와 레턴에게 말했다.

“‘보토니에’에 몸담고 있는 마법사 아둘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부하인 카를로입니다.

레턴 전하와 르베나 공주님을 함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앞이 보이지 않는 건지 눈을 감고 이야기하는 아둘의 모습은 사뭇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은발은 약간 색이 바래 푸석해 보였지만 편안해 보이는 얼굴은 마치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사람 같았다. 그런 이가 르베나와 레턴이 눈치챌 새도 없이 그들의 앞에 나타나 레턴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르베나는 옆에 있는 레턴에 대한 의심을 잠시 미뤄두고 온몸의 근육을 서서히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을 주시하며 옆에 있던 레턴이 르베나의 머릿속으로 말했다.

‘저 마법사와 비교도 안 되는 자들입니다. 저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저 은발은 르베나 님 만큼이나 강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레턴의 말에 르베나의 몸속에 흐르는 마력이 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자를 본 것에 대한 떨림인지 그를 상대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지 르베나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르베나는 별다른 말도 없이 몸을 긴장시키며 마력을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둘이 말했다.

“‘보토니에’ 힘의 폭주가 느껴져 와 보니 그곳에 마침 표적과 배신자가 있다니… 제가 참 복이 많군요.”

정말로 복이 많은 사람인 양 선하게 웃는 아둘에게 레턴이 말했다.

“저기 나는 ‘보토니에’ 일원이 아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배신자가 아니지. 그리고…….”

곧 레턴을 감싼 신력이 난폭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겁대가리 없이 내 백성을 건드린 네놈들을 만난 나야말로. 복이 많은 거 아니겠나?”

길게 늘여 웃는 레턴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그런 레턴과 르베나를 본 아둘도 서서히 제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곧 익숙한 듯 꺼림칙한 힘이 아둘의 주위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괴성을 지르며 기괴하게 비틀려 인간의 형상에서 완전히 멀어진 마법사가 자리했고 그의 옆으로는 쌍검을 꺼낸 카를로가 보였다.

레턴과 르베나가 곧이라도 달려들 그들을 보며 긴장할 찰나, 르베나가 말했다.

“일단 네 정체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 하지. 여기서 뒤통수 때리면 내 첫 번째 표적은 곧바로 네가 될 거다.”

르베나의 말에 레턴이 신력으로 단단히 몸을 감싸고는 말했다.

“아, 공주님. 믿음의 표식을 드렸는데 어찌……! 그리고 제가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활동했어도 마를한의 왕인 것은 여전한데 반말은 좀.”

이 상황에서도 어색하게 웃으며 던지는 레턴의 말에 르베나 역시 광폭하게 끌어올린 마력으로 온몸을 휘감고는 도약하려는 듯 몸을 약간 숙이고는 말했다.

“닥치고 가.”

그리고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쪽에서

콰과광--! 쾅,쾅!

엄청난 힘의 폭발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폭발적인 아둘의 힘은 이때까지 상대했던 어떤 ‘보토니에’의 마법사와도 달랐다. 쥬라는 이들에 비하면 감히 상대도 안 될 정도의 힘을 지녔던 것이고, 방금까지 상대했던 이름 모를 마법사역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스트… 아니면 그 이상?’

다가오는 힘의 크기를 생각하던 르베나가 빠르게 광범위한 실드를 펼쳤다. 르베나와 옆에 있던 레턴,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던 아벨디온 기사단을 전부 폭넓게 감싼 그녀의 검붉은 실드는 이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견고해 보였다.

그리고 르베나의 옆에서 광폭하게 쏘아진 레턴의 신력은 빠르고 강한 힘으로 다가오는 아둘의 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엄청난 힘의 격돌로 일대가 모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챙!

르베나가 고개를 들어 오른팔로 제 오른쪽 얼굴을 가로막았다. 아둘의 힘이 돌진해 옴과 동시에 상당히 빠르고 날렵한 인기척이 르베나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카를로라고 소개되었던 검사의 쌍검 중 하나가 예리하게 르베나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콰과광!

때마침 격돌한 레턴와 아둘의 힘에 엄청난 격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르베나는 카를로의 검을 막아내며 아벨디온 기사단 쪽의 실드에 더욱 힘을 실었다. 도움을 주러 이쪽으로 다가서는 아벨디온 기사단이 자칫하면 레턴과 아둘의 격돌에 휘말려 들어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르베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고 말았다. 카를로의 검 역시 ‘보토니에’의 힘이 흐르는지 보통의 검으로는 절대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르베나의 실드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읏!”

레턴와 아둘의 힘이 상당한지 몰아치는 격풍은 더더욱 거세어갔고 실드를 유지하는 르베나 조차 그 격풍에 버티기가 조금씩 힘겨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실드의 균형이 아벨디온 기사단 쪽으로 치우쳐져 있기에 르베나 쪽의 실드는 모든 힘을 실은 카를로의 검에 조금더 균열의 크기를 허락해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조금 위험할지도.’

상황을 살피던 르베나의 눈이 멀리서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아벨디온 기사단을 가만히 담았다. 그러고는 사력을 다해 르베나의 실드를 뚫으려는 카를로를 한번 바라보았다.

‘실드를 둘 중에 하나만 유지해야 한다면 적어도 내 쪽은 아니야!’

르베나는 과감하게 본인을 둘러싼 실드를 포기하려고 했다. 이 상태로 모든 실드를 유지해봤자 만약 카를로의 검에 의해 실드가 깨진다면 그 충격의 여파는 고스란히 실드를 공유한 아벨디온한테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베나는 아벨디온의 실드를 유지하되 본인의 실드를 깨뜨리고 그 틈에 카를로를

처리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챙!

강한 금속성의 마찰음이 사방을 찢어발기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르베나의 실드를 찢으려는 듯 끈질 지게 달라붙어 있던 카를로의 검은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르베나를 모두 가려버릴 만큼 커다란 등. 무지막지한 격풍에 잘게 흔들리는 검은 머리.

그러면서도 절대 뒤돌아 보지 않는, 하지만 잔뜩 굳어있을 게 뻔한 금안.

“…아를.”

르베나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불리자 아를이 검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해.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테니까.”

그의 말에 르베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드의 밖에서 오로지 다리의 힘만으로 이 격풍을 견뎌내는 그, 아를을.

“…네가 할 일이 뭔데.”

르베나의 물음에 슬쩍 고개를 돌린 아를의 금안이 잠시 그녀의 붉은 눈에 닿았다 떨어졌다. 멀리서 다시 검을 챙겨 다가오는 카를로를 보며 아를이 말했다.

“아벨디온의 단장인 네가 할 일은 네 한목숨 잘 간직하는 거고.”

위잉---!

곧 아를의 검에서 아를의 금안을 꼭 빼닮은 밝은 금빛의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을 옆으로 빼 들며 살짝 자세를 낮춘 아를의 목소리가 격풍 속 고요를 가장해 르베나의 귀에 부딪혀왔다.

“아벨디온의 부단장인 내가 할 일은……!”

쉬익--!

아를의 검에서 한차례 검기가 쏘아져 다가오는 카를로를 향했고 아를의 몸이 강한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를이 남긴 저음의 목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내 한목숨 걸고 너를 지키는 일이고.”

“…젠장!”

레턴의 입에서 한마디 거친 소리가 나왔지만 레턴은 힘을 줄일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강한 아둘의 힘에 꽤 강하게 쏘아진 그의 신력조차 오래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둘의 옆에는 이미 몬스터처럼 변해 이지를 상실한 마법사가 검은 침을 흘리며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레턴 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두가 위험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둘과의 접전으로 집중해 있는 그에게 몬스터로 변한 마법사가 달려들었다.

…카캉! 챙!

움찔.

놀란 레턴의 선홍빛 눈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몇 명의 기사들을 향했다.

“…으윽!

“버텨……!”

“무조건 버텨라!”

잘게 떨리는 검을 오로지 힘만으로 버티며 몬스터 마법사를 맞선 이들.

아벨디온의 기사단이었다. 그중 룬이 르베나를 보며 외쳤다.

“단장님, 저희 실드 좀 풀어 주십쇼! 그리고 이놈은 저희가 맡을 테니 마음껏 싸우십시오!”

그러자 그 옆의 다른 아벨디온 기사 마른도 소리쳤다.

“저희도 좀 마음껏 싸우게 이 실드 좀 풀어 줘요, 단장님!”

분명 지금 맞서는 것조차도 버거운 게 빤히 보이는 데도 허풍처럼 말하는 아벨디온 기사단의 목소리가 르베나에게 닿아왔다.

‘나보고는 내 한 목숨 지키라며 지들 목숨으로 또 내 목숨 지킨다는 머저리들.’

문득 르베나의 머리에서 지독히도 냉소적인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그녀의 마음에 울컥 흘러 넘치고 있었다.

흩날리는 격풍, 사방에서 몰아치는 흙먼지, 한 치 앞을 분간하기도 힘든 지금, 돌풍에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붙들고도 르베나에게 등을 보이는 남자들은 모두 이리저리 세차게 휘날리는 검붉은 망토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그녀를 향해 뒤돌지 않았다.

그들 모두의 등이 말하고 있었다.

르베나, 그녀야말로 꼭 그들이 지켜야할 그들의 세상이라고.

“후-!”

그 모습에 한번 숨을 크게 내어뱉은 르베나가 아벨디온과 레턴을 향해 소리쳤다.

“셋을 세고 실드를 푼다! 아벨디온은 모두 결투에서 물러나 전력으로 아한과 스릴을 보호해라. 우리의 목적이 그들의 안전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레턴은 저 몬스터로 변한 마법사를! 아둘은, 내가 상대한다.”

르베나의 말에 아벨디온 기사단과 레턴의 몸이 다음의 공격을 위한 더한 긴장으로 수축되었다.

셋,

둘,

하나.

쾅……!

정확히 3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을 보호하던 모든 실드가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벨디온 기사단은 단단한 땅을 박차며 아한과 스릴을 향해 달려갔고 그들을 쫓으려는 몬스터 마법사의 앞을 레턴이 막아섰다.

그리고.

“너는 얼마나 쓸 만한지 한 번 볼까?”

아둘의 앞에 선 르베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약한 미소가 꽃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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