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19화 (119/276)

11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8)

솨아아아아-----.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 마법으로 구현된 레턴의 힘은 곧바로 투명한 막을 만들며 르베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르베나는 그가 만든 투명한 유리 안에 갇힌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파지직-!

“…윽!”

르베나가 곧장 자신을 둘러싼 투명한 막을 부수려 마력을 쏘았지만 쏘아지는 마력의 힘만큼이나 강한 반발이 르베나에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이에 르베나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 모습을 본 레턴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녀를 향해 말했다.

“‘보토니에’ 힘은 찝찝해서 정말 쓰기 싫었는데 르베나 님을 잠시라도 묶어 두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서요. 괜히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언뜻 듣기에 꽤나 자상한 레턴의 말에 르베나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르베나도 놀랄 정도의 힘을 빠르게 내보낸 레턴을 방어하지 못한 것도 내심 놀랍고 짜증이 났지만, 무엇보다 지금 레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레턴을 감싸고 있던 신력은 레턴이 알약을 먹자 곧바로 르베나가 아는 힘으로 물들었다.

자칸에서 처음 보았고 이번 젠픽스에서 두 번째로 마주친 ‘보토니에’와 연관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분 나쁜 힘.

그리고 그 힘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막은 깨려고 마법을 주입할수록 기분 나쁜 힘이 르베나의 마력과 반발을 일으켜 유리 막 안의 르베나에게 고통을 줄 뿐이었다.

‘이걸 깨려면 이 유리막을 구성하는 힘보다 훨씬 큰 마력을 써야 하는데……!’

문제는 르베나가 유리막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반발이 르베나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그 반발의 여파로 근처에 있는 아벨디온 기사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아!”

르베나의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주 잠깐의 방심이 이런 답답한 상황을 만들 줄은 본인도 몰랐거니와 지금 당장 르베나가 이걸 깨려고 하는 선택이 올바른지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서 키메라들을 헤치며 아한과 스릴에게 다가서려는 아를과 아벨디온 기사단 역시 르베나가 갇혀있는 상황에 꽤나 당황한 것 같았지만 아를은 침착하게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르베나에 대한 아를의 강한 믿음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짜증을 느낀 르베나의 붉은 눈이 짜증스레 레턴을 향했다. 르베나의 눈처럼 붉은 머리에 선명하게 빛나는 선홍빛 눈. 그 눈이 르베나를 탐색하듯 살피고 있었다.

얼마 전, 자칸.

태연하게 신력을 쓰며 르베나와 바흐란을 공격하고 스릴 공주를 자처한 르베나를 가볍게 납치해 텔레포트로 이동한 남자, 아덴.

자칸의 여성들이 갇혀있던 지하 감옥에서 르베나를 보며 흥미롭다고 눈을 빛낸 사람. 자드런을 향해가는 길에 마치 르베나에게 건물의 지리를 알려 주기라도 하듯 돌고 돌아가던 이상한 사람.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드런에게서 낡은 책을 빼앗아 들고 부하 벤을 챙겨 달아난 세츠, 아덴.

그가 지금 마를한의 왕, 레턴의 모습으로 르베나의 앞에 서 있었다.

어젯밤, 만발한 장미 정원에서 엄청난 양의 신력에 둘러싸여 있던 레턴을 보는 순간, 르베나는 익숙한 신력의 느낌을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유르’라는 언령 마법까지 쓸 정도의 실력 있는 세츠.

뒤로는 ‘보토니에’라는 단체와 모종의 관계에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마를한의 왕으로 활동하는 남자, 레턴.

어떤 게 그의 진짜 모습인지. 그가 ‘보토니에’라면 방금의 일격으로 쉽게 르베나를 공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는 그녀를 이곳에 가둬 놓은 것인지.

르베나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레턴을 향했다. 그리고 르베나의 붉은 눈이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와 궁금증을 전해 들은 것일까. 순간 르베나의 머릿속에 레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와 이자의 대화가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움찔.

태어나 처음으로 머리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르베나가 놀라는 모습이 보였는지 레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길게 늘였다. 그리고 르베나를 향해 씨익 웃고는 옆의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마를한으로의 입국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묻는 레턴에게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마법사가 말했다.

“사정이 좀… 큭… 생겨서……! 어쨌거나 지금 와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아…….”

마법사가 죽기 직전 나타난 백마 탄 왕자를 보듯 레턴을 향해 반짝이는 눈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못마땅한지 눈가를 살짝 찌푸린 레턴이 말했다.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잖아. 이번 젠픽스는 내가 호스트라 참가하지 말라 했는데 내 말을 무시하고 그 사달을 만들어도 참아줬건만… 이젠 내 나라, 내 마을에 감히 겁도 없이 나타나?”

여느 때처럼 능글맞은 말투로 시작한 레턴의 말은 어느새 싸늘한 예기를 띨 만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마법사가 곧 레턴의 살기에 몸을 벌벌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보, 보토니에 내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저, 전하에게 허락을 구하면 불허하실 것 같아… 조용히 처리하려다 일이 꼬여 버려서…….”

자신을 보며 벌벌 떠는 마법사를 싸늘하게 내려다본 레턴이 그 얼굴 그대로 마법사의 얼굴을 한 손으로 치켜들었다. 얇고 가는 손이었지만 그 힘만은 강했는지 마법사는 헉, 소리와 함께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레턴의 선홍빛 눈을 강제로 마주 보게 되었다.

“명령? 무슨… 명령?”

마법사의 흐리멍텅한 눈을 보며 레턴이 묻자 마법사가 눈을 이리저리 피하며 말하기를 꺼려했다.

“아, 아시다시피 ‘보토니에’의 일원이 아니면 명령은 발설할 수가… 헙!”

‘보토니에’의 규칙에 대해 설명하던 마법사가 제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날카로운 기운에 숨을 들이켰다. 방금 삼킨 알약으로 레턴의 몸에 팽창하고 있는 사나운 기운이 마치 먹이를 찾듯 마법사의 몸으로 흘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마법사의 얼굴이 놀란 듯 일그러졌다.

“저, 전하! 살려 주십시오… 아, 안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애원이 무색하게 레턴에게서 전해진 힘은 점점 빠르게 마법사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력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점점 제 몸 안의 마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게 느껴지자 마법사가 토해내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르, 르베나 님에 대한 조치가 ‘주의’에서 ‘표적’으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근처에 있는 ‘보토니에’ 조직원들은 르베나 님을 빠르게 처리… 으윽!”

말을 하던 마법사의 몸이 갑자기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 갔고 온몸의 핏줄들이 흉하게 울룩불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턴은 개의치 않고 그에게 계속 질문했다.

“그래서 드록 왕자를 시해한 건가? 르베나 공주님을 일단 죄인으로 몰고 그다음에 처리하려고?”

레턴의 물음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마법사가 아무런 말도 안 하자 레턴이 마법사의 몸으로 들어가는 힘을 줄였다. 그러자 조금 숨통이 트인 듯 잔뜩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크… 윽… 네……. 근데… 일이… 틀어… 큭… 지고… 어설픈 꼬마들이… 붙어 버려서…….”

마법사의 말에 레턴의 눈이 멀리 누워있는 아한과 스릴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더욱 사납게 치켜들고는 물었다.

“저 애들은 ‘보토니에’의 힘으로 이동시켰나? 왜 굳이 데려온 거지?”

레턴의 물음에 르베나도 조금 긴장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통 움직임을 구속하는 유리막은 바깥의 모습과 소리도 모두 차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레턴이 구동한 유리막은 이상하게도 르베나의 움직임만 구속할 뿐 바깥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는데 아무런 제약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듣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마법사가 점점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네… 네… 크헉… ‘보토니에‘의… 힘으로… 이… 동……. 베, 베이라이기에… 머, 먹으려고… 크헉…….”

하지만 그의 대답은 완성되지 못했다. 곧 몸의 골격이 비틀어지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괴한 모습을 해나갔고 그의 몸 안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폭주하듯 부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던 레턴이 작게,

“…젠장!”

하고 속삭이고는 곧바로 르베나의 옆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그가 르베나의 옆으로 이동을 하자마자 기괴하게 뒤틀린 마법사의 몸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빛이 그 마법사의 전신에서 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막 속에 있던 르베나도, 끝없는 키메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아벨디온 기사단도 모두 놀란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르베나의 물음에 레턴이 곤란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개조에… 성공한 건가?”

레턴의 말에 르베나가 그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레턴이 본인의 눈썹 옆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말했다.

“‘보토니에’의 힘은 일정 이상을 취하게 되면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저놈에게 겁을 좀 주려고 힘을 불어 넣었는데 아무래도 개조에 성공한 마법사인 모양입니다.”

“…개조?”

“‘보토니에’는 저 힘을 견디는 육체를 갖기 위해 계속 이상한 실험을 해댔는데 그걸 개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개조에 성공하면 저 힘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근데 저놈은 완벽한 성공은 아닌지 이상한 방법으로 힘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군요.”

레턴의 설명에 르베나가 그를 보며 물었다.

“너는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분명 조금 전의 대화로 보면 그는 보토니에의 일원이 아니었다. 하지만 관련이 없다고 하기에 그의 행적은 심히 의심스러웠고 르베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레턴 역시 그런 르베나의 마음은 아는 건지 순순히 대답 했다.

“자칸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얻을 게 있어 보토니에에 잠시 협조한 것이지 저놈들과 함께 일을 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저놈들과 같이 일하려면 저 찝찝한 힘을 써야 하는데 그건 영 내키지가 않아서요.”

거짓말인지 가늠하던 르베나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하지만 르베나의 눈은 폭사하는 빛이 점점 사그라드는 마법사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너는 어느 쪽이지. 자칸에서 보토니에를 돕고 오늘 내 공격을 막아선 아덴의 모습과 내가 존대를 해야 할 마를한의 왕. 그 둘 중에서.”

르베나의 물음에 레턴이 약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확실히 전자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단지 자칸에서 일을 망친 대가로 한 번 정도는 도움을 줄까 했는데 그것마저도 저놈들이 먼저 제 영역을 어지럽혔으니 없던 일로 하려고요.”

레턴의 말에 르베나가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때 자칸에 스릴 공주님에 대한 경고를 날리고, 뻔히 알면서도 르베나 공주님을 스릴 공주님이라고 자드런에게 데려갔잖아요. 덕분에 쟤네도 타격이 좀 있었나 보더라고요. 그리고 아까는 단지 저놈들이 왜 저를 속여 가면서까지 마를한에 있나를 알아내려고 르베나 공주님의 공격을 막은 겁니다. 그리고 르베나 님의 등급도 알아야 했고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았네요. 보토니에에서 르베나 공주의 위치가 ‘표적’이 되었다는.”

“표적?”

르베나가 레턴에게 묻자 그가 서서히 온몸에 신력을 방출하면서 말했다.

“‘보토니에’에서 표적으로 설정된 목표는 반드시 죽여야만 합니다. 아마도 드록 왕자를 죽인 건 저놈이 직접 르베나 공주님을 상대할 자신이 없으니 그걸 빌미로 공주님을 불러내려다 잘못 짚은 것 같지만요.”

말을 하며 레턴의 주위로 휘감아지는 신력은 점점 뚜렷하게 색과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점점 괴성을 지르며 힘을 흡수해 가는 마법사의 모습은 이제 인간의 범주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르베나가 점점 괴물의 형상이 되어가는 마법사를 보다가는 말했다.

“내가 굳이 너를 믿어야 하나?”

르베나의 물음에 레턴이 씨익 웃으며 제 힘을 완전히 방출했다. 곧 눈처럼 하얀 신력의 빛이 그의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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