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7)
여유롭게 배를 불리고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이던 그는 계속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래서 계속 수프를 권하고 빵을 주었지만 그는 더 이상 먹지 않으면서도 계속 배가 고프다고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에게 허락을 구했다.
“제가 조금 특이한 걸 먹는데 허락해 주시면 그걸 먹고 싶습니다.”
그의 청에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은 풍족하지 않았지만 낯선 외지인이 먹고 싶다는 것에 인색할 정도로 각박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곧 마을 사람들이 그가 먹는 특이한 것이 무엇인지, 마을에 있는 것인지를 궁금해하자 그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락도 해 주셨으니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곧 그의 손이 바로 앞에 서 있는 마을의 한 장로에게로 향했다.
“…으아아악!”
가느다란 손이 노인에게 닿기가 무섭게 마을의 장로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며 급속도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미라 같은 모습으로 바싹 마른 채 죽어 버렸다.
순간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두의 사고가 정지해버렸고 마을 사람들끼리 자급자족하던 그들은 그들에게 닥친 위험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법사의 눈이 다른 사람을 향하던 순간. 마을에서는 끊이지 않는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 줘!”
“이러지 마세요! 제발 안 돼!”
한 명, 또 한 명 그의 손에 잡히는 대로 마을 사람들은 미이라같은 모습으로 죽어갔고 이윽고 마을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죽어갔을 때야 비로소 남은 마을 사람들은 급히 되는대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친 곳은 이곳. 마을 옆에 자리한 커다란 산이었다. 그들이 먹을 것을 조달하러 사냥을 하고 약초를 따는 곳으로, 그들은 지리를 알지만 외지인은 모를 만한 그런 산.
하지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고 그들은 추위에 지치고 배고픔에 지쳐갔다. 그들이 언제나 조달하던 사냥감도 약초도, 이미 끔찍한 힘 앞에 마을 사람의 절반이나 사라져 버린 그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도대체 그 혼자 남겨진 마을에 무슨 사달이 났는지 빛이 펑펑 터지고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앞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 내려 갈수도, 까마득히 높고 험한 산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산의 뒤쪽으로도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저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 그대로 산에 갇혀 버린 것이다.
“으아아앙. 엄마 무서워어— 엉엉.”
점점 커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의 한숨 소리도 깊어져 갔다. 산을 내려 마을로 내려가면 그 마법사에게 죽을 테고, 아무도 모르는 산의 뒤쪽으로 넘어가면 어떤 것에 의해 죽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아는 죽음을 선택할지, 미지의 죽음을 선택할지. 이제 그들에게 남겨진 건 어두운 선택지뿐이었다.
그때.
“자, 뚝. 뚝 하면 이걸 주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어, 어떻게……!”
분명히 아무런 인기척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처음 보는 남자는 우는 아이의 앞에서 본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장미를 들고 서 있었다.
울던 아이는 추운 날씨에 보는 꽃에 흠뻑 젖어 눈물을 그쳤지만, 아이의 엄마는 사색이 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할 뿐이었다.
“자, 가져가렴.”
레턴이 장미를 건네자 아이가 꽃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와아… 너무 예쁘다. 꽃도 예쁘고… 오빠도 예쁘다아……!”
꽃을 한번 보고 그 꽃을 준 레턴을 한번 보며 빨갛게 볼을 붉히는 아이의 미소가 천진했다.
그 모습을 본 레턴이 옆으로 길게 늘여 미소 짓자 아이는 제 몸을 잡고 있는 엄마의 떨림도 모른 채 그에게 물어왔다.
“오빠! 오빠 마법사예요? 갑자기 뿅하고 나타났잖아. 우리 마을에도 마법사님이 오셨었는데…….”
아이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마을에서 사람들을 가차 없이 해치던 그의 얼굴은 분명하게 보지 못했지만, 그는 저런 마법사였다.
키가 크고 처음 본 마을 사람들에게 호의를 잔뜩 품었던. 게다가 누구도 그들이 여기 있는 걸 알지 못하는데!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면 마을에 있는 그 마법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이의 엄마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제 품에 데려가 안았다. 그녀의 갈색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아이를 안은 손에서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공포에 떠는 엄마를 천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를 한번 바라본 그녀가 공포에 젖은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제, 제발……! 아이만은……! 아이만은… 살려 주세요…….”
덜덜 떨면서도 제 아이만은 살려달라는 여자의 눈을 레턴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의 엄마를 바라보는 레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 든 것이 명백한 선의가 아님을 아이의 엄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런 엄마가 의아한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엄마, 오빠가 우리 구해 주러 온 거예요? 우리 여기서 나가게 해 줄 거예요?”
아이의 말간 물음이 덜덜 떠는 엄마를 지나 레턴에게로 향하자 그가 다시 한번 아름답게 늘여 웃으며 말했다.
“글쎄. 살려 줄까… 말까… 고민이 되네.”
씨익 웃는 그의 선홍빛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우르릉 콰광-!
멀리서 난 굉음에 르베나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건물이 무너진 듯 뿌연 먼지가 먼 곳의 공간을 모두 뒤덮고 있었다.
그러자 눈앞의 마법사가 쿨럭 피를 토하더니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제대로… 크크……. 발동된 모양이군! 크하하하!”
그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사납게 그를 향하자 그가 비싯 웃으며 말했다.
“꼬맹이들의 혈흔으로 기척을 만들어 놓았거든요… 쿨럭……! 아마 그 안에 들어가서 키메라들과 미친 듯이 싸우다가 하아… 다시 나가려고 문을 돌리면 폭발하게… 쿨… 럭! 마법을 발동시켜놨지요 하하하! 쿨럭!”
그의 말에 르베나의 온몸에 불길한 소름이 끼쳐왔다. 멀리서 그 말을 들은 아를과 아벨디온 기사단 역시 놀란 눈으로 아직도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르는 곳을 바라보았다.
자칸의 기사들과 바흐란 왕자. 칸과 루안.
그리고…….
“…가스트!”
곧바로 르베나의 몸에서 흉포한 마력이 들썩이다가는 아직도 힘겹게 웃고 있는 그를 보자마자 엄청난 힘이 쏘아졌다.
마력은 르베나의 분노를 담은 만큼 사납게 그를 향해 달려갔고 사나운 만큼 폭발적인 마력이 다가오자 그는 방어도 채 하지 못한 채 그저 실실 웃으며 르베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이 순간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정을 하고 르베나가 마력을 날린다면 그가 사력을 다해도 막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 순간.
째애에에엥-!!
폭발하듯 휘몰아치던 르베나의 마력이 갈 때만큼이나 강하게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서늘하리만치 차가운 르베나의 말에 마법사의 앞을 가로막은 누군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작정하고 막았는데도… 휴우……! 큰일날 뻔 했네요.”
붉게 타들어간 로브 자락을 털어내는 그를 보며 르베나가 몸 안의 마력을 바짝 긴장시켰다.
“너의 정체가 결국은 이거였나, 레턴.”
루드바하만큼 새하얀 신력으로 르베나의 마력을 튕겨내고 ‘보토니에’ 마법사를 보호한 그, 레턴이 안타깝다는 듯 눈꼬리를 아래로 늘이며 말했다.
“흐음. 오해라고 말하면 믿어 줄 건가요. 르베나 공주님?”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몸에서 새하얀 신력이 점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내어 보이는 그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사납고 난폭한 어느 몬스터처럼 피어오르는 새하얀 신력이 말이다. 앞에 나타난 레턴의 존재가 놀라울 만도 하건만 르베나는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보토니에’의 일원인가? 지난번에 보니까 딱히 동료애가 있지는 않던데.”
르베나의 말에 흠칫 놀란 레턴의 선홍빛 눈이 동그래졌다.
“풋.”
그러고는 한번 작게 실소를 터뜨린 레턴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하하! 정말이지 공주님께선 언제나 제 기대를 뛰어넘는군요! 하아… 나에 대해서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말을 하는 레턴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레턴의 선홍빛 눈도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불타는 이글거림을 르베나는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곧 르베나가 레턴을 보며 평이하게 말했다.
“내가 네놈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 줘야 하나? 지금 내 앞을 막아선다면 너는 그냥 적일 뿐. 더 이상 마를한은 우리의 우호국이 아니다.”
르베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주위로 검붉은 마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힘이 더해지고 마력이 바람에 일렁이기 시작하자 레턴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아… 우리 공주님은 다 좋은데 성격이 너무 급해. 그래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드네…….”
능글맞게 말을 하면서도 예리하게 르베나의 마력을 주시하던 레턴이 곧 옆에 있던 마법사를 향해 허공에서 검지를 들어 올리자 마법사의 품에서 작은 검은색 알약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리고 레턴이 곧 허공에 뜬 알약을 향해 다시 검지를 휘두르자 알약이 레턴의 입속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아그작.
레턴이 곧장 알약을 씹어 삼키자 그의 몸에서 거대한 힘이 무섭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태연하게 웃고 있는 레턴의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레턴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힘은 금방 사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광폭해 보였다. 그리고 이제 곧 절정을 향할 것만 같은 르베나의 마력을 보고 레턴은 빠르게 마법을 구동했다.
“잠시만 양해를.”
레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베나를 향해 엄청난 힘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에 레턴과 마법사를 끝낼 생각으로 마력을 모으던 르베나가 급히 자신의 모든 마력을 방어로 돌리기도 전, 레턴의 힘은 르베나에게 닿아 버렸다.
르베나조차 놀랄 정도의 빠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