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17화 (117/276)

11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6)

가스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앞에 놓인 아한과 스릴 공주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작고 작은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떨었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이 떨려왔다.

순간 어느 날 새벽 그의 집 앞에 도달했던 아한의 부모가 떠올랐다. 절망한 부모의 마음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차갑게 잠들어 있던 아들내외의 모습.

그 모습이 떠오르자 순간 가스트의 주위로 난폭한 마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퍼어엉-!

하지만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가스트의 회색 눈이 잘게 떨려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마력은 갈무리되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아직 그의 주군이 저기에서 싸우고 있다. 언제나처럼 그 여린 몸을 가지고 아한과 스릴을 지키려고. 그리고 그와 자칸의 기사들을 지키려고.

아마도 여느 때와 같이 분명히 제 몸 따위는 상관도 없이 상대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뒤가 누가 있는지 어린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기에. 본인의 패배가 누구의 죽음과 상처로 이어지는지. 아직 어린 그녀임에도 르베나는 알고 있기에.

그런 제 주군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분이 계시는 한, 르베나 공주님이 계시는 한. 아한과 스릴은 무사하다.‘

하나의 폭발음으로 시작된 생각은 가스트의 마력을 금방 잠재웠다. 가스트는 이렇게 르베나한테 의지하는 스스로가 못내 못나 보이면서도 그런 르베나가 그의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뼈저리게 감사하고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총기가 돌아온 가스트의 회색 눈이 방문 밖을 향했다. 얼른 기사들에게 이곳을 빠져나가 르베나 쪽으로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야했다. 그러면 이곳에서의 불필요한 싸움을 줄이고 더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곧 생각을 정리한 가스트가 피에 절은 아한과 스릴 공주의 머리카락을 챙겨 품 안에 고이 넣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리고 가운데가 둥글게 뚫린 곳으로 가 목소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크게 외쳤다.

“이곳에 아한과 공주님은 안 계십니다! 함정입니다.

모두 키메라를 놔두고 밖으로 나가십시오. 제가 이곳과 키메라들을 한꺼번에 붕괴시키겠습니다!”

가스트의 말이 건물 안에 가득 울려 퍼지자 키메라들을 처리하고 있던 기사들에게서 약간의 동요가 느껴졌다. 그때 바흐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한과 스릴의 마력은 어떻게 된 겁니까?”

어느새 플라이 마법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온 가스트가 다가오는 키메라에게 마력을 불어넣어 사정없이 터뜨리며 말했다.

“혈흔… 입니다. 혈흔에 묻어 있는 소량의 마력이었습니다. 저희를 그걸로 유인한 뒤 발을 묶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서 르베나 님에게로 합류해야 합니다.”

가스트의 말에 바흐란의 얼굴에 거친 분노가 어렸다. 그리고,

차앗!

강하게 그어 내린 검에 키메라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잘려나갔다.

차아앗, 촤앗!

계속해서 거칠게 그어지는 그의 검날에 키메라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데시벨을 높여갔다. 그리고 마치 그 울음소리가 신호인 것처럼 바흐란은 점점 더 거세고 강하게 키메라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분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어린아이들의 혈흔이라니……!‘

도대체 그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지. 아한과 스릴은 보기 만해도 웃음을 자아낼 만큼 순순한 아이들이다. 르베나에 대한 마음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을 보노라면 바흐란마저 그들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생각될 정도로 아이들은 때조차 묻지 않았다.

헌데 그런 아이들이 왜 영문도 모를 이곳으로 납치되어 험한 일을 당해야 했던 건지.

게다가 스릴 공주가 두 번이나 납치될 동안 도대체 그는 무얼 하고 있었던 건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답답함이 바흐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앞의 모든 것을 도륙하고 저들의 피를 온통 뒤집어써야만 그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 가스트의 노쇠한 손이 바흐란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왔다. 순간적으로 앞을 향해 검을 베어내려던 바흐란이 가스트의 깊은 눈을 보고는 곧바로 손에 최대한의 힘을 주어 멈추었다. 그러자 바흐란의 기세에 전혀 위축되지 않은 가스트가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왕자님. 분명 아이들은… 무사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르베나 님이 싸우고 계십니다.”

그 순간 바흐란의 녹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가스트의 깊고 따뜻한 목소리가 그의 답답한 마음을 한차례 때려주었고 아이들이 무사할거라는 그의 말에 마음에는 큰 빗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칠흑같은 검은 머리칼에 일렁이는 붉은 눈으로 그의 앞을 막아서던 그녀, 르베나를 떠올리자 그를 옳아 매기 시작했던 분노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르베나가 있는 쪽에 아이들이 있다는 확신 따위는 없는데. 르베나가 싸운다고 아이들이 무사하다는 확신 따위는 없는데.

어째서 그 말을 듣자 이렇게 편안한 마음이 되는 건지.

피식.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웃음이 그의 반듯한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바흐란이 조금 차분해 진 듯 보이자 멀리서 상황을 파악하던 칸도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루안! 자칸의 기사들과 먼저 문을 뚫고 나가라. 나와 바흐란 왕자님이 따라 나가려는 키메라들을 뒤에서 막겠다. 그리고 가스트 님께서 마법을 준비하시면 우린 동시에 밖으로 나가도록 하지!”

다시 한번 상황에 맞게 일사분란한 명령을 내리는 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시해야 할 때였고, 앞의 적보다 더 큰 적을 위해 힘을 합해야 할 때였다.

루안과 기사들이 먼저 길을 뚫으면 따라가려는 키메라들을 칸과 바흐란이 묶어 놓으며 문 쪽으로 다가간다. 문 앞에 가스트와 칸, 바흐란이 모두 모였을 때 가스트의 마법으로 그들에게 실드를 씌우고 건물을 무너뜨리면 건물 안의 키메라는 모두 그 밑에 깔릴 것이다.

현재로써는 전투력을 아끼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방금 칸이 전한 이 작전이었다.

곧 루안과 기사들이 키메라들을 상대하며 점점 문 쪽을 향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뭔가를 눈치챈 듯 키메라들이 성난 굉음을 질러대며 따라붙었지만, 그때마다 칸과 바흐란이 적절하게 나타나 주는 덕에 그들은 무사히 문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윽고 가스트와 바흐란, 칸까지 어느 정도 문 근처로 왔다고 생각했을 때 자칸의 기사 중 하나가 들어왔던 건물의 출입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삐리리리리릭-!

문의 손잡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남과 동시에 뜨겁고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악!”

놀란 자칸의 기사가 얼른 손잡이에서 손을 뗐지만 퍼져 나온 빛줄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빛은 서서히 퍼져 나가 곧 모두가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그러고도 기세를 멈추지 않으며 곧 문을 타고 벽을 타며 건물 전체를 감싸듯 퍼져 나갔다.

빛이 점유하는 면적이 커짐에 따라 동시에 그 밝기도 밝아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윽고 건물 전체를 뒤덮은 빛은 서서히 어떠한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윽… 이게 뭐야!”

바흐란 역시도 눈부신 광채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소리쳤다. 그리고 대답은 바흐란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마법… 마법입니다.”

가스트의 목소리에 바흐란이 채 뜨지도 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스트와 칸의 입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폭발 마법입니다. 모두 몸을 낮추십시오!”

“폭발이다! 모두 엎드려!”

퍼엉--!

그들의 고함 소리와 동시에 빛은 산발하듯 더 크게 퍼져나갔다. 곧 엄청난 굉음이 땅을 울리기 시작했고 크게 퍼져나간 빛이 일대를 장악하듯 번뜩였다.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사방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르르! 콰… 쾅!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뿌연 안개가 공간을 뒤덮었고 찬란하게 빛나던 빛은 폭사한 듯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자칸의 기사들과 가스트, 칸과 루안이 있던 삼 층짜리 건물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건물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만한 커다란 웅덩이가 땅 밑으로 깊게 파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이상 일행 중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 * *

쾅-! 콰과쾅-!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멀리서 번쩍 번쩍 빛이 나며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나자 산 속에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추운 산 속에서 옷조차 얇게 입은 그들은 원래부터 산에 들어올 계획은 아니었는지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와 빛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쾅-! 쿠르릉-!

이윽고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에 곧 한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요! 배, 배도 고프고 춥고… 흑흑… 무서워 으앙!”

아이의 울음소리에 급히 엄마가 달려와 아이를 안아 달래기는 했지만 아이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주위에 몰려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아이를 다독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른이라 울지 못하는 것일 뿐 그들 모두 아이처럼 울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두 식사 준비를 하고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평범한 어느 날 저녁. 마을에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한 여행객이 들어섰다. 외지인이 없는 동네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그를 경계했지만 마법사라는 말에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곧 그를 대접하고 반겨 주었다.

마법의 영향력이 강한 마를한에서 마법사의 존재는 언제나 환영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몰랐다. 그게 그들의 운명과 생명, 그리고 마을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사건이 되어 돌아올 줄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