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5)
파삭-!
“…오오오욱!”
파샤삭-!
“끄아아악!”
한 번씩 그어지는 검 날의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키메라의 울음소리가 차가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서인지 키메라들은 흉포하게 날뛰지는 않았지만 짐승의 본능 때문인지 고통이 가해지자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곧 공간은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가구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가운데가 뻥 뚫린 건물답게 공간엔 키메라들의 울음소리와 비릿하고 역한 냄새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검사들의 은빛 검 날 들로 가득 채워져 갔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 남자의 활약상에 기사들은 어느새 익숙해진 키메라들을 베어내며 흘끗흘끗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들보다 훨씬 밝은 광채를 드러내는 그의 검은 닿기가 무섭게 키메라들의 살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그의 검이 가까이에만 가도 키메라들은 두려운 듯 떨어 댔다.
그럼에도 그를 공격하려는 키메라는 망설임 없는 칼날에 베여 단숨에 목숨을 잃어버렸다.
더없이 가벼운 몸놀림은 자칸의 기사들마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고 키메라를 향한 자비 없는 검 날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서늘하게 베어냈다.
“도대체. 저 사람이 왜 비전투 인력이었던 거지?”
눈앞에 다가온 키메라를 베어내고 피하며 바흐란이 소리 높여 물었다. 바흐란의 옆에서 키메라를 처리하는데 집중하는 루안을 향한 물음이었다. 그러자 멀리서 키메라들을 신나게 도륙하는 칸을 슬쩍 본 루안이 작은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한번 피를 보면 자제를 못 하시는 분이라. 하아…….”
루안의 답변이 꽤나 의외라서 바흐란의 녹안이 잠시 칸을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또다시 다가온 눈앞의 키메라를 그어내며 바흐란이 말했다.
“근데 저 정도면… 병 아니냐?”
하지만 루안은 바흐란의 말에 차마 답할 수 없었다. 몰려드는 키메라가 워낙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딱히 그의 말에 반박할만한 변명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
멀리서 잔뜩 신이 난 듯 키메라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해나가는 칸의 모습을 본 루안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소리가 새어 나갔다.
가스트는 어느 정도 일행이 키메라와의 전투에 익숙해지자 곧바로 아한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플라이 마법을 통해 삼 층으로 곧장 올라가려는 그에게 많은 키메라들이 달라붙으려 했지만 그때마자 자칸의 기사들과 칸, 루안과 바흐란은 하나의 틈도 없이 키메라들을 처리해 그의 길목을 확보해 주었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기사들과 키메라들의 치열한 싸움을 바라보며 드디어 꼭대기인 삼층에 도달했다. 어느새 묻었는지 로브 자락에서 나는 역한 냄새로부터 애써 코를 돌리며 가스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워낙에 층 전체의 가운데가 둥글게 계단으로 뚫려 있어 이 건물에 방이 있나 싶었는데 삼 층의 양 끝에는 하나씩 방문이 보였다. 그래서 가스트는 지체없이 아한의 마력이 느껴지는 오른쪽 방으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어 젖혔다.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있는 작은 방. 그 방으로 들어서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익숙한 기운이 그를 반겼다. 상냥하지만 들쑥날쑥한 아한, 그의 사랑스러운 손자의 마력이 말이다.
하지만 곧 희망에 들떴던 가스트의 회색 눈은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작은 두 개의 침대는 허망하게도 텅텅 비어 있었지만 가스트의 눈을 고통으로 물들인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바닥 군데군데 떨어져있는 검붉은 핏자국들. 거칠게 몸싸움을 한 듯 여기저기 깨져있는 유리조각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치 그를 조롱하듯 놓여있는 피에 잔뜩 젖은 아한과 스릴 공주의 머리칼.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마력이, 그들의 혈흔이었을 줄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마력이,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의 고통이었을 줄은.
덜덜 떨려오는 손에 힘을 주어 겨우 다잡은 가스트의 분노어린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어느 공간을 향했다. 그리고 곧 그의 회색 눈에 폭발적인 검붉은 마력에 뒤덮여가고 있는 공간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르베나의 마력이 거칠게 그를 향해 질주해갔다. 그녀의 마력이 닿은 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후 불면 꺼지는 불꽃처럼 시들어갔다.
“…꾸에엑!”
“끄에에!!”
“까아아악!”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마력의 길에 살아남은 키메라들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렇게 까맣게 재가 되어 타버린 몬스터들의 시체를 밟고도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을 얻은 듯 폭발적으로 질주한 마력은,
쾅! 콰과과광쾅!
마법사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 제 모든 분노를 쏟아내듯 폭발하기 시작했다. 온 천지를 울릴 듯 엄청난 굉음이 공간을 가득 메웠고 그 소리에 마법사의 뒤에 있던 덕에 살아남은 모든 몬스터들이 괴로워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곧 그곳에서 울컥 피를 토하며 쓰러진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쿨럭. 대단… 쿠욱… 하시군요.”
실드를 치긴했어도 르베나의 마법으로 큰 내상을 입었는지 입 안 가득 흥건한 피를 흘리는 그를 보며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완벽한 소멸을 예상했건만 아직도 형체를 갖고 르베나의 눈앞에 선 그가 상당히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아한과 스릴에게 피해가 갈까 마력을 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꽤 실력이 있는 마법사인 듯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르베나의 마력이 생각보다 강했는지 놀라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쥬라 녀석이… 쿨럭. 왜 까불다가 당했는지 알겠군요. 크크…….”
그가 쥬라의 이름을 언급하자 르베나가 그를 가만히 노려 보다가는 말했다.
“‘보토니에’라고 한다던가? 너희 단체. 이상한 힘을 취급하는 것치고… 나쁘지 않군.”
하지만 언제나 르베나의 말에 태연하던 그가 크게 움찔 놀라며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 저렇게 놀란 건지 모를 르베나가 시큰둥하게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저희 단체의 이름을 누가… 알려 주었습니까?”
좀 전까지와는 다르게 스산하게 낮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시선이 르베나를 꿰뚫듯 찔러왔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런 그를 무표정하게 한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내가 너한테 그런 것까지 알려 주어야 하나?”
콰쾅……!
곧바로 이어 쏘아진 르베나의 마력에 그가 다시 검붉은 연기 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뒤에 포진해있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눈에 불을 밝히며 아벨디온 기사단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각인된 주인의 위험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마법사는 단장이 맡을 거다. 그 전에 우리는 아한과 스릴 공주의 신변확보를 최우선으로 모든 몬스터들을 도륙한다!”
크고 강한 아를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동시에 아한과 스릴 공주의 위치를 확인한 아벨디온 기사단은 모두 본인의 몸에서 최대한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웅- 우웅— 우웅웅--!
서서히 검에 마력이나 신력이 돌기 시작하자 무거운 공기와 공명하는 소리들이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매우 무거웠지만 맑았고 여러 개의 소리 같았지만 하나같이 들려왔다.
곧 검붉은 마력으로 둘러싸여 공중으로 떠오른 르베나가 보였다. 허공에서 검붉은 연기에 휩싸인 마법사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이 더없이 검붉게 일렁거렸고 새카만 머리는 환하게 떠오른 태양 아래 존재하면 안되는 어둠처럼 빛났다.
그 주위를 각자의 검기로 물들인 검을 들고 있는 다섯 명의 아벨디온 기사단. 그들의 첫 전투가 이곳 마를한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 *
“마을이… 전부 밀렸다고?”
눈앞의 장미를 바라보는 무심한 말투에 베느젤의 시선이 따라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 같은 침착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예. 그런데 르베나 님 일행이 도착했을 때부터 마을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세상 귀하고 여린 누군가를 어루만지듯 장미의 꽃잎 하나를 뜯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던 레턴이 그 말에 멈칫하다가는 다시 제 손바닥 위 장미 잎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 먹어 치운건가?”
레턴의 물음에 베느젤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일부는 그렇고 나머지는 숨은 듯 합니다.”
이에 레턴이 작게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괘씸한 놈들이네? 그래서 나머지는… 어디에 숨어 있지?”
“마을 어귀 산 속에 숨어있는데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슬슬 먹을 것이 떨어졌을 겁니다.”
베느젤의 말에도 레턴은 한동안 장미의 여린 꽃잎을 매만졌다. 보드랍게 쓰다듬어 제 코에 대어 향기를 맡아보다가 마치 태어나 처음 장미 꽃잎을 본 사람인 양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레턴은 거기에 꽤 오래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 레턴의 모습을 바라보던 베느젤이 결국 침묵을 못 이기고 입을 뗄 찰나, 손안의 꽃잎을 바람에 후- 흘려보낸 레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우리 불쌍한 백성들부터 구하러 가 볼까?”
꽃잎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는 레턴의 선홍빛 눈이 다정하게 웃는다. 하지만 그 눈빛 안에 담긴 빛은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제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당장에라도 베어 버릴 듯한 선연함.
그것을 담은 미소가 그의 선홍빛 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