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3)
“진형대로!”
순식간에 가해진 공격과 그 공격의 힘에 압도된 기사들이 넋을 빼고 있자 르베나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멀리에서부터 두 번째 공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뜨거운 화염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르베나는 다시 한번 폭발적인 힘을 끌어올려 빠르게 일행을 향해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가스트에게 작게 눈짓하자 가스트 역시 처음의 당황을 곧장 지워 내고는 곧바로 본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악--!
가스트의 주위로 회색의 마력이 빠르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마력이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자 가스트에게서 엄청난 힘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하늘에서 쏟아지던 불구덩이를 본 순간, 그 힘이 느껴지는 곳으로 역공을 한 것이다. 가스트의 회색빛을 닮은 커다란 번개들이 쾅, 콰광!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서서히 페이스를 찾은 기사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대형에 맞춰 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칸과 디오니스의 정예 기사들이었기에 그나마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온몸에 회색의 마력을 두른 가스트의 바로 뒤로 칸과 바흐란 왕자가 위치하고, 그 주위를 자칸의 기사들과 루안이 둘러쌌다.
그리고 검붉은 마력으로 모두를 보호하고 있는 르베나의 곁으로는
전투 태세를 갖춘 아를과 아벨디온이 날카로운 검에 살며시 검기를 흘리며 자리했다.
기사들이 모두 진형을 맞춘 듯 보이자 르베나가 모두에게 소리쳤다.
“이대로는 계속 공격할 빌미를 줄 뿐이다. 양쪽으로 갈라져 이동한다! 만나는 지점은 아한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 우리가 오른쪽, 가스트가 왼쪽으로 간다!”
르베나의 명령에 가스트는 잠시 움찔했지만 곧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계속 뭉쳐 있어봐야 상대에게 편하게 공격할 빌미를 줄 뿐이고 무엇보다 이 상황 속 아한과 스릴 공주를 찾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스트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자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아무 문제도 없다고, 걱정 말라고 등을 미는 르베나의 눈빛이 이제는 익숙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눈길을 애써 떼어내며 가스트가 회색의 마력으로 일행을 감싸는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물리적 공격과 마법을 모두 방어하는 보호막이니 안심하고 달리십시오. 공주님께서 신호를 주시면 바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겠습니다!”
가스트의 말에 자칸의 기사들은 꿀꺽 침을 삼켰고 칸과 루안은 무언의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바흐란은 르베나를 한번 보다가는 고개를 돌려 아를을 보며 말했다.
“금방 올 테니까 너네 단장 잘 지켜라!”
바흐란의 말에 아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쪽 몸이나 잘 지키고 나서 얘기하지.”
자칸에서부터 투닥 거리던 아를과 바흐란은 어느새 이 정도 이야기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계까지는 발전한 듯했다.
그렇게 모두가 준비된 듯 보이자 르베나가 가스트와 눈을 맞추었다. 동시에 르베나가 적이 있는 곳을 향해 검붉은 마력을 날카롭게 쏘아냈다. 하늘을 향해 뻗어간 마력은 곧 새하얀 얼음 창으로 변해 적진으로 향했고 그것을 신호로 일행은 양 쪽으로 순식간에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아한과 스릴 공주의 구출.
그리고 그곳으로 단 한 사람의 사망자 없이 도착하는 것만이 지금 그들이 이루어내야 할 첫 번째 목표였다.
* * *
“…르베나!”
앞을 향해 달리던 아를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르베나가 곧바로 멈춰서며 실드를 펼쳤다. 실드가 생기자마자 곧바로 부딪혀온 엄청난 힘의 마법들이 강한 진동과 함께 옅은 잔상으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이대로 오른쪽으로 계속 갈 거야?”
잔뜩 몸을 숙인 아를이 묻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한이 있는 곳에는 가스트와 바흐란이 가면 된다. 하지만 적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들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어. 그래서 우린 저들을 먼저 처리한다!”
르베나의 말에 아를과 아벨디온 기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야 상관없지만 조금은 몸을 사렸으면 좋겠는 르베나가 가장 위험한 곳에 나서는 이 상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칸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더해진 가스트 일행보다는 르베나 일행의 전투력이 더 높았기에 이건 이성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게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마법공격일 뿐이라서 상대측에는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 그렇기에 강한 베이라인 르베나의 힘이 적진에 가서는 꼭 필요한 힘이었다. 그렇게 르베나와 아벨디온은 적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향해 힘껏 달렸다.
중간 중간 공격이 쏘아지면 아를의 신호로 모두가 멈춰서고 르베나가 일행을 보호했으며 그들의 위치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역공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가스트 일행이 아한과 스릴을 빨리 찾기만을 바라며 르베나는 발에 더욱 힘을 주어 내달렸다.
‘아한과 스릴은 무사할거고 가스트 일행은 아이들을 잘 구해낼 거다!’
스스로에게 주문 같은 믿음을 되새기며 르베나는 몸 구석구석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잠깐의 방심도 안 된다. 잠깐의 여유도 안 된다.
지금, 르베나와 아벨디온 기사단이 적들을 완전히 처리하는 것만이 가스트 일행과 아한,스릴을 무사히 구출하는데 필요한 기반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이 발걸음에는, 이 터질 것 같은 심장소리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존재하면 안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내달린 르베나와 일행은 어느새 적진으로 꽤 많이 근접해 있었다. 그사이 간간이 쏟아져 내리던 마법은 적들이 있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빈도와 강도가 점점 약해졌고 이윽고 르베나의 앞에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을 발견한 기쁨도 잠시.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 아벨디온 기사단과 아를 그리고 르베나의 눈은 하염없는 충격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루안이 칸에게 묻자 칸의 시선이 저 멀리서 여전히 쏟아져 내리는 마법 공격을 향했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르베나 님 이라면… 괜찮을 거다. 그리고 그 분에게는 분명 또 다른 기회가 될 거야.”
알 수 없는 칸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루안은 다소 안심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내딛는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순간, 날카롭게 느껴지는 살기에 루안이 검을 오른쪽으로 치켜들자 가스트의 보호막과 루안의 검에 가로막힌 날붙이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객이다! 모두 가스트 님을 보호하며 대비해!”
루안이 소리치며 칸을 가스트 쪽으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바흐란과 자칸의 기사들은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곧 들이닥칠 자객들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바흐란이 가스트에게 말했다.
“가스트 님, 마법공격에 대한 방어막만 해주시면 물리적 공격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저것들을 달고 계속 달릴 수도 없으니까요.”
바흐란의 청에 가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리적 공격을 차단하는 실드를 거둬냈다. 바흐란의 말대로 이대로 모든 공격을 막은 채 달리기만 하는 것은 결코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쉬익-! 쉭--!
가스트가 실드를 걷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십 명의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 적의 초토화 마법공격에도 자객들은 무사했는지, 곳곳에 몸을 숨기던 이들의 수가 제법 많아지자 일행 모두 검을 바로 잡으며 가만히 숨을 골랐다.
피슉-!
곧 던져진 어느 자객의 독침을 신호로 이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루안은 가스트와 칸의 곁에서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자객들만을 처리하였다.
바흐란과 자칸의 기사들은 사막의 자칼들답게 거침없이 자객들 속으로 달려들어 하나하나 그들을 도륙해내기 시작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던 그들은 마치 그런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듯 빠르게 자객들을 정리해나갔다. 그들의 검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국의 공주를 납치한 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무엇보다 왜 르베나가 그들을 왼편으로 보냈는지 그 의도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더욱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베고 휘둘렀다.
그들이 안심하고 아한과 스릴을 구할 수 있도록 르베나 일행은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들이 향하는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오로지 그들에게 아한과 스릴을 맡기고 말이다. 심지어 그 믿음에는 어떠한 낯간지러운 말도, 행동도 없었다.
오로지 붉은 눈빛으로 전해진 말이 전부였다.
‘반드시 아한과 스릴을 구출해라.’
그런 르베나에게 자칸의 기사들은 다시 한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동시에 르베나와 아벨디온 기사단의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리라는 의지가 샘솟았다.
“다시 뛰어! 쉬지마!”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의 사이로 적들의 피와 시체 그리고 잠깐의 적막이 다시 찾아왔을 때, 일행은 다시 심장이 터지도록 뛰어 나갔다.
저 멀리서 치열한 마법의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로 인한 폭발음이 커질 때마다. 아한과 스릴 공주의 구출을 위해 위험을 자처한 르베나 일행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아벨디온이 싸우고 있다, 멈추지 마!”
“아한님과 스릴님을 구해 아벨디온을 도우러 가자! 조금 더 힘을 내!”
중간에도 자객들은 여러 번 가스트 일행을 덮쳐왔지만 그들은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 빠르게 적들을 제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힘이 들고 수많은 자객의 수에 압도당할 때도 그들은 멀리서 싸우고 있는 아벨디온을 상기하며 서로에게 힘을 내라 외쳐댔다.
그리고 제법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 갖은 상처가 늘어날 즈음, 다행히도 가스트 일행은 겨우 빠르게 내달리던 그들의 다리를 멈출 수 있었다.
“하악… 하악.”
“하아… 하아… 하…….”
마을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집 한 채. 삼층 정도 되어 보이는 눈앞의 저택은 그들의 터질 듯한 심장과는 다르게 고요했고 조용했다.
마치 이 모든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서 있는 모습이 잔뜩 피에 젖어 심장이 터질 듯 뛰어온 그들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곧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던 바흐란이 긴장한 얼굴로 가스트를 바라보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가스트가 희미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안에서 아한과 공주님의 마력이 미세하게나마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말을 신호로 일행은 빠른 속도로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수많은 자객들을 처리하고 그들 대신 위험을 자처한 르베나 일행을 생각하며 심장과 허벅지가 터지도록 뛰어왔다. 이곳에서 공포에 떨고 있을 아한과 스릴 공주만을 생각하며 그들의 몸에 아로새겨진 상처 따위는 돌보지도 않고 뛰어왔다.
하지만. 건물 안에 빠르게 진입한 일행 모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기괴한 모습으로 사지가 뒤틀린 모습과 악취 가득한 침을 흘리는 모습. 어둠 속 노란 눈을 빛내며 가스트와 자칸의 기사들을 환영하고 있던 건 아한과 스릴 공주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수백 마리의 키메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