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2)
흠칫.
문득 온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작은 아한의 몸이 떨려왔다. 그러고는 옅은 눈꺼풀이 한차례 경련하듯 떨리더니 약간의 두려움이 벤 회색 눈이 조심스레 떠졌다.
평범해 보이는 한 가정집.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방과 침대.
아한이 곧바로 놀란 듯 시선을 돌리자 옆 침대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스릴 공주의 모습이 보였다.
“…휴.”
약간의 안심이 뒤섞인 아한의 눈이 스릴 공주의 몸을 재빨리 살폈다. 스릴 공주는 다행히 어딘가 다치거나 한 곳 없이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빠르게 찾아오는 안도감만큼이나 불안함이 뒤섞인 초조함이 아한을 잠식해왔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계속 잠들어있었다고 생각하니 한 시도 이곳에 더 있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부스럭.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움직이는 아한의 소리가 부쩍이나 크게 들려올 만큼 공간은 조용했다. 그리고 아한이 제 몸을 일으킨 순간, 날카롭게 느껴지는 짜릿한 두통에 아한의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
두통을 떨쳐내려는 듯 머리를 잘게 흔들던 아한이 놀란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아한과 스릴은 그에게 납치당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사지를 구속한 마법구속구가 그것을 여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 * *
드록 왕자 살해 용의자의 공식 심문이 있었던 날. 용의자였던 게르가 모든 것을 실토하며 심문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인 가스트와 아를, 그리고 다한은 게르를 압송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날의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르베나를 곤경에 빠뜨리려던 그들의 작전이 모두 앞에서 들통 났고 그 꼬리를 잡았으니 이제 몸통을 잡아내는 일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아한은 그 모든 상황이 흡족했고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만약 아한의 능력이 조금만 덜 특출 났다면 말이다. 아한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점점 질서가 흐트러지는 틈에 우연히 한 남성을 눈에 담게 되었다.
‘이상해. 저 사람의 마력이… 너무 독특한데? 저건 너무 기분 나쁘고 너무 불쾌해.’
유독 사람들의 마력이나 신력을 기민하게 읽는 아한의 눈에 남들과는 다른 성질을 몸에 품은 남성이 보였던 것이다. 난폭하게 날뛰는 듯 하지만 억압된 듯 몸을 웅크리는 형상.
마력과 신력이 뒤섞인 듯 보이지만 결코 마력도 신력도 아닌 힘.
그리고 순간 아한의 눈이 스스로도 모르는 새 게르와 가까워지는 제노스 왕에게로 향했다.
움찔.
‘거의 같아……!’
제노스 왕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게르란 자의 몸 속에 흐르는 힘과 저 남성의 힘이 무섭도록 닮아 있었던 것이다.
단지 저 남성의 힘은 게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난폭할 뿐이었다.
아한의 눈이 계속 그 남성을 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성의 힘이 잠시 어떠한 형상을 그리는 듯 보이는 그 순간!
펑. 퍼엉!
“…꺄아악!”
“살려줘요!”
“모두 전하를 엄호하라!”
제노스의 앞에 있던 게르의 몸이 산산 조각나며 공간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남성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아한은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나섰다. 왜인지 절대로 그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아한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한은 그런 저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스릴 공주가 그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야 알아버렸다.
아한은 자기를 부르며 따라오는 스릴 공주의 목소리도, 주위의 소란도,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다만 르베나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던 게르란 자와 같은 힘을 가진 저 남성을 반드시 르베나의 앞에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만을 끊임없이 상기했다.
하지만 따라붙을수록 남성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아한은 르베나에게 배운 대로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그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이상하다 여겼는지 스릴 공주 역시 어설프게나마 기척을 숨기며 따라오는 게 뒤늦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한은 스릴 공주에게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엇?”
그런데 순간 남성의 모습이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놀란 아한이 재빨리 앞으로 향했지만 어느새 도달한 곳은 켄느 왕국의 기사들이 머물던 궁. 그리고 그 앞에는 텅 빈 연무장만이 먼 곳의 소란을 배경삼아 덩그라니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작은 꼬리가 두 개나 붙었네?”
갑작스럽게 머리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아한이 놀라 뒤를 돌아본 것과 동시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한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분명 켄느 왕국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어… 어째서?”
낯선 방에서 눈을 뜬 아한이 그날 기절하기 전 보았던 남성에 대해 잠시 떠올렸다. 이미 켄느 왕국의 모든 이들은 젠픽스를 떠났는데 어째서 켄느의 기사가 남아있던 건지. 게다가 그는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다들… 걱정… 하겠구나…….”
납치된 본인과 스릴 공주를 걱정할 사람들을 떠올리자 아한의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경솔했다. 아주 많이. 성급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하지만.
“몬스터 소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르베나 누나가 그랬어.”
언젠가 르베나가 했던 이야기를 용기 삼으며 아한이 손에 채워진 마법 구속구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절대로 르베나에게 짐이 되지 않으리라. 르베나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아한의 회색 눈이 야무지게 빛났다.
“이곳도 비어 있습니다!”
탁.
마을의 한 가정집에서 나온 자칸 기사의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같은 말이 들려왔다.
“…이곳도 비어 있습니다.”
“여기도 입니다!”
“이곳도요!”
텅 빈 마을에 이상함을 느낀 자칸과 아벨디온 기사들이 근처의 집들을 하나하나 들어가 보았으나 마을의 집은 모두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이 모든 게 마치 배경에서 사람만 쏘옥 빼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합니다. 밥을 먹던 흔적도 있고 심지어 어떤 집에는 불도 켜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만 보이지 않다니…….”
수색을 하던 룬의 말에 아를과 르베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바흐란이 칸에게 물었다.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게 없습니까, 칸 님?”
하지만 질문을 받은 칸 역시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다 해봤자 스무 가구가 채 넘지 않은 작은 마을입니다. 자급자족을 해서 살 정도로 다른 곳과의 교류도 없습니다. 저도 단지 ‘보토니에’ 마법사 중 하나가 이곳에 흘러들어왔다는 첩보를 받고 알린 것뿐인데 이것 참…….”
마을을 둘러보는 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순간, 칸이 놀란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모두 몸을 낮추세요!”
그와 동시에 먼 곳에서 엄청난 힘의 마법이 폭발하듯 모두에게 쏘아져 내렸다. 마치 폭우와 같을 정도로 한곳에서 집약적으로 쏟아지는 마법의 힘은 이 마을 전체를 박살내고도 남을 정도의 힘을 싣고 있었다.
“…피해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왕자님을 보호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마법을 보며 기사들은 혼란에 휩싸여 소리쳤다. 하지만 빛은 눈 깜짝할 새 그들에게 당도했다.
“…젠장! 늦었……!”
이미 늦었다고 소리치며 공포에 물든 한 자칸 기사의 말이 들린 것과 동시였다. 곧 그들의 주위로 광폭하리만치 거센 힘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콰르릉……!
펑! 펑펑펑!
어디선가 솟아난 검붉은 힘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대지의 모든 생명을 제 품 안에 품었다. 산발적으로 위치한 모든 인원을 둘러쌀 정도의 광범위함. 매섭게 쏟아지는 모든 마법을 견고하게 튕겨낼 정도의 단단함. 그리고 무엇보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겠다는 강인한 힘의 존재.
“…르베나 님!”
전율이 일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매료된 듯 가스트의 목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르베나의 힘에 보호받은 모든 사람 역시 좀 전까지 위협받던 상황 따위는 깡그리 잊은 채 그들의 앞에 서서 엄청난 힘을 쏟아내는 르베나를 보며 소름이 인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두 전투 대형으로.”
그러나 곧 이어지는 르베나의 한마디에 모두 잠에서 깨어난 듯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르베나의 힘에 보호받지 않은 모든 것. 아니, 방금까지 그들이 확인했던 이 마을의 모든 것들이.
형체 하나 남기지 않은 가루가 되어 검게 변한 땅을 가득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