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12화 (112/276)

11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1)

“근데 이걸 어쩌죠, 르베나 공주님. 하아… 이때까지 제가 세츠인 걸 아는 사람들은… 살아서 제가 등을 돌린 적이 없는데…….”

레턴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자신을 향하자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르베나가 느리게 뒤돌아섰다. 감정의 편린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선홍색 눈동자가 가만히 자신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한동안 바라보던 르베나가 갑자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쩌지. 나 역시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살려두는 자비 따위는 없는데.”

살짝 미소를 띈 르베나의 모습에 레턴의 눈이 또다시 자잘하게 떨려왔다.

바람에 따라 나부끼는 머릿결은 이 밤의 어둠보다 짙었다. 오로지 레턴만을 향하는 붉은 눈동자는 주변의 장미보다 붉었고 끝이 약간 위로 올라간 붉은 입술에서는 장미향이 날 것만 같았다.

가득 쌓인 눈의 순결함과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짙고 유혹적인 장미의 향

꿀꺽.

레턴이 본인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는 그런 본인의 행동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여전히 살짝 웃는 얼굴로 레턴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몸에서는 곧 폭풍 같은 마력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솨아-! 솨아아--!

이 순간 불어오는 바람이 더 강해졌다고 느껴지는 건. 그녀의 주위로 일렁이는 검붉은 마력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살짝 웃는 그녀의 미소가 황홀하다고 느껴지는 건. 동시에 갑작스럽게 멀어지는 장미향에 이토록 갈증이 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르베나의 마력이 한 곳으로 응집되어 가고 레턴의 시선에 곧 발현될 그녀의 마법이 보임에도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도사린 검붉은 마력이, 또 르베나가,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그의 온몸을 칭칭 감싸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것만 같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고요가 레턴을 덮친 것만 같았다.

르베나의 눈이 깜빡이는 그 작은 행동. 그녀의 곁에 몰아치는 검붉은 마력.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가는 마법의 발현.

그 모든 모습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레턴의 눈 속에 천천히 각인되어 갔다.

부시럭.

순간의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르베나였다.

“…르베나?”

르베나를 보고 다정한 빛이 어려 있던 금안이 르베나의 주위를 들썩이는 마력을 보고는 싸늘하게 굳어지는 건 순간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그, 아를이 본인의 검을 빼어들고는 순식간에 르베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린 금안이 눈앞의 남자, 레턴을 향했다. 동시에 아를의 크고 건장한 몸이 르베나를 가리자 레턴의 눈이 마땅치 않은 듯 느리게 그를 향했다.

“…하아.”

겨우 터져 나온 얕은 숨이 레턴을 좀 전보다 더한 갈증으로 몰아가자 약간의 짜증이 느껴졌다.

“디오니스의 기사는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군. 감히 나를 향해 검을 드는 건가?”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레턴이 차갑게 묻자 아를이 비웃듯 답했다.

“그게 누구든 르베나를 위협하는 자는 나에게 적이다.”

“르베나… 라…….”

작게 아를을 따라 르베나의 이름을 읊조린 레턴의 주위로 신력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가 제법 사납게 읊조렸다.

“감히 기사단의 일개 단원이 단장이자 자국의 공주인 분을 이름으로 불러?”

레턴의 말에 아를의 금안에 불쾌한 빛이 어렸다. 그리고 검에 서서히 마력을 흘려 보내는 아를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다른 나라 왕께서 관여할 일은 아닌데.”

파시식-!

아를의 말과 동시에 레턴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단지 르베나를 르베나라 부르는 아를의 말에 레턴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각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내 앞을 막아선 이 건방진 기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저 기사로 인해 가려진,, 그녀 때문일까.’

레턴의 선홍빛 눈에 점점 알 수 없는 광폭함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전하!”

하지만 다급하게 나타난 그의 부관, 베느젤의 음성에 레턴의 몸에 들끓던 신력은 순간 자취를 감추고 증발해버렸다. 그리고 질책하는 듯한 레턴의 차가운 눈빛을 받은 그녀가 잠시 움찔하고는 말했다.

“…전하. 칸 님의 전보가 왔습니다.”

순간 베느젤의 말은 칸의 전보를 알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르베나의 앞에서 신력을 내보인 주인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레턴은 베느젤의 말에 그가 그녀에게 괜한 걱정을 끼쳤음을 깨달았다. 그리고나니 제가 여기에서 애송이 기사를 상대하겠다고 어렵게 지켜온 비밀을 더 보여줄 생각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같은 순간 어느새 마력을 갈무리 한 채 베느젤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무표정한 옆 모습을 한번 본 그가 말했다.

“무슨 내용이지.”

원래대로 돌아온 여유로운 모습의 레턴을 보고 다소 안심한 베느젤이 레턴과 르베나를 보며 정중히 말했다.

“마를한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에 아한님과 스릴 공주님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칸 님께서 그곳에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베느젤의 보고를 들은 르베나의 눈이 아를을 향하자 아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 역시 그 소식을 전하고자 르베나를 찾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뜻밖에 아주아주 기분 나쁜 눈빛을 보고 말았지만.

곧 아를에게서 사실을 확인한 르베나가 레턴을 보고 말했다.

“아까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죠. 저는 곧바로 아벨디온과 가스트 그리고 바흐란 왕자를 비롯한 자칸의 기사들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길의 안내는 칸 님에게 받도록 하죠.”

그러고는 바로 몸을 돌리는 르베나에게 레턴이 물었다.

“마를한의 기사를 함께 보내드릴까요?”

어느새 돌아온 그의 기다란 미소를 보고 르베나가 잠시 멈칫했다가는 답했다.

“아니요. 기습에는 최소한의 인원이 더 적당합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이만.”

대답을 듣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듯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는 르베나와 레턴을 한번 서늘하고 보고 돌아서는 아를의 모습이 곧 보이지도 않게 멀어졌다. 이윽고 그들의 모습이 어둠에 감춰지자 레턴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옆으로 흘러내린 그의 머리가 더 붉게 빛났다.

“하아……. 곤란하네… 정말……. 곤란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레턴의 말에 베느젤의 얼굴에도 조금의 어두운 그림자에 맺혀왔다. 말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에 처음 본 미소가 어린 탓이리라.

* * *

다그락, 다그락!

빠르게 달리는 말들의 발굽 소리가 조용한 밤길 큰 진동으로 퍼져나간다. 다행히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갈수록 쌓인 눈이 거의 없어 달리는 말에게 무리가 없었다.

조금 전 칸의 전보를 듣고 출발한 르베나와 가스트, 아벨디온 기사단. 그리고 바흐란과 자칸의 기사들은 그들을 기다리던 칸, 루안과 합류하여 빠르게 말을 몰았다. 마를한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마을은 말을 타고 달려 꼬박 네 시간 정도를 가야하는 거리였지만 누구하나 쉬지 않고 말을 몰아붙였다.

모두 한 마음으로 아를과 스릴 공주가 그곳에 있는 게 맞기를. 또 그들이 무사하기만을 빌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말을 탄 사람들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내뿜는 입김 또한 뜨거워졌다.

그리고 말들의 지친 울음소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일행은 드디어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박.

말에서 뛰어내린 르베나의 붉은 눈이 빠르게 마을을 훑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얼굴이 조금은 환해졌다.

아주 미약했지만. 정말로 많이 미약했지만

이 마을에서 아한과 스릴 공주의 마력이 느껴진 것이다. 가스트도 같은 걸 느꼈는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르베나를 불러왔다.

“…공주님!”

가스트의 목소리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미약하지만 느껴진다. 아한과 스릴 공주의 마력이.”

그리고 르베나의 말에 일행 모두의 얼굴에 조금은 밝은 빛이 새어들었다.

이제 막 멀리서 해가 비춰오는 이른 아침. 마을은 더없이 조용하고 평온했다.

도대체 궁에서 먼 이곳까지. 아한과 스릴 공주가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는 궁금증 뿐 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있는 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일행의 심장은 하나같이 미친 듯 뛰고 있었다.

저벅저벅.

르베나를 선두로 한 일행이 소리 없이 마을 어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은 조급했지만 발걸음은 결코 조급하지 않았다. 말을 달리며 미리 맞춰둔 대로 일행은 크게 두 팀으로 나누어져 걸음을 옮겼는데 르베나와 아를, 칸과 아벨디온 기사단이 한 팀이었고 가스트와 바흐란, 루안, 자칸의 기사단이 한 팀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대비해 베이라와 길잡이가 팀에 한명씩 속한 것이다. 그리고 르베나와 가스트는 혹시 모를 상태에 대비해 마력을 끌어 올렸고 다른 사람들 역시 잔뜩 긴장한 채로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마을 안으로 꽤나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

돌연 르베나가 걸음을 멈추고는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일행들을 돌아보자 모두들 같은 생각을 한 듯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에 사람의 인기척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은 떨리는 듯한 한 자칸 기사의 목소리가 일행을 파고들었다.

네 시간을 꼬박 달려온 마를한의 북쪽 마을. 그곳에서는 어느 한 사람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휑한 건물만이 남은 듯 텅 빈 마을.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한과 스릴 공주의 마력. 그것이 그들이 느끼는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르베나 일행에게 전해지는 하나의 메시지 같았다.

어디 한번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더없이 공격적이고 음침한 누군가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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