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0)
자박, 자박.
밤새 쌓인 눈을 나직이 밟는 누군가의 걸음이 어두운 밤하늘에 또 다른 소리를 입힌다.
“…하아.”
작게 내뱉은 뜨거운 숨결은 새하얀 김을 뿜으며 차게 가라앉은 밤공기로 섞여들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저녁, 르베나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밖으로 나왔다.
칸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몸을 긴장시키길 몇 시간. 작은 소리에도 잔뜩 예민해진 신경을 잠재우려 나온 것이다.
언제나 가스트의 옆에 붙어 있어 안전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았던 아한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나니 남는 건 후회였다.
‘보호 마법이라도. 아니 하다못해 위치 마법이라도 어느 하나라도 걸어 놨다면 이렇게 할 일 없이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대책 없는 후회가 자꾸만 르베나의 마음을 들쑤셔놨다. 더군다나 누구보다 힘들 것이 분명한데도 애써 르베나에게 잘 될 거라는 말을 계속 건네는 가스트가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아한의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가스트로부터 들은 게 고작 며칠 전인데. 괜히 르베나가 그들을 불러들여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운 탓이었다.
“하아-.”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쉰 르베나의 눈앞에 어느새 붉은 장미 정원이 들어왔다.
추운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미. 마를한의 마법이 상당 수준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곳에까지 쓰인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생각이 어느 곳으로 가 앉았다. 깔끔하게 베어 잔뜩 그려 모은 수줍은 장미 다발.
아한과 가스트가 이곳으로 오던 날. 가스트를 만나고 돌아온 방 앞에는 탐스러운 장미 다발이 놓여있었다. 그 장미 다발에 남아있는 마력이 참 수줍어서. 참 따뜻하고 귀여워서.
잠시나마 미소를 지었는데,
“이곳에서 가져온 건가.”
잠시 혼잣말을 내뱉은 르베나의 걸음이 장미 정원의 안쪽으로 향했다. 분명 아한의 마력이 또렷이 남아있던 장미는 르베나의 방 화병 안에서 점점 그 빛을 잃으며 시들어가고 있는데 그 꽃을 바꿔줄 아한은 지금 여기에 없었다.
그렇게 눈에 닿는 장미꽃 한 송이, 한 송이에 아한을 떠올리며 르베나가 점점 깊숙이 정원 안으로 걸음 했다. 새하얀 눈에 쌓인 붉은 장미를 아한이 참 좋아할 텐데, 와 같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어느 순간 르베나의 걸음이 멈췄다. 장미 정원이 끝나고 청량한 녹색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쉼터가 나오는 그곳에서 그녀의 눈이 조금은 놀란 듯 크게 떠졌기 때문이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밝은 달 아래 녹색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쉼터는 둥그렇게 장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도 장미 정원을 산책하다 잠시 쉴 수 있게 만든 공간 같았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장미만큼이나 붉은 머리가 바람에 날려 나부꼈다. 긴 적발은 마치 춤을 추듯 차가운 바람에 몸을 맡기었고 선홍빛의 눈은 다소 놀란 듯 이곳에 나타난 그녀, 르베나를 향하고 있었다.
짙은 달밤, 어둠이 보여 주는 환영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건만 르베나가 놀란 것은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세츠?”
작게 나온 르베나의 말에 그, 레턴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사아아--!
그들의 사이로 한차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르베나가 바람 때문에 잠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다시 떴을 때 눈앞의 레턴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옆으로 길게 늘어지는 미소와 나른하고 여유로운 표정. 방금 전 몸 바깥으로 자잘하게 뻗어나가던 신력의 자락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고 르베나를 보고 놀라던 표정마저도 어느새 깔끔하게 없어져 있었다.
단지 그를 보며 조용히 붉은 눈을 빛내는 르베나를 보며 레턴은 잠시 고민이 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잘못… 보셨다고 한다면?”
레턴이 묻자,
“그럴 리는 없다고 답하고 싶군요.”
르베나가 답했다.
그러자 레턴이 끄응, 소리를 내며 더욱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이거 어쩌죠.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인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해서요. 아니, 르베나 님께서 인기척 없이 다가오신 건가? 어찌 되었든 곤란하네요… 제가 신력을 다룬다는 건 비밀인데…….”
곤란하다고 하지만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길게 늘어트린 여유로운 미소만이 보였다. 그리고 르베나는 그의 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레턴.
변변한 외가도 없는 마를한 선왕의 열 번째 자식으로 성장과정동안 딱히 뛰어난 모습 한번
보이지 않았던 왕자. 르베나는 눈앞에 있는 그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좀 더 개인적인 정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삶에서 그녀는 디오니스의 왕으로 군림하며 타국의 왕실 사정에도 밝았다. 물론 짧은 제위 기간 동안 귀족들의 선동질에 놀아나 정치 수완은 좋지 못했지만 레턴에 대한 소문을 끄집어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를왕의 선왕인 그의 아버지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성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폭정을 일삼는 폭군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타국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이었고, 그 덕에 자식도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레턴은 그가 가진 열세 명의 자식 중 열 번째 왕자로 그때까지 딱히 두각 한 번 나타내지 않던 존재였다. 그런 그가 돌연 마를한의 왕이 되었다.
모두가 흥미를 가질만한 그의 이야기는 어느 날 레턴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네, 들었나. 마를한의 왕조에 저주가 깃들었다더군.”
난데없이 퍼져나간 소문처럼 마를한 왕가에는 저주와 가까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제1왕자가 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약 십 년. 마를한에 존재하는 열 두명의 왕자와 공주들은 하나같인 모두 병이나 사고로 모두 죽어나갔고 그중 단 한 사람, 레턴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혹자는 레턴이 왕좌를 찬탈하기 위해 모든 형제들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그러기에 레턴은 딱히 검술이나 마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뒷받침할 든든한 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곧 이를 레턴의 짓이 아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 만들어낸 마를한의 저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턴이 스물 두살이 되던 해, 마지막 남은 선왕마저 병으로 죽고 나자 마를한의 유일한 왕손인 그는 어쩔 수 없이 왕좌에 앉게 된다.
타는 듯한 적발에 또렷한 선홍빛 눈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나른한 분위기의 젊은 왕.
그렇게 선왕시절, 후사가 넘쳐흐르던 마를한 왕가에는 현재 레턴만이 유일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이자 왕으로 남아 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끄집어낸 르베나의 눈이 지그시 그를 향했다. 레턴은 외모로도 또 왕이 된 배경으로도 꽤 유명했지만 지금 르베나의 머릿속을 점령한 건 마를한의 저주나, 어떻게 그가 왕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 따위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온몸에서 뻗어 나오던 풍부한 양의 신력. 눈 깜짝 할 사이 그 모든 신력을 컨트롤 하는 놀라운 능력. 그리고 어디선가 한번은 보았던 것만 같은 그의 힘.
르베나의 눈이 순간 주변의 어둠을 닮듯 조금 어두워졌다.
“저를 언제… 만난 적이 있습니까?”
르베나의 질문에 레턴의 긴 눈이 잠시 놀란 듯 동그래졌지만 그는 곧 원래대로의 표정을 지으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레턴은 르베나를 보며 괴롭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흐음… 너무 어렵네요… 너무 어려운 문제야… 어쩌지?”
그러면서 레턴은 정말 고민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르베나는 그런 레턴의 표정을 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츠.
그들은 본인들이 믿는 정의와 선에 따라 힘을 사용한다. 아니 신력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사람들은 세츠를 보며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만큼 그들은 그들이 믿는 바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지만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신력이 많을수록 더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인다.
같은 이유로, 신력이 높은 성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대부분 미혼이 많았고 유파시드조차 혼인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젠의 왕인 유파시드는 혈연관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신력이 많은 세츠가 차지하게 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간혹 유파시드가 혼인을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이는 가문의 이익에 의해 그의 능력을 후사에 물려주기 위한 정략결혼이 전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츠들을 찬양한다. 그들은 절대로 사사로운 일로 힘을 쓰지 않으니까.
언제나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이며 통제할 수 없는 베이라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렇기에 르베나는 지금 레턴의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일국의 왕이 세츠라면 그는 분명 백성들의 존경과 존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걸 비밀로 하는 건지. 무엇보다 그녀가 아는 세츠라고는 루드바하뿐인데 왜 그의 신력이 아주 조금은 낯익게 느껴지는 건지 말이다.
하지만 레턴을 바라보던 르베나의 눈빛은 금방 담백해졌다. 마를한의 왕인 그가 세츠라는 것도. 그리고 그 힘이 어딘가 조금은 익숙하다는 것도. 평소라면 꽤 깊은 궁금증을 유발할 만한 일이었으나 르베나는 지금 아한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많은 에너지를 쓸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계속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턴에게 르베나가 곧 정돈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됐습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전하께서 비밀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르베나의 대답에 만족할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르베나를 보다가 돌연 큰 웃음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풉… 푸… 푸하……! 푸하하하하하! 아… 아 정말 하하하하!”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다가 종래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레턴을 보며 르베나는 잠시 미간을 구겼다.
‘비밀을 원하기에 그렇게 해 주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우스운거지, 정말 알 수가 없는 인간이군.’
하지만 레턴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르베나의 이해와는 조금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찬양할 힘을 숨기는 것부터가 조금 특이하기도 하고.
‘아니. 그건 특이하지 않은 건가?’
르베나는 배를 잡고 웃는 그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가 겨우 웃음을 그치고는 르베나에게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너무 재미있어서. 아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제껏 제 비밀을 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유가 궁금해 죽던데 어째서 공주님께서 그렇게 간단하게, 풉……! 제 비밀을 지켜주시겠다고 하는 건지.”
연신 웃으며 묻는 레턴에게 르베나가 짤막하게 답했다.
“모두에게 축복이라도 누구에게도 축복일 수는 없으니. 모두가 찬양해 마지않는 신력이라도 누구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 장미 정원이 지금의 저에게 반갑지 않듯.”
르베나의 붉은 시선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장미들을 향했다.
솨아--!
순간 또다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르베나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쌓인 눈에 밝은 달빛이 닿자 그 빛에 르베나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맑고 하얘 보였다.
이윽고 미소를 멈추고 르베나를 바라보는 레턴의 선홍빛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 동요는 짧았지만 그 사이 르베나는 몸을 돌려버렸다. 더 이상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소리에 르베나는 또다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웃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싸늘한 레턴의 목소리가 르베나의 귀에 날카롭게 박혀 들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걸 어쩌죠, 르베나 공주님. 하아… 이때까지 제가 세츠인 걸 아는 사람들은… 살아서제게 등을 돌린 적이 없는데…….”
한겨울 서릿발보다 차가운 레턴의 목소리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살짝 일렁였다. 그리고 또다시 차가운 밤바람이 한차례 그들의 사이로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