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09화 (109/276)

10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8)

“아네벨 상회란 말입니까?”

지난 밤 상회의 이름을 알려준 레턴의 말에 르베나와 아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들의 반응을 의아하게 여긴 가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님, 아를 경. 혹시 아시는 곳입니까?”

가스트의 말에 아를은 젠픽스에 오며 있었던 얘기를 일행에게 짧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가스트와 바흐란은 혹시 모를 기대감에 얼굴이 점점 밝아졌고 레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헤 벌렸다.

“아니, 정말 아네벨 상회의 상단주가 맞나요. 공주님?”

레턴의 말에 아를과 한번 눈을 맞춘 르베나가 말했다.

“저희도 진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레턴이 이상하다는 듯 제 긴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요. 이제껏 그 누구도 아네벨 상회의 상단주 얼굴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마를한의 첩자들을 보내도 번번이 실패할 정도로 의문에 싸인 자인데 말입니다.”

르베나와 아를이 아는 칸과는 너무도 다른 말에 둘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르베나가 제 앞에 찰랑거리는 붉은 와인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르베나가 한참 올려다보던 간판에서 어느새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언제든 찾아오라며 명함을 건넸던 칸의 말에 르베나와 아를 그리고 바흐란은 날이 밝자마자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어제 레턴의 반응이 자꾸 신경 쓰여 정말 칸이 상단주가 맞을까 하는 의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평범해 보이는 삼 층짜리 건물은 왕의 거래까지 거절할 정도의 위엄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심지어 아주 평범한 가게의 문처럼 보이는 상단 앞에는 두 명의 사내가 시시껄렁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진짜라니까, 나보고 볼수록 매력 있는 얼굴이라고 했어!

“그건 널 다시 볼 일이 없어서 그래! 푸하하하.”

문을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관상용으로 세워둔 사람들인지 그들은 내 편안한 분위기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 일행이 아네벨 상회의 문으로 다가가자 그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얼굴에 짓고 있는 미소와 편안해 보이는 행동은 여전했으나 바짝 날이 선 것 같은 예리함이 기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역시도 르베나와 아를, 바흐란 정도나 되는 실력자들이기에 느낄 수 있을 만큼 아주 세밀한 변화였다.

‘제법 훈련을 잘 받은 이들이군.’

르베나는 빠르게 그들을 훑으며 다가갔다. 그러자 밝은 갈색 머리의 웃는 얼굴을 한 이가 그녀에게 말했다.

“예쁜 아가씨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신 거라면 이곳이 아니라 시내의 아네벨 상회를 찾아가세요. 이곳은 본사라서 물건 판매는 안 하거든요.”

무해해 보이는 미소와 친절한 얼굴로 시내의 상회를 안내하는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온몸 가득 예리한 날이 곤두서 있었다. 이에 르베나는 붉은 시선으로 그를 한번 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네벨 상회의, 칸 님을 만나러 왔다.”

휙……! 차악……!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웃는 얼굴이던 청년이 사납게 표정을 바꾸고는 르베나의 목에 빠르게 꺼낸 단검을 들이댔다. 옆에 있던 사람 역시 어딘가에서 꺼낸 긴 표창을 다짜고짜 날렸다.

순간 르베나는 제게 향한 단검을 자연스럽게 피하며 청년의 복부를 아주 약간의 마력을 담아 쳤고, 아를은 손등으로 다가오는 표창의 방향을 간단히 바꿔 버렸다.

“이것들 뭐야!”

옆에 동료는 르베나의 마력에 맞아 숨을 못 쉬며 켁켁거리고, 자신이 던진 표창은 벽에 소득없이 꽂혀 버리자 남자가 소리쳤다. 동시에 그가 긴 검을 뽑아내며 날카로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르베나는 순간 그의 뛰어난 자세에 조금 감탄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내심 이 사람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짓궂은 생각마저 들었다.

“쿨럭……!”

순간 긴 검을 든 남자가 르베나를 향해 빠르게 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르베나의 동작이 더 빨랐다. 르베나는 그보다도 빠르게 제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움찔.

상대를 즉사시킬 생각으로 검을 뻗던 그가 르베나가 꺼낸 것을 보고는 잘게 몸을 떨었다.

자신의 발도보다 빠른 여자의 속도에 놀란 것도 맞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흰 종이에 금테가 둘린 아네벨 상회, 바로 칸의 명함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명함을 보자마자 곧바로 검을 집어넣고는 마치 조금 전 일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반듯하게 르베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수직에 가깝게 숙였던 고개를 들고는 호감이 듬뿍 담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칸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상당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제야 환영받는 느낌에 일행은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자세나 폼, 발도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가드들의 실력에 세 사람 모두 아네벨 상회에 대한 평가를 좀 더 높게 수정했다.

일행은 이윽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르베나의 뒤를 이은 아를과 바흐란 뒤로 어느새 처음 르베나에게 복부를 걷어차였던 밝은 갈색 머리의 청년도 함께였다. 그는 여전히 르베나에게 맞은 부분이 불편한지 복부를 손으로 쓸면서도 호기심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와… 레턴 전하의 청을 거절할 만한데?”

건물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흐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르베나 역시 침묵으로 동의했다.

밖에서 보면 더없이 평범한 삼층 건물이었던 아네벨 상회는 말 그대로 안과 밖이 천양지차였다.

허름한 문을 지나자마자 들어선 내부는 어떤 왕국의 본궁보다 고급스러웠다. 곳곳에 박혀 있는 보석이며 장신구들이 가히 국보급 보물이라 부를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에 딱히 관심이 없는 르베나가 보기에도 건물의 벽을 장식한 보석들은 꽤 멋져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혀 천박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것이 이 건물의 내부 인테리어를 한 사람의 감각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또한 일 층 가득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모습에서는 일에 찌든 기색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문 앞의 문지기들처럼 호탕하게 웃고 떠들며 자신들의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의 보스인 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천양지차여실히 보여 주는 예라고 르베나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네벨 상회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따로 있었다. 분명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3층 건물이었건만, 안으로 들어선 건물의 높이는 족히 6층은 될 만큼 높아 보였고 면적 또한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바흐란에 이어 아를마저도 이 모습에는 약간 놀란 듯한 금안으로 내부를 돌아보았다.

“…마법 확장인가?”

르베나가 묻자, 그들을 안내하던 이가 오히려 놀라며 물었다.

“여길 들어와서 놀라지 않는 분은 처음입니다. 하하. 네, 맞습니다. 마법으로 공간을 확장한 겁니다. 밖에서 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죠?”

그의 말에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건 밖에서 보기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곳곳에 박혀 있는 보석은 그냥 보기에는 값비싼 보석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그 강도와 저장 크기가 세계 최고라고 알려진 마석들이었다. 아마도 저 마석 하나면 수도에 있는 저택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가격일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가 진짜 놀랐던 것은 마석이 아니라 그 마석에 깃든 힘이었다.

저 마석에 깃든 마법이 이 건물을 더 크게 확장시켜 유지하는 것 같았는데 이만한 크기의 건물확장을 유지하려면 마법사는 주기적으로 마석에 마력이든 신력을 넣어 마법을 걸어 줘야 했다.

모르긴 해도 칸이 데리고 있는 마법사는 르베나도 조금은 긴장해야 할 정도의 실력자인 듯했다.

‘가스트가 와서 봤으면 좋아했겠군.’

순간 혹시 모를 소식을 위해 숙소에 남은 가스트가 생각났다.

“만만하게 볼 데가 아닌데.”

아를 또한 르베나와 같은 것을 눈치챘는지 르베나에게만 들리게끔 조용히 의견을 건넸다. 그러고는 그의 전신을 긴장시켰다.

르베나 역시 칸에 대한 좋은 인상은 잠시 넣어 두고 언제라도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몸 안의 마력들을 천천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긴장심을 삼키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일행은 어느 방 앞으로 안내받았다. 다소 활기 넘치고 시끌벅적했던 아래층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곳은 층 전체에 차분한 조용함이 맴돌았다.

마치 주인의 성격을 드러내듯 단출하고 깔끔한, 그러면서도 편안한 고급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곳이었다.

르베나 일행이 선 문 너머에서는 어느 누구의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의 정적이 흘러나왔다. 르베나뿐만 아니라 아를과 바흐란 역시도 아무런 인기척을 못 느꼈을 정도였다.

청력이나 사람의 인기척에 무척이나 민감한 이들이기에 이쯤 되면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청년이 무척이나 예의 바른 목소리로 안에 말을 전했다.

“칸 님, VIP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빠른 대답이 들려왔다.

“바로 안내해 드려라.”

젠픽스를 향하면서 내내 그들에게 세상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르베나에겐 팅과 언령 마법에 대해 말해주던 이, 그래서 조금은 더 반가운 그.

칸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됐대?”

긴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붉은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던 레턴의 물음에 베느젤이 그의 앞에 시선을 두며 답했다.

“상회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들려온 베느젤의 대답에 레턴의 얼굴에는 길게 늘여진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갔다.

길게 풀어 내린 적색의 머리와 머리카락만큼 선명하게 빛나는 선홍빛의 눈은 이 밤 평소보다 더 퇴폐적인 매혹이 묻어났다.

뭇 여성들이 본다면 남자에게서 저런 분위기가 나올 수 있음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늘인 미소가 썩 잘 어울리는 레턴은 칠흑 같은 밤을 닮은 고혹적인 남자였다.

그런 레턴이 와인 잔의 둥글 모서리를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정말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여자야.”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레턴의 붉은 입술이 다시 와인 잔에 닿았다. 피처럼 붉은 와인이 그의 입매를 더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흡사 밤의 제왕과도 같은 그의 매혹적인 모습에 분명 시선이 이끌릴 만한데도 그의 부하 베느젤은 계속 그의 긴 의자 앞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곳에 레턴의 손에 들린 와인처럼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늘어진 레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신의 모습은 마치 잘 그려진 명화에 튄 검은 물감 같았다.

베느젤은 그 시신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레턴에게 물었다.

“또… 자객이 든 것입니까?”

베느젤의 물음에 레턴이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제 발치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시신에 선홍빛 눈동자를 무심하게 굴렸다.

“아아… 지치지도 않는다니까. 정말.”

그러면서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했다는 듯 피식 웃은 레턴이 붉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베느젤이 방에 들어설 때부터 내내 입가를 떠나지 않는 그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홍빛 눈만큼은 시릴 만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 간극을 알아챈 베느젤이 그의 시선을 돌릴 주제를 던졌다.

“저번에 자칸에서 구한 책에서는 뭔가 쓸 만한 정보가 있었습니까?”

베느젤의 질문에 시신에서 눈을 뗀 레턴이 다시 긴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 누웠다. 그의 앞 테이블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낡아 보이는 책이 대충 놓여 있었는데 곧 그의 선홍빛 시선이 그곳에 가 닿았다.

씨익.

이번에는 그 책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기다란 미소가 지어졌고 동시에 그의 눈은 마치 이제 막 피어오르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 단 하나도.”

그의 말에 베느젤이 덩달아 실망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분명… 다음엔 꼭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위로와도 같은 베느젤의 말에 그녀를 잠시 올려다본 레턴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됐어, 그런 건 이제. 더 즐거운 걸 찾았으니까.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 여자는 대체 어디까지 날 즐겁게 해 줄까……?”

작게 킥킥거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곧 그의 입에 흘러들어오는 붉은 와인과 만나 촉촉하게 적셔갔다. 와인의 짙은 향이 방 안 가득 퍼져있는 피비린내를 아주 잠시, 씻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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