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08화 (108/276)

10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7)

“아한과 스릴 공주가 말입니까?”

상황을 전해 들은 루드바하가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르베나가 다소 초조해하며 말했다.

“둘 모두의 마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아직 마력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의 마력이 이렇게 흔적도 없다는 건.”

르베나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루드바하가 천천히 그녀의 말을 이었다.

“텔레포트로 이곳에서 완전히 사라졌거나… 죽었다는 얘기겠죠.”

담담히 읊조린 루드바하의 말에 이미 추측 가능한 가스트는 안색을 더욱 어둡게 물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자칸의 왕과 바흐란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주… 죽다니요! 그 아이들이 왜? 아니 그것보다 그 아이들은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텔레포트라니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자칸 왕의 흥분섞인 말에 루드바하와 르베나 그리고 가스트까지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아한과 스릴은 절대 텔레포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마지막 가능성에 대해 더이야기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한과 스릴 공주가 죽었거나 꽤 실력있는 마법사한테 납치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는 말이다.

“아바마마, 꼭 이런 시기에… 가야 합니까?

마를한을 떠날 준비를 서두르라는 켄느 왕의 말에 호안 왕자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호안 왕자와 함께 앉아있던 아한과 스릴 공주가 사라진 일로 디오니스와 자칸의 모든 이들은 현재 비상사태가 되었다.

헌데 그들을 도와주어도 모자랄 판에 켄느의 왕은 드록 왕자의 시해 범인이 잡혔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며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종, 시녀들을 뒤로 한 켄느 왕이 호안 왕자의 소리에 버럭 화를 내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말고 닥치고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그 애들이 없어진 것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우리가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단 말이냐! 그딴 소리 할 시간 있으면 가서 잊은 것이 없나 감독이라도 하거라!”

날카로운 켄느 왕의 말에 호안 왕자는 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축 처진 어깨로 본인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 날 켄느 왕국 전원은 모두의 배웅도 마다한 채 서둘러 자국으로 돌아갔다. 왕과 왕비 그리고 호안 왕자는 텔레포트를 통해 곧바로 왕국으로 향했고 그들의 기사들은 육로를 통해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르베나와 아를, 바흐란과 가스트 그리고 레턴이 따뜻하게 차려진 저녁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음식에 손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아한과 스릴 공주가 사라진 지 벌써 이틀. 켄느의 일행이 돌아간 후 모두가 함께 아한과 스릴 공주를 찾고자 했지만 여기에 모인 것은 일국의 왕족들. 사사로운 일로 왕국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제노스 왕의 경우는 드록의 장례식과 디오니스의 정치문제로 곧바로 자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루드바하 역시 죽어 버린 시해범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젠으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결국 디오니스에서는 르베나와 가스트, 아를과 그의 기사 네 명이, 자칸에서는 바흐란과 그의 기사들이 남기로 하였다.

젠에서는 범인이 특정되면 지원군을 보내 주겠다 약조를 하였고 마를한과 가까운 곳이니 만큼 레턴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하며 각국의 왕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다.

“어서 드시지요. 먹고 힘을 내야 아한 님도 스릴 공주님도 찾을 게 아닙니까.”

레턴이 식사를 재촉했지만 어느 누구도 편히 그의 말을 따르지 못했다.

아이들의 행방을 알만한 단서조차 없는 상황에서 음식이 입에 들어갈 리 없었던 것이다.

“확실한 건 폭발 직전 스릴 공주님과 가스트 님의 손자분이 함께 자리를 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까지는 못 봤습니다. 얼마 후 곧바로 폭발이 터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유일하게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었던 호안왕자의 말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적어도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란 희망.

그렇게 마땅히 추적할 수 있는 단서도 없이 꼬박 이틀을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날카로운 신경으로 보냈다. 게르로 인한 거대한 폭발 때문에 다른 마법의 흔적도 사라져 르베나와 루드바하 조차 흔적을 찾지 못했으니 모두의 희망이 점점 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식사마저 잘 하지 않는 그들의 앉은 모습을 보던 레턴이 여느 때처럼 길게 늘여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모두에게 할 이야기도 있는데 모두 이리 식사를 안 하시니 꺼낼 수가 없군요.”

레턴의 말에 바흐란이 곧바로 고개를 들며 물어왔다. 그의 접시에는 난자당한 브로콜리가 한가득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니요? 아이들에 관한 겁니까? 그렇다면 지체 없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따듯한 수프를 이제 막 떠서 입에 가져다 대던 레턴이 본인을 향한 사람들의 강렬한 눈빛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수프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수저 한번 대지 않는 그들의 그릇을 한 번씩 보고는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은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젠픽스가 무산되었다고 해도 저는 엄연히 호스트이고 여러분은 현재 마를한에 속한 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컨디션이 제게 꽤 중요한 일임을 인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레턴의 말이 끝나자 바흐란이 이에 항의하여 언성을 높이려 했다.

단서가 있다면 재깍재깍 말할 것이지 이 상황에 밥을 먹으라니……! 그것도 가뜩이나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피가 말라 가는 상황에 말이다.

하지만 바흐란은 그러지 못했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르베나가 조용히 스푼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스푼을 들자 바흐란뿐만 아니라 아를과 가스트마저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 김이 올라오는 수프를 떠서 입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며 말했다.

“다들 배를 채워야 힘을 내서 아이들을 더 빨리 찾지 않겠나. 어차피 밥을 먹으나 안 먹으나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레턴 전하의 말대로 배라도 채워라.”

말을 마친 르베나는 다시 따뜻한 수프를 입 안에 넣었다. 말과는 다르게 까끌까끌한 입안에 넣는 수프가 어떤 맛인지 전혀 느끼지는 못했지만.

아한.

그 아이는 르베나의 역린과도 같은 그녀의 사람 중 하나다. 그런 아이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심지어 르베나는 이에 대해 이틀 간 어떤 단서를 찾아내지도 못했다. 그게 르베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가스트와 바흐란을 생각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르베나는 다시 살기 시작한 삶 속에서 지금이 가장 당황스럽고 초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니 만큼 르베나는 더욱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아한과 스릴 공주는 영특한 아이들이니 분명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 놓았을 수도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현 상황에서는 마를한의 왕인 레턴이 가장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분명해. 아이들이 사라진 이곳은 엄연히 그의 땅이었으니. 그러니까 일단은 손해 볼 짓을 하지 말자.’

르베나는 수많은 잡념을 물리고 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스트와 바하란, 아를도 르베나를 따라 조금씩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턴의 얼굴에 이윽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그도 곧 뜨다 말았던 수프를 다시 입에 넣었다. 적당히 식은 달달한 단호박 수프가 르베나만큼이나 그의 입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상단… 말입니까?”

식사 후 자리를 옮긴 일행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레턴에게로 갔다. 손에 든 위스키 잔을 잠시 바라보던 레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단 말입니다. 보통 상단들이 돈을 버는 주요 통로는 사실 물건이 아니라 정보입니다.

규모가 큰 상단일수록 그렇지요. 게다가 이번 젠픽스는 젠이 제국을 칭한 이후로 모든 왕국이 처음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분명 이 안에서 일어나는 값비싼 정보들을 위해 각 상단에서는 사람을 풀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 쪽에서 아무런 목격자도, 흔적도 없는 어떤 것을 그들은 혹시 알지도 모르지요.”

레턴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듯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바흐란이 손안에 든 위키스를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는 물어왔다.

“하지만 젠픽스는 경비가 삼엄한데 그들이 어떻게 들어올 수가 있습니까?”

바흐란의 물음에 이번에는 아를이 대답을 했다.

“게르라는 놈도 침입했잖아. 능력 있는 상단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게다가 살의를 가지고 들어오는 게 아닌 이상 감지도 힘들고.”

아를의 말에 레턴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스트가 그에게 물어왔다. 그의 얼굴은 이틀 새 부쩍 상해 보는 이의 마음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전하, 하지만 이 얘기를 왜 오늘에서야 하시는 건지.”

가스트의 깊은 회색 눈이 그를 향하자 잠시 움찔한 레턴이 곧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생각은 첫날부터 했는데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마를한에 그 정도 수준의 정보력을 가진 상단은 단 한 군데인데 그들은 왕인 나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래를 거절하거든요.”

말을 마치고 조금은 어색하게 웃어 보인 레턴을 보며 일행은 침묵에 잠겼다. 자기네 나라 왕에게도 정보를 안 파는 상단에게 심지어 타국인인 그들이 도대체 무얼 얻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어느새 민망함을 감춘 채 길게 웃어 대며 위스키를 홀짝이는 레턴의 얼굴이 아주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 * *

검은색의 고급 목재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조금은 튀는 간판을 눈앞에 둔 르베나가 시선을 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건물. 하지만 그 건물의 간판만큼은 누구나 한 번씩 돌아볼 만큼 독특하고 매력 있어 보였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모두 한참 간판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마를한의 왕, 레턴이 알려준 상단이 바로 이곳, 아네벨 상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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