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6)
“우와… 전설 속의 동물?”
“저게 나팅이야……?”
“대단해……!”
팅을 보고 소곤소곤 들려오는 소리에 팅은 보란 듯 더 몸을 바로 펴며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봐야 주먹만한 크기였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 때를 잊고 설핏 웃은 르베나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 어깨에 앉은 것은 전설 속의 동물, 나팅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나팅은 마법의 동물. 그중 나팅에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마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영상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르베나의 말에 엄청난 소란스러움이 회의장을 뒤덮었다.
“영상을 기록하다니?”
“새로운 마법인가?”
그런 건 이제껏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마법이다. 통신구마저도 귀하고 텔레포트마저 귀한 시대에 영상을 기록하는 마법이라니.
웅성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르베나는 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팅의 몸에서 곧바로 르베나의 마력을 닮은 붉은색 마력이 하늘로 쏘아졌다. 그 마력은 하늘에 곧 어떠한 형상을 그려갔고 사람들은 그게 바로 영상이 기록된 모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영상 속에는 피곤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선 르베나가 드레스를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자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영상은 몇 배 정도 가속한 듯 빠르게 흘러 아침에 일어나는 르베나의 모습을, 또 시녀의 비명을 듣고 뛰어나가는 모습까지 보여 주며 끝났다.
영상이 끝나자 르베나가 게르를 보며 말했다.
“그날 밤 내 처소에는 나팅이 함께하며 나의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래도 그날 내가 너를 만나 살인을 사주하였나?”
순간 말도 안 되는 전개에 게르가 어버버 하며 선뜻 말을 잇지 못하였다.
영상을 기록하는 마법이라니. 처음 보는 너무도 황당하고 기가 막힌 모습에 게르 역시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 전설속의 동물, 나팅이 그녀와 함께라는 것부터가 충격이었다.
그러자 자칸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바른대로 말하 거라! 네놈이 감히 디오니스의 왕족을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냐!”
자칸 왕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지만 충분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또한 그가 말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소리를 높이며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벨디온 기사단은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덤벼들 기세로 게르에게 협박 같은 비난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지끈-!
둥글게 반원의 모습을 그리던 테이블이 반으로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제노스 왕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몸 가득 난폭하게 요동치는 마력은 주변을 사납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디오니스의 왕 아니셔?”
“소문으로는 베이라시라던데 진짠가 보네?”
그의 표정은 결코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무언의 기운이 위험할 만큼 사납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벅저벅.
말없이 걸어간 그가 이윽고 게르의 앞에 섰다. 곧 사납게 끓어오르는 그의 마력이 게르의 몸에 닿자 그가 삐쭉 삐죽 전기가 오른 것 같은 따끔거림을 느끼며 움찔했다.
“…어떻게 죽였느냐.”
그런 게르를 바라보며 건네어지는 제노스 왕의 목소리는 어느 깊고 어두운 지하보다도 무겁게 울렸고 게르의 몸을 감싸고 있는 그의 마력은 두려울 만큼 차가웠다.
게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떻게… 죽였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노스에게서 발현된 마법이 게르에게로 들어갔다.
정신계 마법.
정신을 조정하여 진실만을 말하게 하는 마법이지만 가벼운 부작용이 바보나 천치가 되는 것이고 흔한 부작용이 사망인지라 마법사들이 잘 쓰지 않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왕 죽을 목숨인 게르에게 진실이라도 듣고자, 제노스는 망설임 없이 정신계 마법을 발현했다.
곧 눈동자가 힘없이 풀어진 게르가 홀린 듯이 답했다.
“독으로… 모든 혈관을 수축시켜서… 피를 빼내서…….”
우득.
게르의 대답을 듣던 제노스 왕의 주먹을 쥐는 소리가 크게도 들려왔다.
“고통… 스러워 했느냐.”
제노스 왕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게르의 대답이 두려운 듯 그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아주… 많이… 눈물을… 흘릴… 만큼…….”
게르의 대답에 제노스 왕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참담하게 눈을 감은 제노스 왕이 곧 작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왕의 녹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누가… 시켰느냐……!”
제노스 왕이 질문을 던졌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게르가 직접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믿지 않았다. 르베나의 영상으로 이미 그녀의 무죄는 빠르고 정확하게 입증되었고, 그것으로 게르의 증언은 모두 거짓이 되었다.
그렇다면 게르가 드록 왕자를 죽인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것.
제노스 왕의 물음에 게르가 잠시 반항하듯이 몸을 움찔거렸지만 제노스가 곧바로 더 큰 마력을 주입하자 다시 온몸의 힘을 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 니…….”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루드바하의 소리와 함께 제노스는 더 이상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곧 그의 앞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콰광-! 콰과광……!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제노스 왕의 앞에 있던 게르의 몸이 순식간에 터져나갔다.
“꺄악--!”
“모두 피해라!”
“모두 폐하를 엄호해라!”
“모두 방어 태세를 갖춰라!”
멀리서 회의를 구경하던 시녀들의 비명 소리와 자국의 왕족을 보호하려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게르의 몸은 한 번의 폭발로도 부족했는지 연쇄적으로 폭발해 나갔다. 마치 그의 몸 한 조각이라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계속해 들려오는 폭발음과 자욱하게 인 먼지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이 모든 아수라장을 한번에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신성하리만치 투명하고 새하얀 빛. 보기만 해도 안심이 되는 강렬한 검붉은 색의 힘. 이 두 개의 힘이 모두를 있는 힘껏 그러안은 것이다.
루드바하의 신력과 르베나의 마력. 그들의 힘이 모두에게 닿자 사람들은 일순 모든 행동을 자연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보호와 절대적인 안정감.
그것이 그들 모두를 빈틈없이 채워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빠르게 발현된 르베나와 루드바하의 방어막 덕분에 제노스 왕을 비롯한 누구하나 게르의 폭발로 인해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게 정말 사악한 베이란의 힘이란 말인가……!”
어느 성기사의 경악어린 소리와 함께 공간의 소란이 잠재워졌다.
하지만 드록 왕자를 살해한 게르의 배후. 그것은 영원히 게르와 함께 먼지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후 상황이 다소 진정되는 듯 하자 기사들은 재빨리 제 나라의 왕족들을 먼저 챙겼고 호위 기사로 온 이들은 추가적인 공격이 없는지 날을 잔뜩 세운 채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뜻밖의 폭발로 정신없는 사이, 그 소란을 비집고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한, 아한!”
사람들을 감싼 실드 마법을 거두지 않고 다시 올지 모를 공격에 잔뜩 날을 세우고 있던 르베나의 청력에도 그 소리가 예민하게 잡혀왔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 단어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르베나는 재빨리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곧 르베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잔뜩 당황한 채 서있는 가스트가 있었다.
“가스트, 무슨 일이지?”
그답지 않은 모습에 르베나가 서둘러 다가와 묻자 가스트가 초조한 듯 말했다.
“공주님!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폭발 소리에 놀라 달려오니 아한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스트는 르베나의 결백이 밝혀지고 제노스 왕이 게르를 심문하자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다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를, 다한과 함께 게르를 구속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드록 왕자의 시해범인 것을 확인했으니 정신계 마법으로 인한 부작용이 발현되기 전에 디오니스로 압송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폭발음에 그는 곧바로 게르에게서 눈을 떼고 아한을 두고 온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달려갔지만, 그 자리에 아한은 보이지 않았다.
연이은 가스트의 설명에 르베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르베나의 보호막 안에 다친 이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또한 아한은 베이라. 아한의 마력에 익숙한 르베나는 어렵지 않게 아한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다.
르베나는 아마도 가스트가 당황해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아한의 마력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스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력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움찔.
가스트의 목소리에 르베나는 잠시 동요했지만, 곧 더 신경을 집중해 아한의 마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눈꺼풀을 들어 올린 르베나의 붉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아한의 마력이 이곳 어디에서도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쿵. 쿵……!
갑자기 르베나의 심장이 바닥 저 아래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은 살고 싶다는 듯 여느 때 보다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주의의 소란스러움이 귀에 하나도 잡히지 않았고 멀리서 흘러오는 메케한 시체 타는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마력, 아한의 흔적을 찾고자 르베나는 거세게 들려오는 제 심장소리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스릴, 어디 있느냐!”
“스릴!”
“스릴 공주님!”
또 다른 단어가 르베나의 귀를 사로잡았다. 르베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잔뜩 당황한 자칸의 왕과 바흐란 그리고 그들의 가사들이 보였다.
그중 르베나와 눈이 마주친 바흐란이 곧장 다가와 르베나에게 물었다.
“르베나 공주, 혹시 스릴을 못 봤어? 아까 아한과 분명 같이 앉아 있는 걸 봤는데.”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가 곧바로 스릴 공주의 마력을 떠올리며 흔적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르베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스릴 공주의 마력도 아한의 마력처럼 전혀 잡히지 않아.”
깨끗하게 지워진 것처럼.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는 없었던 것처럼. 아한과 스릴 공주의 마력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그렇게 드록 왕자의 살해범이 드러난 날, 아한과 스릴 공주는 연기처럼 모두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