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5)
가스트와 아를 그리고 다한은 나란히 앉아있었지만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르베나에게 당부를 들었던 터라 다른 아벨디온의 기사들만큼 분노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르베나를 위협하려는 게르에게 충분한 살의를 느끼고 있기는 했다.
또한 가스트의 옆에 팅을 데리고 앉아있는 아한은 눈가가 벌게질 정도로 화를 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들썩거리는 그의 마력이 방출되지 못하게 팅은 흘러나오는 족족 아한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고, 왕족이지만 어린 나이로 혹시라도 위험할까 아한의 옆에 앉은 스릴 공주도 제 주먹을 꼬옥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오로지 그 옆의 호안 왕자만이 계속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루드바하가 게르에게 물었다.
“게르, 너는 이 모든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만일 이 사실이 거짓으로 밝혀질 경우 나는 제국의 이름으로 널 즉각 처형하겠다.”
루드바하의 벽안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그를 향했다. 그러자 잠시 루드바하를 보며 눈치를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또한 저는 르베나 님에게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게르의 충심 어린 말과 진심 어린 표정에 사람들이 모두들 수군거리며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소문이 사실인지 르베나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무심하게 게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켄느의 왕이 르베나에게 소리쳤다.
“아니,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오, 공주! 저자가 공주를 위해 일을 했다고 하지 않소! 이 자리에 모인 모두. 진범을 잡기 위해 왕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범인이라고 지목된 이가 그리 태평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 원 참.”
켄느 왕의 말에 모두가 동조하듯 수군수군거렸다. 사실 말이 범인을 잡는 것이지 그들 모두 이곳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한 왕국의 수장이었다. 이 틈에 반역을 꾀하려는 세력이 왕좌를 노릴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철모르게 까불다 죽은 왕자의 살인범을 잡는데 동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켄느 왕의 발언에 점점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르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게르를 향해 말했다.
르베나의 목소리는 전혀 크지 않았지만, 힘이 있어 모두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를 안다고 했지. 정확히 언제 나와 알게 된 것인지 말하라.”
르베나의 목소리에는 강제하는 힘이라도 있는 듯했다. 게르는 마치 르베나의 목소리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신마전쟁이 끝난 후로 자취를 감추고 살았습니다. 모든 베이라들이 천시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때 궁에서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궁에 있는 베이라가 절 찾으신다고.”
한번 침을 꿀떡 삼킨 그의 말은 천천히 이어졌다.
“하여 갔더니 공주님이 계셨고 공주님은 제게 마력의 힘을 보여주신 후 디오니스를 망하게 하는데 제 힘을 보태달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순간 올라갔다. 계속 해 보라는 뜻이었다.
게르는 이어 말했다.
“당시 저는 디오니스에 많이 실망한 상태였고 또 공주님의 힘에 매료되어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주님의 연락을 기다리며 디오니스를 벗어나기까지 했는데 어느 날 공주님이 디오니스의 기사가 되기로 하셨다더군요.”
게르의 목소리가 순간 조금 작아졌다. 그의 태도는 어딘가 억울한 듯한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전 언제 올지 모를 공주님의 연락을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젠픽스 때 공주님을 뵐 수 있다기에 그 일념만으로 이곳에 찾아온 겁니다. 당신을 위해 힘을 쓸 기회만을 바라며.”
그의 말이 끝나자 르베나가 가소롭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서 도대체 지난 시간 동안 어디서 뭘 하다 지금에서야 온 거지?”
르베나의 물음에 그가 금방 대답했다.
“차, 찾아갔지만 언제나 공주님께서 절 돌려보내셨습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부르시겠다고…….”
그의 모습을 르베나가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자칸의 미친 흑마법사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불길한 힘이 아주 조금이지만 게르의 몸속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 강한 베이라는 아닌지, 그 힘은 미약해 보였다.
어딘가 얼이 빠진 모습으로 대답을 마치 외운 것처럼 뱉어 내는 모습또한 르베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르베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누군가의 사주 같았다. 그리고 저 게르라는 자는 거기에 이용당하는 허수아비. 분명 일의 전말도 제대로 모르고 시키는 대로 읊는 앵무새일 것이다.
누가 생각해도 엉성한 대답을 진실이라 믿고 말하는 자체가 그가 명석하지 못한 사람임을 알게 했다. 게다가 그가 읊는 르베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공적으로 드러난 일들이다. 게르라는 자는 분명 이 이야기를 이용해 르베나를 덫에 엮고 있다.
조금만 르베나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했어도 다른 좋은 이야기들로 괜찮은 그림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이 일을 계획한 사람에게 게르는 버려도 그만인 패 같았다.
루드바하에게 쫓길 때에도 자살 시도를 했다고는 하지만 루드바하의 말에 의하면 정말 죽음을 각오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들킬 게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 죽을 용기도 없고 일의 전말조차 모르는 버리는 패.
그는 무얼 위해 이 도박에 발을 담갔을까?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그를 보던 르베나는 그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게르라는 자에게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루드바하의 오랜 심문에도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고 하니 여기서도 뻔할 것이다.
게다가 이 공개 심문의 이유 자체가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무죄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연 것이라 했으니 르베나 스스로가 끝을 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드록 왕자의 죽음을 사주했다던 날, 내 방에는 나 말고 다른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나를 계속 지켜봐 온 너라면 알겠지. 그게 누군지 말해라.”
르베나의 말에 그가 잠시 놀란 듯 르베나를 보았다. 그건 그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고 사실 그에게 찾아와 할 말을 읊어주던 이에게서도 듣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게……!”
게르가 말이 더듬으며 당황한 눈길을 이리저리로 돌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디오니스의 베이라가 맞았지만 너무나도 약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베이라라는 것만으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신마전쟁의 패배로 디오니스가 기울고 베이라들의 처지가 안 좋아지자 이곳저곳을 방황하다 한 단체를 알게 되었다.
“우리 단체는 미지의 힘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우리의 힘을 받으면 당신은 지금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될 겁니다.”
게르는 그들의 달콤한 말에 빠졌고 점점 더 그 힘에 도취되어 끊임없이 힘을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단체는 그에게 처음처럼 자주 힘을 부여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그 단체의 꽤 높은 사람이 게르를 찾아왔다.
“너를 젠픽스에 넣어 줄 테니 드록 왕자를 죽이고 탈출해라. 그러면 그 힘을… 평생 얻게 해 주지.”
그는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들이 주는 힘만 있으면 이 세상을 제멋대로 살아가기에 충분했으므로. 그리고 드록 왕자를 죽이는 일은 생각 외로 너무도 쉬웠다.
드록 왕자를 지키는 호위도 없었고 궁의 내부도 누구 하나 없을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약하기 짝이 없는 드록 왕자는 본인이 생각해도 형편없는 실력의 그에게 너무나 쉽게 당해 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침입자에 이어 다른 사람도 아닌 유파시드에게 쫓기게 되다니. 쫓기는 줄도 모르고 집으로 향했던 그는 집 앞에서 루드바하에게 잡히고 말았고, 그 순간 저도 모르는 마법이 흘러나와 제 몸을 다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 엄청난 공포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폭발할 수 있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루드바하에게 끌려온 지하 감옥에서의 첫날. 같은 단체에 속해 있다며 다가온 한 남성이 그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이 일은 무조건 르베나 공주님을 위해 벌인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당신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의문의 남성은 그가 말해야 할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며 만약 단체에 대해서나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즉시 폭발할 거라는 친절한 설명을 함께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잘 해냈다. 이때까지는.
그런데 그날 르베나 공주와 함께 있던 자를 맞추라고? 뭐 이런……!
곤란한 얼굴로 생각을 하던 그가 곧 아, 하며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드록 왕자와 르베나가 머무는 곳은 같은 궁이었고 디오니스의 드록과 르베나는 분명 같은 층의 방을 썼다고 들었다.
물론 한 층이라 하여도 엄청 큰 궁이었기에 끝과 끝은 거리가 상당했지만, 그는 드록을 죽이러 들어갈 때 반대쪽 복도에서 보았던 사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멀리서 봐도 절대 잊히지 않던 사람. 그 사람이 르베나의 방에서 나온 사람일 테니 망설임은 짧았다.
“유파시드이십니다, 그날 르베나 공주님과 함께 계셨던 분은!”
잿빛으로 변했다 다시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답한 게르의 대답으로 회의장에 또다시 한기 같은 적막이 흘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파시드라니?”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세츠들의 왕이 왜??”
선을 행하고 정의를 행하며 그러기에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소문난 것이 바로 세츠였다.
감정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이기적인 베이라들과 달리 세츠들이 존중을 받는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었다.
세츠들은, 특히 유파시드와 같이 신력이 높은 세츠일수록 그들은 마치 감정이 결여된 사람처럼 사랑이나 연민, 동정 등을 잘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신력이 높은 세츠일수록 혼인조차 잘 하지 않았다. 혼인을 해봐야 정말 대를 잇기 위해 감정 없이 하는 혼인이 전부였다.
그런데 세츠들의 수장인 루드바하가 르베나 공주의 방에, 그것도 야심한 시간에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르베나는 마치 질문을 던져놓고도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다소 놀란 얼굴로 게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짙은 벽안은 시리게 빛내며 그를 조용히 직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멀리에 앉아있는 한 쌍의 금안이 곧 뚫어질 듯 게르와 루드바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르베나가 곧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르를 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네 놈의 연극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피곤하니 이만 끝내도록 하지. 더한 헛소문을 만들기 전에 말이다. 팅.”
르베나가 말끝에 팅을 부르자 아한의 품에서 놀며 스릴 공주의 관심을 받던 팅이 ‘팅!’ 소리를 내며 르베나에게 날아왔다. 그러고는 제 부드러운 털과 요요한 푸른 눈을 빛내듯 멋지고 우아한 자세로 르베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마치 이 회의장의 주인공이 저라는 걸 아는 것처럼 르베나의 어깨에 앉은 팅의 모습은 어느 때 보다 도도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팅, 팅!”
게르를 향해 제 두 귀와 꼬리를 위협적으로 펄럭이는 걸 잊지 않은 팅의 의기양양한 등장에 모두가 말을 잃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