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05화 (105/276)

10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4)

“르베나.”

르베나의 입에서 나온 작은 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자 검붉은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손에서 뻗어 나온 마력을 가만히 보던 르베나가 다시 마력을 거둬들이자 방 안에는 또다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후-.”

르베나가 작게 숨을 내어쉬자 그 모습을 침대 위에서 보고 있던 팅이 날아와 르베나의 어깨에 냉큼 앉았다. 그녀의 훈련을 방해할 수 없어 낑낑대다가 르베나가 훈련을 끝낸 것 같자 곧바로 달려든 것이다.

어깨에 걸쳐진 부드럽고 따뜻한 작은 온기를 느끼며 르베나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닦아냈다.

“생각보다 약해.”

르베나가 방금 마력이 뿜어져 나온 손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3일 전.

“이번 해의 젠픽스는 피치 못할 상황으로 인해 전면 종료됩니다. 또한 디오니스의 드록 왕자를 살해한 범인을 잡을 때까지 모두 이곳에 머물러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사일 뒤, 드록 왕자 살해 용의자를 위한 공식심문에 각국의 왕족분들과 그들의 호위 참석을 정중히 청하는 바입니다. 젠 제국.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루드바하의 발표 이후, 르베나에 대한 소문은 점점 크기를 불려 나갔고 기사들은 르베나를 보면 항상 웅성거렸다. 그 속에는 살인, 학대, 출신 등이 섞인 단어들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아벨디온 기사단과 타국의 기사단이 몇 번이나 싸움이 났고 결국 모든 왕국은 기사들을 본인이 기거하는 궁에서 최대한 나오지 않도록 합의했다.

이 모든 일이 제법 귀찮긴 했지만 르베나는 결국 본인으로 인해 발생된 일이니만큼 며칠간 되도록 방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래야 조금의 마찰이라도 줄일 수 있다 생각한 것이다.

대신 이 기회에 칸이 말해 주었던 언령 마법을 훈련하고 있었다.

“정체성. 본인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 그 단어만이 마법사의 마력 효율성을 증폭시켜 준다고 합니다. 그걸 잘 찾아야 언령 마법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요.”

얼마 전 들은 칸의 말을 떠올리며 그 의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르베나는 며칠 전 방을 찾아온 루드바하에게 결국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르베나가 언령 마법에 대해 알고 있자 놀란 루드바하가 입을 열었다.

“이런……! 언젠가 제가 직접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앗겼군요. 그래도 그대가 알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루드바하는 친절하게 언령 마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언령 마법에 정체성을 담는 단어라. 사실 가장 대표적인 건 하나입니다, 르베나. 바로 이름이지요. 나를 대표할 수 있으며 누구나 나라는 것을 알고, 언제든 그것으로 나를 부르니 언령 마법에 가장 적합한 단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정확하게 본명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가령 저 같은 경우는 어릴 적 어머님이 불러 주시던 애칭으로 언령 마법을 구사합니다. 제가 태어나 제일 먼저 저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했던 단어이기 때문이죠.”

르베나는 이후 그의 조언에 따라 방에 자발적으로 갇힌 삼일 동안 끊임없이 언령 마법을 연구했다. 처음에는 르베나의 마력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삼일을 내내 매달려 노력하니

이제는 제법 몸 안의 마력이 그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르베나.”

르베나가 또다시 말에 마력을 싣고 이름을 발음하자 몸 안의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확실히 평소랑 같은 양의 마력임에도 더 증폭된 힘으로 구현된 마법은 확실히 효율적이고 더 강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르베나는 3일 전 르베나의 방을 찾았던 루드바하와의 일을 한 번 더 끄집어냈다.

르베나가 스스로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자 걱정이 된 루드바하가 그녀를 찾아왔다. 하지만 르베나는 루드바하에게 위로를 받기보다 언령 마법에 대한 정보를 받길 원했다. 결국 언령 마법에 대해 시범을 보여줄 수 있냐는 르베나의 물음에 그는 서운하면서도 기쁜 듯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곧 원래대로의 옅은 미소를 베어 물며 순순히 제 신력을 꺼내 보였다.

“우선은 그냥 신력으로 마법을 구현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신력이 순식간에 작고 아름다운 꽃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하얀 꽃이 석양이 물드는 방에 환하게 피어났다. 그 꽃은 마법을 시전한 루드바하만큼이나 시리고 예뻤다.

하지만 루드바하가 그런 마법을 시전할 줄 몰랐던 르베나는 그저 가만히 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칭찬이나 호응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르베나의 무반응이 조금은 민망한지 루드바하가 금방 제 신력을 다시 흡수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제 언령 마법을 사용해 같은 크기의 신력으로 같은 마법을 구현해 보겠습니다.”

“…루드.”

그가 작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화륵, 화르륵-!

새하얀 기운이 온 방 안에 휘몰아치듯 불어왔다.

따뜻하지만 압도적인 기운. 친절하지만 광폭한 기운. 중심이 있지만 모든 것을 쓸어 버릴 듯한 휘몰아치는 기운.

루드바하의 신력이 온 방을 매섭게 오갔다. 순간 르베나의 검은 머리가 그 바람에 잘게 흔들렸고 방 안의 가구들이 몸을 떨 듯 작게 진동했다.

그리고. 화악-!

조금은 어두웠던 방 안이 갑작스레 환한 빛에 휩싸였다. 조금 전 루드바하가 정성을 다해 빛으로 빚어낸 꽃이 더 큰 빛과 함께 방 안을 가득 채울만큼 피어오른 것이다.

꽃은 신력으로 만들어 잡을 수 없었지만 새카만 밤하늘에 떠 있는 별보다 반짝였고, 세상의 어느 보석보다도 눈부셨다.

그런 꽃이 큰 응접실 가득 지천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중 하나. 루드바하의 손에 들려진 한송이의 꽃은 꼭 르베나의 눈을 담은 듯

매혹적인 붉은 자태를 띄며 빛나고 있었다. 루드바하가 짙게 미소 지으며 그 꽃을 르베나에게 내밀었다. 순간 르베나가 그 꽃에 현혹된 듯 자연스럽게 손을 대자,

“그대에게 축복을-!”

언젠가 들어보았던 말과 함께 매혹적으로 빛나던 붉은 꽃이 흩날리듯 공기 중에 떠올랐다. 그러더니 곧바로 르베나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따뜻하고 강한 느낌.

아벨디온의 창단식에서 루드바하가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맞춤을 하며 전했던 그의 신력이었다. 르베나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루드바하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제노스께서 르베나가 어떠한 위험에도 처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하셔서.”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하는 루드바하의 표정을 보고 르베나는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허락하지도 않은 남의 기운이 본인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은 마법사에게 꽤 예민한 일이었다.

창단식 때야 르베나가 그의 축복을 허락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제노스가 드록을 잃고 나서 불안한 심정으로 그에게 여러 번 르베나를 부탁한 사실을 상기한 그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은 할아버님의 부탁이 있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부터 허락 없이 주시는 축복은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르베나의 말이 꽤 아팠을 텐데도 루드바하는 오로지 지금 허락받은 것이 기쁜지 거짓 없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꼬리를 흔드는 큰 강아지같아 보여 르베나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유파시드의 축복.

그것을 위해 전 재산을 갖다바치는 사람이 수백인데. 그런 그의 축복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람. 자신의 몸을 의심스럽게 살펴보는 르베나를 향해 루드바하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고는 르베나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그가 속삭였다.

“…내 모든 축복을. 언제나 그대에게.”

그날의 생각을 마친 르베나가 다시 중얼거렸다.

“분명 그때 루드바하의 힘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많이 증폭됐었어. 이 정도는 너무 약해.”

충분히 로맨틱한 일들이 가득 했건만. 오로지 루드바하의 마법에만 집중해 그 날을 떠올리는 르베나를 본다면 루드바하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손끝에서 증폭된 언령 마법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지금 르베나에게 급한 일은 더 강한 힘으로 그녀의 왕국과 그녀의 사람들을 지키는 일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날 루드바하가 보여준 마법의 증폭 정도가 다섯 배라면 르베나는 고작 두세 배의 증폭밖에는 내지 못했다. 결국 작게 한숨을 내어 쉰 르베나는 무조건 연습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속삭였다.

“…르베나.”

“르베… 나.”

“르베나!”

그렇게 그날 밤도 르베나의 어두운 방은 수십, 수백 번 붉은 빛이 도사렸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 * *

루드바하의 공표 이후로 나흘째가 되던 날.

성의 정원을 회의장처럼 꾸며 놓은 곳에는 모든 왕국의 기사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사실 빼곡하다고 표현을 해도 각 왕국 당 젠픽스를 위해 대동한 기사들은 스무 명 내외이기 때문에 그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사들의 앞에 반원의 형태로 놓인 테이블에는 각 왕국의 왕들이 자리했다. 곧 그 가운데 있는 단상으로 한 남성이 잔뜩 주눅이 든 채 끌려 나와 섰다.

본인의 이름이 게르라고 밝힌 베이라. 그가 드록 왕자의 살해 용의자로 젠픽스 사상 처음 벌어진 공개 심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단상에 서자 루드바하가 미소를 거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가 답했다.

“게르. 저는 한때 디오니스의 베이라로 등록되어 있던 마법사입니다.”

그의 말에 장내가 잠시 소란스러워졌지만 루드바하의 서늘한 음성에 곧장 모든 소란이 멈추었다.

“게르. 너는 디오니스에 확인한 바로 스스로 디오니스의 국민이길 포기했다. 맞나?”

루드바하의 말에 게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드바하가 다시 말했다.

“드록 왕자가 살해되던 날 밤, 이곳에 위치한 본궁에서 몰래 빠져나가는 너를 젠 제국의 기사단장 라웅 경이 직접 목격했다. 너는 어느 왕국에도 소속되지 못한 국적의 사람. 젠픽스에는 애초에 올 수 없는 자격이었다. 해명해라.”

루드바하의 말이 끝나자 게르의 시선이 왕족들이 앉아있는 어느 곳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고는 그가 시선을 다시 옮겨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는 디오니스의 공주,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디오니스에 있을 당시 르베나 공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르베나 님의 청으로 잠시 디오니스를 떠나있었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꾼 르베나 님 때문에 저는 국적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르베나 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에 몰래 이곳에 오게 되었고 르베나 님께서 만약 자신을 따르고 싶으면 그 증거로… 드록 왕자의 목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이곳저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짓말하지 마!”

“네 혓바닥을 뽑아 버리겠다!”

“절대 편안하게 죽지 못하게 하겠어! 내 명예를 걸고!”

아벨디온 기사단에게서 거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매서운 기세에 게르가 잠시 겁을 먹은 듯 주춤했지만 그는 곧 차분하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 저는… 어떻게든 르베나 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드록 왕자님의 방에 침입했고.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라는 명에 따라… 그리 행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났다. 그리고 이제는 이전과 같은 소음 하나 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다른 왕국의 왕족들과 기사들이 모두 무표정하게 게르를 바라보고 있는 이번 일의 진범, 르베나를 사나운 기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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