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3)
몇 년 전.
디오니스는 때 아닌 홍수로 나라 전체가 물난리에 휩싸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도는 배수시설이 잘되어 있어 피해가 적었지만 수도에서 먼 지역일수록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막대했다.
특히 유렌이라는 지역은 가장 많은 홍수의 피해를 입었는데 영지민 집의 절반 정도가 홍수로 물에 잠길 정도였다.
“왕궁 기사들과 일부 귀족 휘하의 기사들을 풀어 수해 복구에 투입하라.”
제노스 왕의 명에 따라 많은 인력이 수해복구에 투입되었고 르베나 또한 제1기사단과 아를, 가스트와 함께 홍수로 인해 망가진 집들을 복구하고 마을을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태었다.
“…앗!”
열심히 물에 휩쓸려 쓰러진 나무들을 옮기던 아한이 순간 날카롭게 잘린 가지에 찔려 소리를 냈다. 가스트와 르베나는 마법으로 큰 손이 필요한 부분에 참여했지만 아직 마법을 잘 시전하지 못하는 아한은 이런 작은 일에 일손을 보태던 중이었던 것이다.
작은 손에서 붉은 피가 흘렀지만 아한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때 아닌 홍수로 많은 이들이 집을 잃고 가족을 잃었다. 그들의 앞에서 작은 생채기 하나 가지고 징징대는 아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별거 아니……!”
그때, 따뜻한 손이 아를의 손을 가만히 쥐어왔다.
“…누나!”
언제 온 것인지 아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르베나가 보였다. 아한의 상처를 본 르베나는 마치 본인이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르베나의 손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언제 느껴도 따뜻하고 강한, 그러면서 올곧음이 느껴지는 르베나의 마력이 아한의 다친 손을 감쌌다. 그리고 동시에 아한의 상처는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깨끗히 나았다.
“누나, 고마워!”
여기저기 흙이 잔뜩 묻은 희고 말간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가 어렸다.
하지만 아한은 르베나를 보며 계속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툭툭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지는 르베나의 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나의 마법만으로도 분명 큰 도움이 될 텐데. 왜…….’
얼마나 일을 한 것인지 르베나의 손에는 이미 수없는 생채기와 상처들이 즐비했다. 아한이 곧 웃음을 거두어내고 르베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물었다.
“누나는 왜 손에 힐링 안 써?”
아한의 눈이 본인의 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따라 보던 르베나가 상처투성이인 제 손을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는 아프지 않아. 그리고 나한테 쓸 힐링이라면 다른 사람한테 한 번 더 쓰는 게 나아.”
쓱쓱.
르베나는 그렇게 말을 하며 아한의 머리카락을 애정으로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곧장 원래 사람들을 도와주던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멀어지는 르베나의 모습을 보면서 아한은 심장 한쪽 어귀가 묵직해 지는 것을 느꼈다.
손의 상처는 다 나았는데. 아한이 그토록 좋아하던 르베나가 직접 낫게 해주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그때의 아한을 알 수가 없었다. 몇 일전 잠도 자지 않고 수해 복구에 매달리는 르베나를 보며 가스트가 작게 속삭인 말이 아한의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다른 사람만큼 본인도 챙기시면 오죽 좋으련만.”
* * *
갑자기 그때의 일이 생각난 아한은 아를과 다한을 찾아 기사들의 쉼터를 찾았다. 드록 왕자가 죽은 이후 자꾸 주위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그 나쁜 소리가 모두 르베나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줄곧 보이지 않아 결국 아벨디온 기사들에게 르베나의 행방을 묻기로 한 것이다.
“아벨디온 기사님들이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 방이 기사님들께서 곧잘 휴식을 취하는 곳이에요.”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아한은 어느 방으로 안내됐다. 그리고 방 앞에서 바빠 보이는 시녀를 돌려보낸 아한은 제 손을 들어 노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방 문을 넘어 들려오는 기사들의 이야기가 먼저 아한의 귓가에 닿았다.
르베나를 드록의 살인자 취급하는 저급한 이야기들. 그와 함께 드러나는 과거의 이야기들. 어린 아한이 듣기에 지독히도 자극적인, 언제나 르베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소름 끼치게 나쁜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아무런 여과도 없이 저 방에 있는 기사들에게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단 한 번 르베나를 보지도 못한 이들이 마치 오랜 시간 르베나를 지켜봐 왔던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 적나라한 말들이, 저급한 표현들이 날카로운 발톱이 되어 어린 아한의 귀와 마음을 할퀴어댔다.
부들부들.
아한의 몸이 분노로 떨려 왔다. 아한에게 힘이 있다면 당장에 저 방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 입으로 르베나를 말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누구도 함부로 르베나를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아한이 직접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한은 아직 마력을 잘 다루지 못했다. 사람의 기척을 읽어 내는 것은 정말로 세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마법을 시전하는 능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서 지금 아한이 할 수 있는 건 입 밖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돌아서는 일뿐이었다.
타닥타닥……!
휙 돌아선 아한이 빠르게 복도를 뛰어나갔다.
저 더러운 말들에서, 끔찍하게 소름 끼치는 말들에서, 그리고 아한을 조여 오는 이 끔찍한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퍽.
갑작스레 부딪혀온 사람에게 평소 같으면 먼저 사과했을 아한이 분노를 느껴버린 건 그래서 일지도 몰랐다. 한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아한을 막은 사람. 그 사람이 저 방안의 사람들처럼 소름끼치게 밉고 싫었다.
‘르베나 누나?’
하지만 아한이 분노를 느낀 대상이 다름 아닌 르베나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난폭하게 날뛰던 분노란 감정은 재빨리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다.
아한이 가족인 가스트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 유일하게 아한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
르베나.
르베나와 부딪힌 아한은 곧바로 방금 전까지 급격히 분노했던 자신의 모습을 걱정했다.
르베나는 뛰어난 베이라이니 만큼 아한의 들썩이는 마력을 보았을 테니까.
‘괜히 또 내 걱정을 하면 어떡하지? 누나도 지금 많이 힘들텐데.’
아한의 생각처럼 아니 다를까, 르베나는 아한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사람들은 르베나가 언제나 무표정하다지만 아한을 잘 알고 있다. 지금 르베나의 표정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운 표정인지. 그 안에 아한에 대한 염려와 애정이 얼마나 크게 묻어있는지를.
그런데 그런 르베나의 표정을 보자마자 아한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들었을 텐데… 이 정도 거리면 누나도 모두 들었을 텐데. 나보다 더 잘… 들었을 텐데.’
르베나 정도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도 방 안의 말들을 모두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화가 났는데 분노했는데 나조차 그들의 말을 듣고 이토록 떨리는데.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데도 왜 르베나는 눈앞의 아한만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지. 어째서 지금 아프고 다친 본인의 마음은 봐주지를 않는 건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아한의 눈시울이 급격히 붉어졌다.
언제나 바보 같은 르베나. 자기의 아픔보다 우리의 아픔이 먼저인 바보.
우리의 가벼운 기침을 막기 위해 제 살이라도 뜯어낼 미련한 르베나.
나조차 저 말들을 못 견뎌 등을 돌렸는데 그런 나부터 걱정하는 천치 같은 사람.
누나를 위해 처음으로 배운 게 힐링 마법인데 한 번도 쓸 기회를 주지 않았던 나쁜 누나.
그리고 그런 르베나가 또다시 본인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고 아한의 상처만을 바라본다.
누구는 불길하다고, 누구는 기분 나쁘다고, 또 누구는 소름 끼치다고 말한 더없이 따뜻한 붉은 눈이 한없는 걱정과 염려를 담고 아한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뚝.
아한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방울 하나가 말간 뺨을 뜨겁게 적셨다.
순간 아한은 생각했다.
‘이건 내가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야.’
뚜뚝……!
또다시 눈물방울 하나가 다른 뺨을 달구었다. 이번에 아한은 다시 생각했다.
‘슬퍼도 울지 못하는 바보. 그런 누나를 대신한 눈물일 뿐이야…….’
후두둑, 후두둑
곧 아한의 하얀 얼굴 가득 눈물이 흘러내렸다. 뜨겁게 솟구쳐 오른 불덩어리가 아한의 목을 달구며 오르락내리락 했고 아플 정도로 뜨거운 눈물이 아한의 온 얼굴을 적셔 대기 시작했다.
아한은 생각했다.
‘이건 누나가 너무 바보 같아서… 세상에서 제일 미련하고 나쁜 사람이라서 흘리는 눈물이야.’
많이 아플 텐데. 저란 말을 들으면, 저런 말을 달고 살면 너무나도 많이 아프고 힘들 텐데.
그럼에도. 눈앞의 아한만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르베나가. 곧 다가와 아한을 조심스럽게 그러안는 르베나가. 그 순간에도 제 힘이 아한을 아프게 할까 가만히 힘을 빼는 르베나가.
정말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라서. 그리고 아한은 그런 르베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아한이 겨우 배운 힐링 마법으로는 르베나 마음의 상처를 고쳐 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아한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흑흑… 누나… 흑흑…….”
지금 아한을 감싼 르베나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이 따뜻한 품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미워서. 그럼에도 언제나 아한을 안아 주는 르베나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아한은 꽤 오랫 동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저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표정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