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2)
“나를 아는가?”
서늘한 르베나의 목소리가 지하에 울렸다. 평소에는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면 지금 르베나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냉랭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칠흑처럼 검은 머리. 불타오르는 눈빛. 저희의 주군, 저희의 로드… 당신을 위해 드록 왕자의 목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저를 죽게 도와주십시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고 언어는 분명 모두가 쓰고 있는 공용어였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의 말이 마치 난생처음 듣는 것처럼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주군, 로드.
어째서 르베나 자신이 처음 본 저자의 주군이며 로드라는 건지. 게다가 그녀를 위해 드록의 목을 갖다 바쳤다는 말은 무엇이며.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게 해 달라는 애원이라니.
이해하려고 할수록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르베나의 기분이 더욱 곤두박질쳤던 이유.
모든 게 낯선 상황임에도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시감. 꼭 언젠가 겪어 봤던 상황이 지금 이 순간 르베나의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곧 르베나가 제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자 순간 루드바하가 손바닥을 펴고 공중에 한번 가볍게 흔들었다. 동시에 감옥 안의 그가 풀썩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절했다. 르베나의 표정만을 살피던 그가 불편한 표정의 르베나를 보고는 얼른 그자를 잠들게 해버린 것이었다.
“폐하 진짜 왜 저래?”
소름끼친 다는 듯 제 살을 문지르는 라웅의 말이 들려왔지만 르베나의 눈은 여전히 기절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좀 전의 살벌함을 넘어서서 이제는 곧 그를 죽일 듯 눈에 살의를 담았다.
이에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힘겹게 입을 뗐다.
“일단 걸려있는 마법은 없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도 르베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당장이라도 감옥안의 사람을 찢어죽이고 싶다는 형형한 살기가 솟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눈에 담던 루드바하가 안타까운 마음을 그득 담아 그녀를 불렀다.
“…르베나.”
그리고 그때, 르베나의 앞에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다가섰다. 감옥 안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을 물리적으로 차단한 이, 바로 루드바하였다. 그리고 이 지하 감옥 만큼이나 차가운 그의 벽안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 지금 르베나를 향하는 그의 벽안은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의 푸른 불꽃처럼 뜨거워 보일까?
르베나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할 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포근한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온
그가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저이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나의 가신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곳에 르베나를 부른 것은 저 사람의 말 때문이 아닙니다.”
르베나의 시선이 비로써 눈앞의 그, 루드바하를 향했다.
“혹시 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르베나는 그제 서야 루드바하의 몸을 조금 비껴 쓰러진 사람의 몸을 찬찬히 훑었다. 저를 보자마자 미친 소리를 해대는 탓에 자세히 보지 못했던 특이점이 그제야 르베나의 눈이 가득 들어찼다.
움찔.
르베나의 몸이 얼핏 떨려왔다. 그 반응을 확인한 루드바하의 눈이 어쩐지 순간 더 깊게 일렁인 것도 같았다.
“맞습니까, 르베나? 자칸에서 그대를 공격했던 그 미지의 힘.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그것과 동일합니까?”
루드바하의 물음에 르베나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어떻게 아는 거지? 그 힘을 그 자리에서 본 건 나뿐인데.’
르베나의 반응으로 대답을 확신했는지 루드바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충분합니다, 르베나. 나머지 이야기는 자리를 바꿔서 하도록 하죠.”
루드바하는 언제나처럼 말간 미소로 르베나를 부드럽게 돌려세웠다. 하지만 르베나가 완전히 뒤로 돌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자 그의 얼굴을 가득 채웠던 말간 따뜻함은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신 그의 눈만큼이나 푸른 분노가 그의 찬란한 얼굴에 천천히 덧씌워졌다.
“제대로 감시하도록.”
짧은 말을 남긴 루드바하의 저음이 어두운 감옥 안을 울렸다.
* * *
작은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루드바하와 대화를 마친 르베나가 곧장 아벨디온 기사단을 찾아 그들이 머무는 궁으로 온 것이다. 일이 점점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에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아벨디온 기사단에게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기 위해서 르베나는 제 거처와 조금 떨어져 있는 이 곳을 찾았다.
그럼에도 르베나는 시녀의 안내에 찾아간 방 안을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방에서 들리는 대화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공주님이 왕자님을 죽였다니?”
“아, 그러니까! 그 디오니스의 공주님이 원래 사이가 안 좋던 자기네 왕자님을 죽인 거래!”
“아니, 그러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하냐고!”
그러자 대답하는 이가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쥬드가 저녁에 유파시드께서 그 용의자를 데리고 들어올 때 그 작자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데. 나는 나의 주군 르베나 님을 위해 한 일이다. 뭐 그랬다나?”
수군수군.
기사들이 모여 곧잘 휴식을 취한다는 방에서는 계속해서 르베나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여러 명이었지만 그들의 주제는 분명했다.
이번에 죽은 드록 왕자를 시해한 범인이 바로 디오니스의 공주이자 아벨디온의 기사단장인 르베나라는 것.
“게다가 그 공주 전적이 있다며? 예전에 어떤 성인 남자를 엄청 잔인하게 살해했대!”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는 제법 컸다.
그래서인지 보기 좋은 미소로 르베나를 방으로 안내했던 시녀는 지금 눈에 띄게 파래진 안색으로 눈치를 보며 달달 떨고 있었다.
아마도 저런 소리를 들을 르베나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도 무섭지만, 저 소문의 주인공이 지금 본인 옆에 있다는 것에 더 겁을 먹은 듯 보였다.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굳이 기사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네.”
자신을 보며 덜덜 떠는 시녀가 가엽게까지 보여 르베나는 이 말로 그녀를 바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시녀는 르베나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먼저 줄행랑을 치듯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줄행랑.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다급한 모습이었다.
“…하.”
그 모습이 괜히 허망해 작은 헛웃음을 흘린 르베나가 닫힌 방문을 한번 보고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거두었다.
아벨디온은 이곳에 없었다. 그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므로 그녀가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방에서 멀어지는 순간까지도 마력으로 남들보다 청력이 좋은 그녀의 귀에서 ‘살인자’, ‘학대’, ‘창녀’ 따위의 말들이 계속 들려왔지만 르베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가는 일.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이 궁을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아한이?”
르베나의 질문에 그 앞에 선 시녀 루가 초조한 듯 말했다.
“네, 아를 경과 다한 경을 찾으러 이리로 가셨다고. 하지만 기사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행여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서요!”
루의 말에 따르면 아한이 아벨디온 기사단을 찾아 이곳에 온 듯했다. 하지만 루의 말대로 각국의 기사단이 모인 이곳은 결코 어린 베이라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보통의 기사들은 기사도를 내세워 노약자를 보호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사들도 있기 마련이었고 하물며 방 안에 있던 기사들의 거친 언사를 떠올리면 그들의 기사도라는 게 영 신뢰할 만한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한은 내가 찾아 돌아갈 테니 너도 돌아가 있도록 해.”
아무리 아한을 찾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온통 타국의 기사뿐인 이곳에 시녀인 루가 발을 들이는 것 역시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 르베나의 배려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르베나를 모셔온 루는 그 배려에 감사 인사를 하며 본궁으로 돌아갔다.
루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르베나는 얼른 발길을 돌려 다시 아한을 찾아 나섰다.
조금 전 방문했던 기사들의 쉼터. 근처에서 아한의 마력이 느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 왜 거기서 아한의 마력이 느껴지나 했네.”
발걸음을 빨리하는 르베나의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아한은 아직 마력을 자유롭게 컨트롤 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마법의 흔적이나 흐름을 읽는 기술은 르베나보다 뛰어났지만, 본인의 마력을 컨트롤 하는 일은 아직 미숙했다.
게다가 아까 그 방은 온통 아한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아한은 숨긴다고 숨겼지만 르베나는 알고 있었다. 어린 아한이 저를 향한 가시 돋힌 말들에 워낙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혹시라도 그 탓에 분노한 아한이 마력을 통제하지 못할까 봐 르베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순간 아한이 이곳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발길을 돌린 스스로가 맘에 들지 않았다.
퍽.
그렇게 기사들의 휴식처로 향하는 마지막 코너를 돌았을 때 르베나는 반대쪽에서 뛰어나오는 한 인영과 부딪히고 말았다.
밝고 윤기 있는 회색 머리카락. 그가 찾던 소년, 아한이었다.
조금은 안심한 마음으로 르베나는 아한을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항상 누군가와 부딪히면 먼저 사과를 건네던 아한이 잔뜩 분노 어린 녹안으로 르베나를 노려보지만 않았다면.
조금은 낯선 아한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르베나가 아무 말 없이 아한을 바라보자 아한은 그제야 상대방이 르베나인 것을 눈치챈 것처럼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조금은 낯선 모습의 아한이 르베나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여느 때처럼 말갛고 고운 얼굴. 선한 녹안 가득 채워진 당황스러움. 자연스럽게 나부끼는 회색 머리.
언제나와 같은 아한의 모습. 그럼에도 르베나는 섣불리 아한을 보며 웃을 수가 없었다.
난폭하게 요동치는 마력,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 붉게 달아오른 귓가.
아한의 모든 것이 지금 그가 얼마나 분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었을까?’
어른이 듣기에도 거북한 이야기를 아한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르베나의 목이 서걱서걱한 모래를 잔뜩 삼킨 양 불편해졌다.
아한은 아직 어렸다. 이런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듣기에, 그리고 이런 상황에 더없는 분노를 느끼기에 아한은 아직 어렸다.
르베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한과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르베나는 또다시 당황하고야 말았다. 마주친 아한의 녹안에 이번에는 물기가 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어 뱉어진 아한의 말도 조금은 이상했다.
게다가 마력.
이제 아한의 마력은 분노를 넘어선 또 다른 감정으로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한의 마력은 몸의 성장과 함께 제법 몸집을 불렸다. 이런 상황에서 마력이 폭주한다면 본인이 가장 많이 다칠 수 있기에 르베나는 아한의 불안정한 모습이 더욱 걱정되었다.
물론 아한이 폭주한다면 르베나가 안전하게 막을 수 있지만, 평소 심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한을 여기까지 몰고 간 상황이 혹시라도 아이에게 상처라도 될까 싶어. 르베나는 걱정스러웠다.
심지어 좀처럼 울지 않는 아한이 눈앞에서 눈시울까지 붉히며 동요하자 르베나는 문득 초조해지기까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짜 우는 건 아니겠지…….’
어떠한 일에서도 보호해주고 싶은, 너무도 작고 소중한 아이였다.
이전 생의 가스트가 생을 마치며 유일하게 부탁했던 아이, 하지만 르베나가 끝까지 지켜 주지 못했던 아이, 그래서 이번에는 꼭 더 지켜 주고 싶은 아이.
그러나 르베나는 더 이상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온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후두둑, 후두둑……!
곧 아한의 말간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