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02화 (102/276)

10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1)

“현재 그자의 의식에 잠깐 문제가 있어 이를 해결하고 난 후에, 저는 이에 대해 공개 심문을 진행하려 합니다.”

그의 말에 왕족들 간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이 있는 켄느의 왕과 스릴 공주의 납치를 경험한 자칸의 왕은 사실상 자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올해의 젠픽스도 더 진행되긴 어려울 터. 하지만 공개 심문을 하게 되면 그 특성상 모든 왕국은 또다시 이곳에 발이 묶이고 마는 것이다. 이미 이를 예상한 루드바하의 시선이 깊어졌다.

드록이 어떤 인물이었건 그의 죽음은 젠픽스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응당 모든 젠픽스 참여 대표들의 앞에서 공정하게 심문이 이루어져야 했고, 무엇보다 피해 국가인 디오니스의 참여는 당연했다.

하지만 당장 의식에 문제가 있으니 심문은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족들이 불안해하더라도 이건 그들의 의무였다.

루드바하의 말에 연신 불안해 보이던 켄느의 왕이 황급히 의견을 내었다.

“어차피 이번 젠픽스가 제대로 개최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심문은 디오니스가 참여하여 진행하는 걸로 하고 나머지 왕국은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떨는지요? 드록 왕자의 죽음으로 축제 분위기도 파했고, 타 왕국의 기사들을 계속 이곳에 두기도 힘드니 말입니다.”

켄느 왕의 말에 자칸 왕이 불쾌한 얼굴로 개인적인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우리는 이제 적국이 아니라 서로를 돕는 상생의 관계입니다. 거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젠픽스에서 한 나라의 왕자가 죽었는데 돌아가다니요. 켄느 왕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모두 함께 엄중히 재판을 진행하고 함께 범인을 가리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젠에서의 납치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무리라면 응당 다른 왕궁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조금 불안하더라도 더욱 함께해야지요.”

자칸 왕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왕국도 혐의를 벗을 수 없었고 또 자칫하면 잠깐 사이에 범인으로 몰려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모든 왕국이 함께 용의자를 심문해 뒤 끝없이 범인을 밝혀 내야 한다. 역시 그는 말이 많지는 않았으나 영민한 왕이었다.

루드바하가 바로 인질 심문을 하지 않는 것은 용의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고 세츠들의 왕인 그가 의식, 마법과 관련된 문제로 난항을 겪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용의자에게 생긴 문제는 결이 다른 어떤 것일 테다.

그의 오랜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단 하나의 퍼즐이라도 잘못 맞춰진다면 대륙은 다시 신마전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그것은 당장 스릴 공주 하나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보다 더 크고 무서운 일이었다.

자칸 왕은 본인의 직감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모든 상황을 나른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레턴도 말을 보탰다.

“이번 젠픽스의 호스트는 마를한인 만큼, 책임을 다하여 저희 역시도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켄느 왕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 상황에 혼자만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 이상 켄느 왕조차 의견을 내지 않자 루드바하가 마무리를 하며 회의를 끝냈다.

“그럼, 증인의 상태가 양호해지는 대로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회의를 끝내도록 하죠.”

누구 하나 얻은 것도, 나아진 것도 없는 회의였다.

* * *

“어째서 이곳으로 절 부르신 겁니까?”

어둡고 축축한 곳. 떨어지는 물방울의 소리가 습기를 타고 공기를 울리는 곳. 내딛는 걸음마다 신발에 눌러붙은 축축한 이끼. 딱 보기에 어느 궁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지하 감옥이었다. 그곳으로 들어선 르베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 루드바하를 향해 물었다.

르베나는 루드바하의 명이라는 성기사의 말을 듣고 이곳으로 안내받아 왔다. 하지만 방금 회의가 끝난 상황에 루드바하가 왜 그녀만을 이곳에 따로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수많은 방 가운데 음습한 지하 감옥이라니.

그런 르베나의 의아함을 이해한다는 듯 루드바하는 그녀에게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잠시 공주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 그럽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더없이 정중한 요청에 르베나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의 경험상 루드바하는 결코 못 믿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칸에서 그녀가 위험한 순간에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이 이상 그를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르베나는 제 한 몸 정도 지킬 자신은 있었기 때문에 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저벅저벅.

질척한 바닥을 걸으며 보니 예전 어느 왕의 휴양지였다는 이곳은 휴양보다는 죄인들의 고문에 더 많이 쓰인 모양이다. 지하 감옥의 규모가 크기도 컸고 무엇보다 오래된 핏자국과 고문 기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녹슬어 있던 탓이었다.

그리고 하나둘, 방을 지날수록 쾌쾌하게 묵은 피 냄새가 심해졌다. 그 냄새는 예민한 르베나의 후각을 불쾌하게 찔러 왔다.

화악-!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이 그녀를 감쌌다. 조금은 싸늘했던 지하의 기운을 막듯 미풍은 르베나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곧 르베나의 눈이 제 앞을 걷고 있는 그를 담았다.

“조금 나아지실 겁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힘. 언젠가 느껴보았던 루드바하의 신력이었다. 마치 지하 감옥의 서늘함을 없애려는 듯 따뜻하게 르베나를 감싼 그의 신력은 그것도 모자라 양옆에 즐비했던 핏자국과 녹슨 고문 기구들을 뿌옇게 흐려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오직 르베나의 앞을 걷고 있는 루드바하의 크고 넓은 등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정도는 필요하다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지난 번 연무장에서 손이 잠시 부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그는 언제나 르베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그녀의 불편들을 먼저 나서서 해주는 버릇이 있나 보다. 문득 말없는 르베나가 신경 쓰였는지 루드바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곳에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좋은 것만을 보셔야 하는데.”

이 미풍이, 이 한정된 시야가. 곧 루드바하의 배려임을 깨달은 르베나는 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르베나는 이전의 삶에서도 또 이후의 시간에서도 언제나 강했다. 그것만이 르베나를 그녀답게 만들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지켜주었다. 누군가에게 약해 보이고 틈을 보이는 건 곧 목을 내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원하지도 않는 배려와 관심은 언제나 불쾌하고 쓸데없는 것일 뿐이었는데. 지금 르베나의 몸을 감싸는 이 온기가 또 르베나의 시야를 흐르게 하는 이 힘이,

르베나는 어쩐 싫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그녀를 이렇게 연약한 아기처럼 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르베나의 심장 어귀를 간지럽혔다.

이것은 르베나에게 너무도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이었지만, 워낙 찰나의 순간에만 받은 느낌이기도 해서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고 말았다.

달칵.

어느새 멈춰선 루드바하가 한 감옥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성기사 두 명과 조금은 지친 듯한 라웅, 그리고 젠의 책사 유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유파시드. 그리고 르베나 공주님.”

르베나가 유안의 예의 바른 인사에 작게 답하고 곧 눈을 좀 더 깊은 곳으로 향하자 감옥 안에는 또 하나의 쇠창살이 보였다. 결국 감옥 안에 또 감옥이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꽤 흉측한 몰골을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의 몰골을 보니 성기사들은 고문 같은 걸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디오니스보다 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걸 딱히 잔인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기사들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악인을 처단하기 위한 일에는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의 눈길이 그에게 닿자마자 루드바하는 곧바로 신력을 통해 그를 치료해 버렸다.

화악--!

마치 르베나에게 이런 건 보여 주기 싫다는 듯, 이런 험한 모습은 르베나가 볼 것이 못 된다는 듯. 오히려 새하얀 망토를 걸친 그의 모습이 이곳에는 더 안 어울린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에 라웅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혀를 쭉 뺐지만 루드바하는 이를 모른 척했다.

또다시 예고 없이 다가온 낯선 배려에 이번엔 르베나의 배 속이 조금 간지러웠다.

하지만 르베나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이 사람은 뭐죠?”

르베나의 질문에 루드바하가 눈짓하자 유안이 말했다.

“회의장에서 들으셨겠지만, 그날 유파시드와 라웅 경이 추적한 사내입니다. 지금은 자결을 막기 위해 구속구를 채워 놓은 상태입니다.”

구속구.

쉽게 말하면 신체 내의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혈류만을 흐르게 하여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마법을 쓰거나 구현할 정도의 마력이나 신력 등의 흐름은 제한된다.

결국 어떤 사람도 구속구를 차고는 마법을 발현할 수 없다는 소리다.

르베나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초췌한 몰골. 루드바하의 신력으로 상처는 나았으나 여기저기 찢어진 옷에 베인 핏자국은 선연했다. 하지만 또 하나 선명한 것이 있었으니 마치 광기로 비칠 만큼 반짝이는 그의 눈이었다.

르베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더 큰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러고는 창살 앞으로 쏜살같이 뛰어나와 르베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의 주인… 나의 로드… 나의 르베나시여……!”

알 수 없는 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르베나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르베나에게 낯선 두려움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가 어디선가 한번은 본 것같은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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