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0)
이른 아침, 모든 왕국의 왕족들은 궁의 회의실로 소집되었다. 회의를 소집한 이는 어느새 홀연히 궁으로 돌아온 유파시드.
그리고 회의실에 앉은 모든 이들의 얼굴은 제각각의 이유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노스 왕, 그런 디오니스를 위로하는 자칸의 일행, 연신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마를한의 왕, 레턴. 그리고… 무엇인가 계속 불안해 보이는 켄느의 왕.
좌중을 둘러본 루드바하가 먼저 제노스를 향해 말했다.
“드록 왕자의 일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합니다. 같은 곳에 기거하면서도 불상사를 막지 못한 점 또한.”
루드바하의 말에 제노스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또한 그 아이의 운명인 것을 어찌 탓하겠습니까. 괘념치 마시지요.”
말을 하는 제노스의 얼굴이 생각보다는 아주 조금 괜찮아 보여 그를 보던 르베나 역시 안심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녀를 오랜 시간 그만의 방식대로 지켜온 제노스라면, 분명 이 슬픔도 잘 극복하리라 믿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그런 르베나의 표정을 알아차릴 만큼 감정이 잘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가스트와의 대화 이후로 조금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모두를 한 번 둘러본 루드바하는 그답지 않게 언제나 지어 보이던 옅은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얼마 전 젠에서는 어린아이들의 유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단 아이들은 일반인이 아니었고 신력이 발현된 아이들로 성기사가 되기 위해 마법 학원에 진학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모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다행히 저와 젠의 기사단은 유괴범들을 처단하고 아이들을 무사히 구출하였지만, 당시의 정황상 저희 젠은 단순한 납치범의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
루드바하의 이야기에 왕족들이 조금씩 수근거렸다.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이틀 만에 나타난 그가 난데없이 젠 내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모두가 루드바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 유파시드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족들이 조금 잠잠해지자 루드바하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그들에게서 아이들을 납치한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 무리가 꽤 조직적이고 치밀하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와 함께 저희는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공통된 힘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을 납치하는 조직에게 대체 얼마나 특별한 힘이 있기에 이렇게 서두가 긴가 싶었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모두 약간의 긴장이 돌았다.
“그것은 마력도 신력도 아닌 힘이었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힘을 특정할 수 있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회의실 안,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속에서 르베나의 눈이 조금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력도 신력도 아닌… 특정할 수 없는 힘이라…….’
“그리고 드록 왕자가 암살을 당한 그날 밤, 같은 힘을 이곳에서 느낀 저는 젠의 기사단장, 라웅 경과 함께 수상한 기척을 포착하게 되었고 곧바로 뒤를 쫓게 되었습니다.”
그의 예상치 못한 말에 사람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말대로라면 그는 아마 드록을 죽인 암살자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젠에서 납치극을 벌인 이들과 한패일 가능성까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자가 자결을 시도했고 그걸 치유하고 속박하여 돌아오느라 시일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더불어 드록 왕자의 암살 이야기는 돌아온 뒤에야 알게 되어 디오니스에 무척이나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그의 말에 좌중에 적막이 깔렸다.
드록 왕자의 암살이 생각보다 어렵게 얽혀 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본인의 페이스를 쉽게 잃지 않는 자칸 왕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 루드바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그를 심문해 정말 그가 드록 왕자를 암살했는지, 또 젠의 아이들을 납치한 게 맞는지 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여상히 던져온 그의 말에 루드바하의 얼굴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루드바하가 말끝을 조금 흐렸다.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 * *
젠에서 아이들을 구하고 자칸으로 와 르베나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루드바하는 곧바로 젠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납치범들의 심문 결과가 아니라 이미 죽은 시신들이었다.
그것도 해괴한 모습으로 폭발한 듯 보이는. 흔적조차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시신의 조각들.
짙푸른 벽안을 시리게 빛내는 루드바하의 모습에 라웅이 말했다.
“호송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자결했어. 마치 마력이나 신력을 몸 속에서 부풀려 자폭하듯이. 그리고 그때문에 호송하던 성기사 세 명이 죽었어.”
부하가 죽었기 때문인지. 혹은 그를 대비하지 못한 본인의 자책감 때문인지.
라웅이 그답지 않게 분노가 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루드바하가 눈앞의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피와 살점이 뒤섞인 시신의 조각들이 난무해 있었다. 아마도 폭발처럼 자결한 그들의 시신 조각일 것이리라.
루드바하가 그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자그맣게 본인의 신력을 흘려 넣었다.
새하얀 신력의 힘이 가늘게 그의 손에서 뻗어 나와서는 조심스럽게 시신의 조각들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치칙. 치칙. 파바박!
시신 조각들 주위의 공기들이 엄청난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신력의 힘을 공격하기라도 하듯. 만약 루드바하가 더 큰 힘을 쏟았다면 폭발이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그리고 이를 확인한 루드바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루드바하의 신력에 거세게 반응하듯 시신에 잔존하던 힘들이 충동을 일으켰다. 그러니 결코 이 힘들은 결코 순수한 신력이나 마력이 아니란 소리였다.
이미 생명력이 다한 시신에 잔존하는 신력이나 마력은 자연으로 스며든다.
그것은 이미 몸에서 구속력을 잃어 자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완전히 자연으로 섞여들기 전, 힘을 가진 시전자가 명령을 하면 그 신력이나 마력은 시전자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루드바하는 모든 세츠들의 왕.
그가 다루지 못하는 신력은 없으므로 만약 저 시신 조각들에 깃들여진 힘이 신력이었다면 그것들은 반항 없이 루드바하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저 힘들이 마력이라면 루드바하의 힘에 귀속되지는 않을지언정 위협이 될 만한 공격성을 갖지않고 자연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결국 저 힘은 신력도 마력도 아닌 것.
그 모습을 본 라웅 역시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뭐지? 신력도 마력도 아니야?”
오직 기사로서의 실력만 갈고닦은 라웅이지만 루드바하와 다니며 기본적인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신력이나 마력이 서로 간 충돌을 일으킬 일이 없다는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힘이라면 모를까. 이미 시신이 되어 자연에 흐트러지기 시작한 신력과 마력은 절대 서로에게 공격성을 띨 수 없다. 그런 라웅의 물음에 루드바하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도사렸다.
“그런 것 같다. 이건… 도대체.”
순간 문득 어느 날의 기억이 루드바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르베나의 흔적을 찾아간 곳. 무너진 건물 더미 사이로 피어오르던 짙은 살기.
그 살기는 결코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나 어느 사람의 것보다 짙고 암울했다.
그래서 그는 르베나에게 가기 전 그곳에서 신력으로 그 기운을 정화하려 했다.
쾅! 콰과광……!
그리고 그의 신력이 닿자마자 그 공기는 폭발할 듯 거세게 저항했다.
루드바하는 처음 보는 힘의 저항에 당황했다. 이 세상에 마력도 신력도 아닌 힘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 짙은 살기를 띠는 힘이라니……!
그냥 놔두면 분명 화가 될 것이 뻔했기에 루드바하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 힘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느낀 기운의 꺼림칙함이 지금 이곳, 세츠들의 땅인 젠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땅에 서린 기운들을 향해 루드바하가 새하얀 신력을 난폭하게 쏟아 냈다.
치치직-! 치지지직-!
루드바하의 신력에 그 힘들은 거세게 저항하듯 하다가는 이내 엄청난 양의 신력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힘이 모두 없어진 공간을 조용히 노려보던 루드바하가 고저 없이 말했다.
“라웅, 모든 성기사들에게 알려라. 젠의 전부를 뒤져서라도 이 힘을 가진 무리를 찾아내라고. 찾아내면 무리하게 제압하지 말고 힘의 폭주를 막는 구속구를 채워 곧바로 내 앞으로 대령하도록.”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다스리는 젠을 더럽히려는 불순한 힘을. 이유는 모르지만 젠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간 그 무리들을. 마치 무엇인가를 죽이겠다는 듯 꺼림칙한 의지를 흘려대는 이 힘을 말이다.
무엇보다.
루드바하의 머리에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던 그녀가 생각났다.
아직은 작고 소녀 같은 모습으로 언제나 누군가의 앞을 지키는 그녀.
모든 걸 다해서라도 지켜주고만 싶은 소녀.
남들 눈에는 그저 강인해 보일지 몰라도 그의 눈에는 한없이 소중하고 여린 그녀.
그런 그녀의 몸에 남아있던 불온한 힘.
“누구를 건드린 건지… 똑똑히 알게 해 주어야지.”
그답지 않은 서늘함이 짓씹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루드바하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신력들이 잘게 날뛰기 시작했고 가만히 시린 눈빛을 빛내며 서 있는 그의 주위로 자그마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인의 감정에 동요하는 신력의 자락들. 그것들이 모두 주인의 의지에 따라 분노하고 있었다.
* * *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던 루드바하의 시선이 르베나에게 닿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역시 자칸의 일을 생각하는지 자못 표정이 어두웠다. 그런 르베나를 제 벽안에 새긴 루드바하가 다시 회의장으로 의식을 돌려 제게 질문을 던진 자칸의 왕을 보았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그가 정한 이 방법이 부디 그녀에게 최선의 방법이기만을 바라며 잠시 닫혀 있던 루드바하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