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00화 (100/276)

100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9)

스릴 공주는 하염없는 걸음을 옮겼다. 드록 왕자의 죽음으로 젠픽스는 때 아닌 고요에 휩싸였고 유파시드가 돌아올 때까지 이후의 젠픽스 일정은 모두 정지되었다.

“게다가 범인이 잡힐 때까지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니!”

답답함을 못 이긴 스릴은 저를 지키던 자칸의 기사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방에서 그만 몰래 빠져나오고 말았다.

“하아- 기분 좋아!”

답답한 방 안에 갇혀 있다가 새벽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던 오전의 진한 장미향을 맡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서서히 정오를 향해가는 햇살의 따사로움이 조금은 쌀쌀한 공기를 녹여주는 듯도 했다.

그렇게 스릴 공주는 장미향에 빠지고, 짙은 풀 내음에 빠져 정처없는 작은 발걸음을 옮겼다.

“헉… 얼마나 온 거지……?”

기분 좋은 내음에 코를 맡기고 푹신한 잔디에 발을 맡겼더니 어느새 제법 멀리 왔는지 장미 넝쿨 사이로 궁이 멀찍이 떨어져 보였다.

“너무 늦으면 또 아바마마가 혼을 내실 텐데……후우……!”

자그맣게 중얼거린 스릴은 결국 스스로와 타협해 적당한 선에서 짧은 산책을 끝내기로 했다.

본인의 안전 때문에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딱 다섯 발걸음만 더 걷고 미련 없이 돌아가는 거야! 하나, 둘, 셋, 넷…….”

한 걸음씩 옮기며 전진하던 스릴 공주가 아쉬움이 가득한 작은 목소리로 다섯을 외쳤다.

“다섯……! 어?”

그런데 그때, 마지막 걸음을 옮긴 스릴의 눈앞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눈앞을 가득 메우던 장미 꽃밭은 머리 부분이 모두 숭덩 잘라져있었다. 마치 그 부분만 누군가 일부러 장미를 심지 않은 것처럼 뻥 뚫려 있었던 것이다.

아주 깨끗하게. 그리고 스릴 공주의 눈이 자연스레 아래를 향했다. 그러고는 곧 놀라움이 맑은 녹안 가득 채워졌다.

사방이 탐스러운 장미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 유독 일부러 누군가 장미를 심지 않은 듯 보이는, 아니 어쩌면 누군가 마법으로 그곳만을 비워놓은 듯 보이는 그 한가운데 요정이 누워 스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회색빛의 머리칼은 주변의 새빨간 장미와 대비되어 신비로웠다.

스릴과 같은 녹안이지만 훨씬 더 짙은 녹안은 선명하기도 했지만 그 속이 새카만 어둠같이 빛나기도 했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무엇보다 탐스런 장미를 보며 지어보이는 미소는 소년이 요정임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마치 장미꽃 속에 파묻힌 소년은 그렇게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요정……?”

스릴 공주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요정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뜻밖의 방문객, 스릴을 바라보았다.

‘요정이라니?‘

도대체 별안간 나타난 제 또래 소녀가 누가한테 뭐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란 표정으로 요정, 아니 아한이 스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한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사르르 흘러내리는 회색머릿결이 참 부드러워보였다.

“앗… 이게 아니지!”

순간 스릴 공주가 이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정이라니. 말도 안 돼! 내가 정신이 나갔나봐!’

“흠,흠……!”

곧 정신을 차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은 스릴 공주가 조금은 새침한 눈으로 눈앞의 소년, 아한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사람을 보고 요정이라 생각하며 한순간 넋이 나간 제 모습이 조금은 창피해 더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자칸의 공주, 스릴이다. 너는 누구지? 이곳에 내 또래는 켄느 왕국의 호안 왕자님밖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스릴 공주의 말에 아한의 눈이 스릴을 지그시 향했다.

‘스릴 공주님… 분명 르베나 누나가 자칸에서 구해 주었다는……!’

르베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아한이 스릴을 한번 쳐다보고는 일어서 본인을 소개했다.

“디오니스에서 온 아한이라고 합니다. 베이라로써 르베나 공주님의 요청을 받아 오늘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아한을 보고 스릴 공주는 조금 놀랐다. 아까 바람을 맞으며 웃고 있던 소년의 표정은 영락없는 요정이라 착각할 만큼 순수하고 수줍었는데 어째서 지금 스릴 공주를 향한 표정은 저렇게 냉랭한 건지.

괜시리 청하지도 않은 마음이 거절 받은 느낌에 스릴 공주의 마음이 조금 상했다.

그래서 조금은 더 샐쭉해진 표정의 스릴 공주가 아한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 들었어요.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 님의 손자시라고! 우리 르베나 님과 같은 디오니스 사람이군요.”

일단 르베나의 손님이고 가스트가 지니는 명성은 대단했기 때문에 스릴은 말을 높여 주기로 했다. 첫인상과 다르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스릴은 더 이상 경우 없는 공주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우상, 르베나는 경우 없는 사람을 싫어하니까!

‘…우리?’

반면 스릴 공주의 말을 들은 아한이 한쪽 눈썹을 제법 날카롭게 치켜세웠다. 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말수가 적은 아한이지만 그런 아한이 반응하는 게 이 세상에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르베나에 관한 일.

르베나에 관한 일이라면 아한은 때로 더 없는 수다쟁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감정의 기복을 보이기도 했다. 평소와는 너무 달라지는 그 모습에 아를은 곧잘 아한에게 이중인격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아한은 괘념치 않았다.

언제나 르베나의 앞에서 아한은 한 마리 온순한 양이었기에 르베나만 그를 좋게 봐주면 그만이었으니. 그런 아한 앞에서 ‘우리’ 르베나 님이라니……?

아한이 지그시 제 이를 악물고는 방긋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저도 기억나는군요. 르베나 누나가 구해 주셨다는… 그 공주님?”

아한의 말에 이번엔 스릴 공주가 움찔했다.

‘누나라니…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것 같은 저 말투……!’

르베나의 반응에 상관없이 르베나를 언니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왜인지 아한은 르베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그녀의 허락을 받은 것 같아 순간 기분이 상했다.

스릴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르베나는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스릴의 우상인데. 본인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가, 거기다 자칫 본인보다 더 귀엽게 생긴 아이가 르베나의 곁에 더 가까이 있다니……!

정말이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질투심이 스릴의 마음속에 불타올랐다.

그래서 스릴은 괜히 더 아한을 도발했다.

“저는 르베나 언니의 추천으로 곧 젠에 있는 마법 학원에 입학하기로 했어요. 언니가 아니었다면 목숨도 잃고 베이라가 될 수도 없었을 텐데… 그래서 언니는 제 삶의 우상이자 은인이에요. 그러니 그런 언니의 측근인 가스트 님의 손자분 역시도 제게는 의미 있는 분이네요.”

생긋 웃는 스릴 공주의 말에 아한이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아, 르베나 누나는 워낙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요. 그래서 저도 할아버지도 후벤도 사나도… 아, 이분들은 모르시죠? 르베나 누나의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에요.

아무튼 저희 모두 언제나 누나의 안위를 항상 걱정하고 있어요.”

아한을 아는 사람 특히 르베나가 본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아한은 말을 잘했다. 은근히 르베나의 지인들로 스릴과의 격차를 벌리려는 아한의 기묘한 말솜씨를 르베나가 본다면 아마 놀라 입을 헤 벌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곳에는 르베나가 없었고 아한은 르베나에 관한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스릴 역시 아한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저 요정, 아니 애가 언니의 가족 같은 사람들과 한패(?)라는 거야?’

더 이상 내세울 게 없자 괜히 분통이 터져 스릴 공주가 제 뺨을 부풀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어깨를 치켜세우던 아한이 곧 자리를 뜨려는 듯 탐스러운 장미들을 그러모았다.

그 모습을 보던 스릴이 부풀린 뺨으로 자그맣게 말했다.

“장미를… 좋아하나 봐요?”

짙은 패배감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르베나의 지인이라면 척을 지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어렵게 말을 이어간 것이다.

그런데 스릴 공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 안에 든 장미를 본 아한의 얼굴에 아까같이 수줍고 순수한 미소가 번져갔다.

“네… 눈과 닮아서…….”

작고 수줍게 속삭인 그 말에 스릴 공주가 순식간에 제 볼을 붉혔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 저도 좋아해요… 꼭 언니의 눈 같아서……!”

하지만 스릴 공주는 더 이상 아한의 요정모습에 설레지 않았다. 아한의 말을 듣고는 떠오른 어느 이미지가 스릴 공주의 머릿속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강인하고 멋지며 같은 여자라도 심장이 두근거리게 매혹적인 르베나의 모습. 그리고 세차게 뛰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며 르베나를 떠올린 순간 스릴이 아차 싶은 마음에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아, 물론 르베나 언니의 눈이 더 예쁘지만요.”

“당연히 르베나 누나의 눈이 더 예쁘지만!”

스릴의 말과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은 아한이 놀란 듯 스릴 공주를 바라보았다. 스릴 공주 역시 본인과 같은 생각을 하는 아한의 말에 놀란 듯 아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은 새로운 기분에 가슴이 설레어왔다.

르베나.

인생의 목적이자 우상인 그녀를 향한 마음의 동지를 그들은 오늘 여기에서 발견한 것이다.

방긋.

둘의 얼굴에 맑고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렸다.

르베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된 사람이라고 열다섯 살의 아한과 스릴 공주는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한가로이 거닐고 있던 레턴의 모습은 흡사 밤의 제왕 같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빛나는 적색의 머리는 불꽃처럼 정열적이었지만 나른하게 풀린 선홍빛 눈매는 세상 모든 일에 지루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대조적인 모습이 그를 더욱더 퇴폐적이고 고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지나가는 시녀들마다 그런 레턴의 모습을 흘끗흘끗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떼지 못했다.

저벅저벅.

그때 레턴의 곁에 온 그의 부관, 베느젤이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한밤중에 호위도 없이 나오시는 건 위험합니다, 레턴 전하.”

그러자 길게 늘어뜨리는 미소를 지어 보인 레턴이 말했다.

“이런 조용한 달밤에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너무도 가볍게 죽음을 말하는 그를 보고 베느젤이 한마디를 더 하려 하자 레턴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내어 쉰 베느젤이 화두를 돌려 말했다.

“유파시드가 방금 돌아왔습니다.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베느젤의 말에 레턴이 줄곧 짓던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손님은… 데려왔어?”

레턴의 말에 베느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손님과 함께 왔습니다.”

그러자 얼굴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레턴이 높이 뜬 달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유파시드네. 아… 내일이 너무 기대되서 오늘 밤은 잠들기 힘들겠어.”

나른함으로 가득 차 있던 레턴의 선홍빛 눈이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빛을 밝히는 달처럼 요요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내일 아침 젠픽스에 불어올 새로운 피바람이 못 견디게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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