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99화 (99/276)

9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8)

달칵.

제노스를 드록의 시신이 놓인 방에 남겨놓고 나온 르베나의 앞에 바닥에 길게 늘어뜨린,

색이 바랜 회색의 망토자락이 보였다. 고개를 드니 반갑고도 그리운 얼굴이 제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가스트.”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며 따뜻한 미소를 보낸 둘은 자리를 옮겼다. 언제나 가스트의 옆을 지키던 아한은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찻잔과 간단한 다과를 둔 시녀가 방을 나섰다. 작은 응접실에는 르베나와 가스트만이 뜨거운 찻잔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었다. 이내 찻잔을 가져다 한 모금 조심스레 마신 가스트가 곧 깊이 있는 회색 눈을 들어 눈앞의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르베나의 얼굴이 오늘따라 늙은 가스트의 눈을 더욱 끌어당겼다.

제노스를 홀로 방에 남겨두고 나오던 르베나의 눈빛. 그 알 수 없는 눈빛이 가스트로 하여금 르베나와 차를 마시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편안한 적막이 감돌던 공간에 이윽고 포근하고 점잖은 가스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아들 녀석은 지금의 아한과는 참 많이 다른 구석이 있었습니다. 제가 할아비가 아니었다면 정말 아한이 제 손자 녀석이 맞나 싶을 만큼 말입니다.

바일로. 그게 제 아들 녀석의 이름입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가스트의 아들, 그러니까 아한의 아빠는 신마전쟁 때 죽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가스트도 아한도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번도 르베나에게 얘기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전의 삶에서도 가스트는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그녀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꺼내는 이야기는 르베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곧 보이지도 않은 어느 먼 곳을 바라보듯 평소에도 깊던 가스트의 회색 눈은 더 깊은 곳을 향해 일렁였다.

“바일로는 아주 유쾌한 녀석이었습니다.

제 엄마를 빼어 닮은 환한 미소를 언제나 짓고 다니던 기분 좋은 녀석 말입니다.

게다가 베이라로써 뛰어난 마력과 체력을 타고난 녀석의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이 티 없는 녀석이었죠.

그리고 저를 똑 닮은 착하고 미소가 예쁜 며느리, 한나를 데리고 와 결혼을 하고

아한을 낳았죠. 한나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지만 맑은 미소가 참 예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갓 태어난 아한을 보며 기쁘다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이 늙은 눈에 선합니다.”

아한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미소를 지으며 가스트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가스트의 말을 듣는 르베나 역시도 언제나처럼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밝게만 보이던 녀석에게도 그림자는 있었는지 그 녀석은 아한만은 정해진 길을 따라 살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마력을 타고나면 당연히 베이라가 되어 디오니스를 위한 신마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귀족들의 긍지였던 당시의 상황에 그 녀석과 며늘 아이는 신물을 느끼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제노스 폐하께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들 내외 모두가 신마전쟁이 끝낼 때까지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아한에게 어떠한 가능성이 있더라도 평생 아이를 전쟁에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르베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신마전쟁 당시, 베이라인 귀족이 디오니스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었으나 나라가 강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대로 베이라의 피를 진하게 타고난 가스트의 집안에서는 이를 긍지라 여기는 정신이 이어져 내려왔고 아한의 부모는 이를 긍지로 여기고 정해진 길을 걸어야 하는 아들의 미래를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린 아들에게 자유로운 미래를 주기 위해 아한의 부모는 죽음을 담보로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선택을 반대했습니다. 제게는 핏덩이인 손자보다 제 아들이 더 귀했으니까요. 그 일로 바일로와 저는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고 결국 바일로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저희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손자를 대신해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아들내외의 의견을 가스트는 존중하지 못했다.

대대손손 베이라로써 디오니스를 위해 전쟁에 나간 것은 가스트 가문의 긍지였다.

그것을 제 아들에게 물려주기 싫다는 바일로의 생각을 그는 못났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아무리 그의 가문이라 할지라도 젊은 시절을 전장에서 보내고 나면 말년은

마법학원이나 궁정에서 일하는 삶을 보내는 게 보통이었는데 죽을 때까지 전장에 있겠다니.

이게 무슨 해괴한 거래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새벽, 차갑게 식어 돌아온 아들과 며느리의 시체를 본 가스트는 태어나 처음으로 체면을 버리고 모두의 앞에서 울부짖었다.

바로 얼마 전,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한을 보며 기쁜 얼굴로 서로르 부둥켜안던 아들과 며느리는 이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주검이 된 그들은 뭐가 여전히 좋은지 손을 붙잡은 채였다. 내 아들과 내 며느리는 이리 차갑게 식어버렸는데 제 눈에서 나는 눈물이 너무 뜨거워 가스트는 제 눈물조차 쉬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아한의 부모가 전쟁 중 세츠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래 된 부하의 배반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부하는 일정한 대가를 약속받고 디오니스의 군사기밀을 타국에 팔아넘겼고 이 때문에 아들내외가 속해있던 군대가 불시에 습격을 당했습니다. 아들내외는 그 상황에서도 한 명의 동료라도 더 구하고자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겱구 나란히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분노한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한을 저택에 두고 배신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찾은 그 사람은 따뜻한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를… 어찌했을 것 같습니까, 공주님?”

처음 듣는 가스트의 이야기.

가스트는 언제나 온화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줄 알았으나 적이라는 이유로 눈앞의 사람을 가차 없이 베어버릴 만큼 냉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타고난 베이라였음에도 공격보다는 방어 위주의 마법을 잘 다루었다.

이전 삶의 가스트 역시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눈앞의 세츠를 향해 거친 공격마법을 주저했기에 목숨을 다했음을 생각한 르베나가 답했다.

“그대라면… 살려주었을 것 같군.”

르베나의 대답에 가스트가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감정과 기억들이 숨어있는 듯 보였다.

“당시의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자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사정없이 공격 마법을 퍼부었습니다. 마법에는 소질이 없던 사람에게 말이죠.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말입니다.”

순간 르베나의 눈이 놀람으로 다소 크게 뜨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스트가 일부러 고문에 가까운 공격마법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스트는 그때를 회상하듯 회색 눈에 잠시 분노의 빛이 어리는 듯도 했다.

“언제나 아랫사람을 먼저 챙기고 어리석을 정도로 믿던 바일로를.

그런 바일로의 옆에서 언제나 예쁜 미소와 신뢰를 보여주던 한나를. 그 아이들을 팔아넘긴 그 부하를 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자가 죽을 때까지 공격마법을 화풀이하듯 퍼부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울고 있었는지, 웃고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분노에 삼켜진 제 모습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그런데… 어느 순간 목숨이 다한 그를 보면서도 저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화가 났습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저는 알 수 없는 찝찝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어느 날 악몽을 꾸고 제 방을 찾을 아한을 보고서야 그 감정의 실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스트는 그답지 않게 괴로운 듯 얼굴을 구겼다.

“사실 내가 가장 죽이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음을.

아들 내외를 지키지 못한 나를, 끝내 웃음조차 지어주지 못하고 그들을 보낸 나를.

어린 손자에게 부모를 허탈하게 빼앗아버린 나를.

끝없이 용서하지 못하던 나였던 것임을. 말입니다.”

가스트의 자조섞인 말에 깃든 아픔과 절망에 르베나의 심장이 뻐끈하게 조여왔다.

하지만 가스트는 직전에 느낀 아픔을 금방 조금 덜어낸 모습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점점 아한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공주님을 보면서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불행한, 그리고 끔찍했던 그 일은 어쩌면 결국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다고. 그 일이 있음으로 저는 아한을 돌보게 되었고 제가 알았던 긍지와 명예가 얼마나

헛된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염치도 없이 저는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죠. 내가 그들의 아비라고 해서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을 책임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스트의 회색 눈은 언제나처럼 다시 맑게 개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스트를 르베나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가스트가 지금 르베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은 감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사나도 후벤도… 공주님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천천히 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추측대로 가스트가 해묵은 아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르베나, 그녀를 위해서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드록이다. 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의 진한 눈이 큰 다정함을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요… 생을 달리한 것은 공주님이 아니고 드록 왕자님이지요. 그리고 그로인해 아마도 제일 가슴 아플 분은 제노스 전하시겠죠. 공주님. 공주님께서 얼마나 공주님의 사람들을 아끼는지. 또 그들의 행복을 위하는지 저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가스트의 깊은 눈이 르베나를 향했다.

“그러니 공주님. 폐하의 슬픔에 공주님께서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드록 왕자의 죽음을 비롯한 모든 이의 죽음을 공주님께서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주님이 저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지켜주고 싶으시듯… 저도 아한도, 후벤도 사나도. 또 아벨디온 기사단 모두도 같은 마음임을… 꼭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죄책감.

제노스를 방에 두고 나온 르베나의 표정에 어린 것은 명백한 죄책감이었다. 드록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보호하지 못한 누군가로 인하여 그녀의 사람이 슬픔에 빠졌다는 죄책감을 순간 가스트는 보았다.

아들내외의 시신을 두고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우는 아한을 볼 때마다 들었던 그의 죄책감을 아직은 어린 르베나에게서 본 것이다.

그래서 가스트는 그녀에게 에두른 위로를 건네었다.

그녀의 나이 이제 스무 살. 아직 어린 그녀가 모든 사람의 죽음에 책임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그녀가 아끼는 모든 사람의 불행을 대신 짊어질 필요도 없다고. 우리 역시 당신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싶다고. 그런 그들의 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어리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강하고 외로운 그들의 공주에게.

그리고 조금은 개운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르베나의 표정을 보며 가스트는 평온한 제 눈을 조용히 감았다.

어쩌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그의 아픈 이야기는 아마도 오늘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부스럭, 부스럭.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정원을 거닐던 발이 멈추었다.

사삭--!

순간 탐스럽게 피어난 장미꽃들이 공기에 베인 것처럼 날카롭게 잘려나갔다.

툭. 투둑……!

큰 장미들이 후두둑 떨어진 곳의 주위로는 이미 잘려나간 수많은 장미들이 한가득 모여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사삭--!

허공에 그어진 작은 손길에 멀리 있던 탐스러운 장미꽃이 툭 떨어지며 장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스스로 날아가 앉았다. 꺾인 장미꽃이 스스로 날아가다니. 누가 본다면 기겁할 만한 장면이었다.

털썩.

하지만 걸음의 주인은 이제 그 행동에도 지쳤는지 어느새 잔디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아한의 녹안에 불만족스러운 기운이 잔뜩 묻어났다.

드록 드 디오니스.

몇 년 전, 아한을 빌미로 르베나를 나무에 묶어놓고 마구 칼을 그어대던 미친 왕자.

그가 죽었다는 소리에 아한은 가스트와 함께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르베나가 그들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은 설레던 걸음을 옮기던 아한은 이곳으로 오기 전, 가스트에게 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드록의 죽음을 꽤 만족해하는 듯한 아한에게 가스트가 엄한 소리를 한 탓이었다.

“아한, 아무리 상대가 악한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지 말거라! 그건 올바르지 못한 마음가짐이란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내 너를 아주 혼낼 것이다. 알았느냐?”

언제나 아한에게 자상한 가스트답지 않게 무서운 얼굴로 말하는 바람에 아한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한은 가스트의 말에 처음으로 반감이 들었다.

‘그렇게 르베나 누나를 평생 괴롭히고 못살게 굴던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지? 만약 내가 더 커서 훌륭한 베이라가 된다면 제일 처음 하려던 일이 그를 향한 복수였는데!’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르베나를 눈앞에 두고 가스트는 아한에게 자리를 비우라고 했다.

아한이 르베나 보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뻔히 알면서 말이다. 여러모로 자신의 할아버지가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날이었다.

그래서 아한은 이곳에 도착하자맞 젠픽스 궁에 있는 커다란 정원을 거닐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마력이 들썩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바스락.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큰 정원에서도 꽤 깊이 들어온 이곳에 인기척이라니. 아한의 눈이 경계심을 품고 부스럭거리는 나뭇잎 사이를 향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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