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98화 (98/276)

9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7)

이후, 레턴은 디오니스 왕자의 일인 만큼 수사권을 전적으로 디오니스에 넘겨주고 다른 왕국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했다. 더불어 궁의 호위를 강화하기로 하고 추후의 일은 루드바하가 돌아오면 다시 회의하기로 했다.

회의가 파한 후 르베나는 곧장 제노스에게 드록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가스트와 아한의 동행을 요청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급한 일들을 마친 르베나가 아를과 다한의 방문도 거절한 채 방에 들어와 지친 듯 침대에 앉았다.

“…드록 드 디오니스.”

르베나의 붉은 입술이 그의 이름을 조그맣게 불러들였다.

이전의 삶, 그는 르베나에게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던 존재였고 결국은 르베나의 손에 처참히 죽어갔다. 그리고 회귀 후에도 그는 르베나에게 결코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사사건건 르베나를 걸고 넘어 졌고 그녀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는 여전히 치워버리고 싶은 존재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우선 세나르라는 동아줄을 잃은 그는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었으며 이번 생의 르베나는 필요 없는 살생을 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드록의 말에 까닭 없이 곤두박질 친 기분 그대로라면 르베나는 그를 몇 번이나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번 삶을 새롭게 시작하며 드록의 말에 크게 반응 한 적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왜 어제 유독 그의 말에 동요했는지는 그녀 조차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다음날 발견된 시체라니…….”

르베나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발견된 드록의 시체를 떠올렸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놀랍다고 해야 할지 르베나는 그 당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가 죽어서 좋다든지, 통쾌하다든지 혹은 마음 한구석이 신경 쓰인다든지.

여타의 어느 감정도 그녀의 마음을 두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차라리 생전 모르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더라도 이보다는 더한 감정이 있으리라 생각될 만큼의 무감각이었다.

‘내가 제정신이 맞긴 한 건가.’

순간 제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은 시간이 흘러 드록의 시신이 정밀조사를 위해 옮겨지고 다른 왕국의 왕족들과 회의를 마치고 난 지금, 어쩐지 르베나는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게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안타까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티… 잉……!”

그때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팅이 르베나의 다리를 제 털로 부벼 댔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자신을 향하자 푸른 색 요요한 눈을 가늘게 뜬 팅이 더욱 제 몸을 르베나에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팅, 티잉…….”

마치 안아달라고 조르는 듯한 모습에 르베나가 손으로 팅을 들어 제 다리 위에 놓았다.

“이제 깬 건가……?”

칸과 헤어진 뒤로 다시 까무룩 잠이 든 팅이 깨어난 것을 무감각하게 바라본 르베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르베나의 다리에 앉은 팅이 푸르고 맑은 눈으로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팅!”

제 꼬리를 살랑 흔들며 마력을 흩뿌렸다. 그러자 르베나의 몸에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그제야 르베나는 자신이 아직까지 어제 입고 잠들었던 얇은 드레스 차림으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침에 드록의 시체를 발견하고 급히 세안만 한 채 회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별안간의 회의 소집에 세수만 간신히 하긴 했지만 유독 르베나를 놀란 듯 본 이유가 이거였나 싶었다. 그리고 그 탓인지 그녀의 체온은 어느새 차게 식어 있었다.

르베나의 체온이 팅의 마력으로 서서히 오르자 그녀는 문득 다리 사이에 놓인 작은 온기가 못견디게 뜨겁게 느껴졌다. 곧 르베나가 작게 웃으며 팅의 털을 부드럽게 만졌다.

“고마워, 팅. 하지만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조금… 허무할 뿐이지.”

이전의 삶에서 그토록 미워 제 손으로 죽이기까지 한 드록이 갑자기 비명횡사를 하고 나니 드는 감정은 놀랍게도 허무였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간 드록. 그럼에도 르베나의 마음이 시원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할아버님께서… 슬퍼하시겠구나.”

자그마한 르베나의 말이 팅의 마력으로 서서히 따뜻함이 퍼져나가는 방에 자그맣게 작은 온기를 더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디오니스의 제노스 폐하.”

궁의 지하에 텔레포트로 나타난 제노스와 가스트 그리고 아한과 크론 일행을 보고는 레턴이 정중히 인사했다.

때가 때인지라 그는 항상 짓던 입 꼬리가 길게 뻗은 매혹적인 미소가 아니라 아주 작게 입 꼬리를 들어 올린 형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제노스를 비롯한 일행은 그에게 적당한 인사를 돌려주었다.

혼자만 간신히 텔레포트가 가능했던 가스트는 그동안 르베나의 지도로 마력 운용력이 높아져 이제 두 세명 정도의 인원을 텔레포트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제노스와 크론은 원래 혼자 텔레포트 정도는 기꺼이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사실을 안 르베나가 당시에 다소 놀라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를한에 모습을 드러낸 제노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래서 인사를 주고 받은 레턴은 제노스를 곧장 궁에 있는 어느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탁.

문을 여니 방의 한 가운에는 보전마법이 걸린 채 그가 누워있었다.

드록 드 디오니스. 제노스의 하나뿐인 아들.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품어주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그의 아들이 말이다.

“…아.”

제노스의 녹안이 거침없이 떨려왔다.

이렇게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세나르 왕비를 쳐내고도 드록을 궁에 남길 때 그가 보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곧 드록의 시신을 본 가스트와 크론은 서둘러 아한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아들과 작별을 하는 제노스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노스의 발이 한걸음 더 드록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는 그의 얼굴을 본 제노스의 녹안이 다시금 세차게 떨려왔다. 허황된 욕심을 부리는 그를 알고도 내치지 않은 것은 그의 죽음을 또는 그의 타락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못된 짓을 일삼는 그를 알면서도, 마음이 곱지 못한 그를 보면서도, 항상 부족한 행동거지를 일삼는 그를 생각하면서도 그를 내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래도 자식이었기에.

비록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주지는 못했지만 드록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더라도 이제라도 해볼 참이었다.

아주 조금씩 그가 르베나를 보며 자극받아 자신의 허황됨을 깨닫고 자신을 감싼 껍질을 벗어던질 수 있도록.

아직 수없이 남은 인생을 그와 르베나의 곁에 묶어두어 감시하며 그가 겪을 많은 일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기를.

그렇게 본인을 감싸고 있던 의미없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찾은 제 위치에서 행복해하면서 언젠가 그를 찾아오면 따뜻하게 드록을 맞아 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르베나를 따라 허무맹랑한 마음으로 기사가 된 그를 알면서도 르베나가 가기에 젠픽스에 따라 가겠다는 철없는 그를 알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던 것은. 드록도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드록…….”

제노스의 떨리는 음성이 그의 아들을 찾았다.

그 모든 경험을 통해서,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나르가 그에게 씌워버린 껍질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도 차마 벗겨내지 못했던 그 족쇄를.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거칠게라도. 드록 스스로 벗어던질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 단다, 드록…….”

아무리 악하고 모자라도 드록은 그에게 엄연한 자식이었다. 비록 충분한 사랑과 정을 베풀지는 못했어도 제노스는 그의 자식이, 그의 아들이 언젠가는 그렇게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 믿었다.

털썩. 제노스의 지친 몸이 드록의 시신 앞에 힘을 잃고 무릎 꿇었다.

하지만 그는 알기도 전에 떠나버렸다. 본인을 가둬두었던 그 껍질을 깨보지도 못하고

본인이 무엇에 갇혀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본인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지도 못하고 무엇을 잘못한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드록을 보던 제노스가 눈을 감아 제 흔들리는 녹안을 감추었다.

과연 자격이 있는지.

어린 자식이 본인보다 먼저 생을 떠난 이 기막힌 상황을 마음껏 슬퍼할 자격이 본인에게 있는지 제노스는 또다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르베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자부한 그에게 드록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이 허락된 것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르베나를 평생 괴롭힌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노스를 보며 또다시 르베나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스스로가 과연 드록의 아비 자격은 있는지.

흠칫.

순간 제노스가 제 어깨를 떨었다. 갑작스러운 작은 온기가 그의 손을 꼭 잡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노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뜰 수 없었다.

이 무뚝뚝하게 뻗어온 온기가, 망설임에 가득 차 있는 손이. 그럼에도 그의 손에 안정된 마력을 흘려놓는 그 따뜻한 마음이 누구인지 알기에.

그녀를 평생 괴롭힌 드록의 죽음으로 흔들리는 이 눈으로는 도저히 그 아이를 향해 웃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전하를 탓하지… 않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하는 부모를 탓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전한 말에도 차마 제노스가 눈을 뜨지 못하자 한 인영이 천천히 다시 그의 곁을 떠났다.

달칵.

짧은 말을 남긴 그녀, 르베나가 방을 나섰다.

그리고

후두둑. 후두두둑.

감긴 제노스의 녹안에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 한 번도……. 보듬고 사랑하지 못해… 흑… 그대로 영원히 껍질 속에 갇힌 내 아들아…….흑… 잘못된 부모의 만남으로… 으흑… 아마도 짧았던 모든 생을… 흑… 본인이 만든 감옥 안에서 괴로워했을 내 아들아……. 으흑…….”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이해받고 사랑받지 못했던 가여운 아들.

이제 겨우 스무 살. 아직도 수없이 변하고 또 변할 수 있었던 무수한 기회와 시간을 남겨둔 채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보냈을 어린 아들.

지금 이 순간만은 그에게. 더없이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그래서 항상 마음이 쓰였던 그의 아들에게 온전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너무 늦어서. 너무 느려서. 또 너무 믿어서.

그래서 너의 껍질을 밖에서 깨주지 않았노라고.

이렇게 영원히 그 껍질 속에 갇힌 너는 비록 세상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아픈 손가락처럼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자식이었노라고.

르베나의 허락 같은 위로 앞에서 이내 그는 무너져 내렸다.

젠픽스가 개최되고 이틀 날 아침.

제노스는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자식을 하늘로 또 올려 보내야만 했다.

누군가에는 악인으로 기억될 드록 드 디오니스.

그를 미안한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시퍼렇게 멍 든 자신의 가슴에 깊게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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