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6)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유리잔을 바라보는 제노스 왕의 시선이 잘게 떨렸다. 순식간에 그를 스쳐지나간 불길한 느낌에 손에 힘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옆에서 제노스 왕을 바라보던 시종 크론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크론의 물음에도 제노스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나직이 쉬어진 작은 한숨과 함께 그가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군.”
제노스의 말에 크론의 얼굴에 크게 걱정이 어렸다.
벌써 삼일 째.
거의 잠도 자지 못한 제노스의 안색은 그가 보기에도 좋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크론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갑자기 국경에 마물이라니… 후벤 경과 그의 기사단이 근처에 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마물이 수도로 접근했을지도 모르니까요.”
크론의 말과 함께 제노스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디오니스의 국경에는 원래 마물이 없었다.
디오니스의 국경을 한참 벗어나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들어서야 마물의 존재를 겨우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주 옛날에는 인간들의 앞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는 마물들은 신마전쟁 때 훌륭한 마법사들의 호된 공격 이후로 점차 모습을 감추어갔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는 사람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곳에서 저희들끼리 생존하며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젠픽스로 향하는 르베나의 일행이 몬스터 떼를 몇 번이나 마주쳤다는 보고를 들은 이후 왕국에도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전하, 현재 국경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후벤 경의 보고입니다. 다행히 후벤 경 휘하의 기사들이 그와 함께 근처에 있어 마물들을 처리하고 있다 합니다.”
보고에 놀란 가슴과는 다르게 다행히 마물은 몇 마리 안됐고 특별한 독도 없었다. 다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며 수도를 향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다행히 그 근처에서 훈련 중이던 후벤 경이 그가 이끌던 기사단과 함께 마물을 처리했지만 이례적인 마물의 등장에 디오니스에는 한바탕 혼란이 들어찼다.
“그들의 흔적을 조사해 보았을 때 여타의 다른 마물들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리에서 이탈한 놈들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하지만 가스트와 아한의 조사에 그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특히 아한은 여전히 낯을 많이 가리고 말수가 적었지만 마법의 기척을 읽는 실력만큼은 가스트나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놀라웠기 때문에 더 믿을 수 있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인지라 보호를 위해 언제나 가스트와 후벤이 동행을 하지만 이제 아한의 실력은 디오니스에 중요한 힘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제노스와 크론이 드디어 젠픽스로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제노스의 피곤한 녹안이 잠시 깨진 유리조각에 잠시 머물렀다가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의 손녀, 르베나를 보러 가는 날.
어쭙잖은 불길함 따위는 떨쳐버려야 했다.
그렇게 제노스가 스스로의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린 순간 그의 방에 위치한 마법구가 빛을 발했다. 제노스 직통 마법구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건 주인인 제노스를 제외하고 오직 세 명 뿐이었다.
시종인 크론과 가스트. 그리고 그의 손녀 르베나.
제노스가 저도 모르게 얼굴 가득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를 띄고는 깜빡깜빡 빛을 발하는 마법구에 그의 손을 가져다 대며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법구에서 곧 르베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에 그와 루아나 공주를 전혀 닮지 않은 얼굴.
하지만 누구보다 그가 사랑하는 그의 손녀, 르베나.
제노스는 오랜만에 보는 르베나가 반가워 살폿 웃었다가는 순간 멈칫하고 표정을 굳혔다.
언제나와 같이 르베나의 표정은 무감각했지만 제노스는 그녀를 아주 어릴 때부터 지켜본 르베나의 핏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르베나가 짓는 표정이 언제나와 같이 평온한 무표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르베나.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제노스의 물음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마법구를 통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약간의 망설임을 담은 르베나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드록 드 디오니스. 그가 사망했습니다, 폐하.”
그리고 울려 펴진 르베나의 목소리에 크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마법구에서 저절로 손을 뗀 제노스의 손 역시 하염없는 떨림을 담은 채였다.
“이,이게 어찌 된 일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젠픽스가 열리는 곳에서 왕족이 살해당하다니! 어찌 이리 경비가 허술하단 말이오!”
쾅. 쾅……!
거침없이 탁자를 치며 분노를 토해내는 켄느 왕의 노여움에 아무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분노와 그 속에 섞여있는 두려움을 방안에 있는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드록 드 디오니스. 그가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미처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아침 세안물을 가져가던 시녀에게 발견되었다. 그의 시체 주위 가득히 피가 엉겨있었지만 그의 몸 어디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젠픽스에서 왕족들이 지내는 궁의 보안은 더없이 철저했다. 기사들에 의한 보안뿐만 아니라 마를한의 마법사가 쳐놓은 결계로까지 보호받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드록은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무기의 흔적도 또 침입의 흔적도 없이 죽어있었다.
그러니 켄느 왕의 분노와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 계속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자칸 왕이 마를한의 왕, 레턴에게 물었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유파시드께서는 어디 계신 겁니까?”
왕족들은 드록의 죽음을 알게 된 직후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젠픽스에서 왕족이 살해당한 일에 관해 그들 모두의 의견을 모아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중심이 되어야 할 이, 유파시드는 현재 보이지 않았다.
이에 레턴이 말했다.
“유안이라는 자에게 전해 들으니 어제 밤부터 어디를 가셨다고 하는군요. 언제 올지는 그도 모른다고 합니다.”
짤막한 그의 말에 회의실은 다시 한번 침묵에 잠겼다. 그때 사람들을 한 번씩 훑어본 레턴이 여유로운 얼굴로 두 손을 깍지 껴 얼굴 앞,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말했다.
“이번 젠픽스의 호스트를 맡고 있는 마를한의 대표로써 이 일에 대단한 유감을 표합니다.
그리고 왕족의 시해는 어느 왕국이든 간에 반역에 준하는 중죄. 저는 이 일의 범인을 반드시 밝히는 것에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레턴의 얼굴은 범인을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과는 다르게 여유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말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다음이 없으리라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어기에 더욱 그랬다.
“모든 왕국에서 왕족의 호위를 위해 온 기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누구보다 초조한 얼굴로 말하는 켄느 왕의 목소리에 이제껏 잠잠하던 르베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안색은 보기 드물게도 조금 피곤해보였다.
“지금 이곳에 사람을 늘리는 건 자칫 범인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 일이니 자중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대신 불안하시다면 정찰 호위만을 좀 더 늘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드록의 시체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침착한 르베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켄느 왕은 그런 르베나를 보며 화가 난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렇소? 하지만 일단 기사들이 함께 묵으면 범인도 감히 더 나서지는 못할 것 아니오! 무엇보다 르베나 공주는 제 한 몸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여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소! 그런 우리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오!”
켄느왕의 말에 르베나가 다시 올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걱정이시라면 제가 밤에 궁의 보초를 서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사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게 하는 건. 다시 말씀드리지만 좋은 방법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자 켄느 왕이 피식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한테 고작 당신 한 명한테 목숨을 맡기라는 거요? 솔직히 지금 드록 왕자를 죽인 범인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 누구라고 생각 하는거요?”
그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시선이 그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물었다.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켄느 왕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바로 르베나 공주 당신 아니요!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그리 생각할 거요!
평소에도 드록 왕자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데에다 어제 그런 치욕까지 겪었지 않소!
게다가 그대는 마법도 검술도 출중하다고 하니 흔적도 없이 그를 죽이는 것이 무에 어렵겠소!”
켄느 왕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설사 그런 심증이 있다 하여도 한 나라의 후계자이자 공주를 살인자로 몰다니……!
켄느 왕이 나가도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분위기에도 말을 꿋꿋이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공주께서 어젯밤 어디서 뭘하셨는지! 당당하다면 말해보란 말이오!”
켄느 왕의 삿대질에 이제는 하얗게 얼굴이 질린 그의 아들, 호안 왕자가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
“아,아바마마.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을 의심하는 건…….”
“닥쳐라! 네가 지금 르베나 공주를 편들 때 인줄 아느냐? 드록 왕자의 다음으로 너나 스릴 공주 같은 힘 없는 후계자들이 또 표적이 될지 어찌 아느냔 말이다!”
켄느 왕이 윽박지르자 호안 왕자는 어깨를 움찔 떨며 고개를 움츠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지목된 스릴 공주가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켄느 왕에게 말했다.
“왜 저와 호안왕자님이 다음 표적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르베나 공주님은 기사에요!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누군가를 해칠 분이 아니시 라고요!”
스릴 공주의 말에 켄느 왕이 비석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스릴 공주님께서는 순진하셔서 그리 믿으시는 것일 뿐입니다. 오랜 시간 당한 치욕과 모욕을 쉽게 잊는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에게 상대방을 흔적도 없이 없앨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더욱 그렇지요.”
켄느 왕의 말에 회의장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레턴은 내내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겨우 숨기며 이들을 보고 있었고 바흐란은 무엇인가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르베나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할 말은 다 하셨습니까?”
“뭐… 뭣?”
할 말 다했으면 그만 닥치라는 듯한 르베나의 말에 켄느 왕이 불쾌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차 르베나는 어떤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맞습니다. 저와 드록 왕자는 오랜 기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제게 치욕을 준 사람을 쉽게 잊고 쉽게 용서할 만큼 관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말처럼 제게는 그런 사람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힘도 있지요.”
르베나의 붉은 눈이 켄느 왕의 금안을 직시했다.
하지만 왜일까……? 방금 르베나의 말이 그를 향한 충고라고 느껴지는 것은.
르베나는 곧 그를 바라보던 무감감한 시선을 미련 없이 돌리며 다시 말했다.
“무엇보다 제가 그와 디오니스에 함께 있었던 십 구년의 시간이라면 그를 여러 방법으로 백번, 천 번을 죽이고도 남을 시간이죠.”
무감각하게 던져진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찌 저리 무섭고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단 말인가……!
하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아무 감정의 편린 조차 담기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제가 그를 해치우고자 했다면 굳이 젠픽스까지 와 까다로운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곳으로 올 때 만난 몬스터에게 당했다는 것이 더 그럴 듯 하겠군요.”
르베나의 말을 끝으로 켄느 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뱉은 지금의 말이 어쭙잖은 변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담담히 읊조리는 진실, 그대로의 날 것임을 그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자리한 모두가 알았다.
“하아…….”
답 없는 누군가의 깊은 한숨 소리가 조용한 회의장을 묵직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르베나 역시 오랜만에 느껴지는 피곤함에 잠시 제 눈을 길게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