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96화 (96/276)

9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5)

“뭐, 뭐라 지껄인 것이냐!”

드록의 놀란 외침에 르베나가 그를 보며 다시 또박또박 내뱉었다.

“네 더러운 입을 꿰매버리기 전에 닥치라고 했다.”

사아아--!

만찬장에 한번 더 릿발 같은 침묵이 지나갔다. 만약 드록이 한 것과 같은 모욕을 받는다면 누구든 눈물을 터뜨리거나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움을 느껴 자리를 당장 박차고 나갈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울지도, 공식적으로 자리를 파했음에도 이곳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드록에게 친절히 경고를 날려주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뻐끔거리는 드록에게 르베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주보는 그녀의 눈동자 깊이 선연한 분노가 피어오름을 드록은 알아챘다.

“어디까지 제노스 전하의 얼굴에 먹칠을 해야 속이 풀리겠나. 지금 너의 그 멍청한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우리 디오니스가 얼마나 우스워 지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가.”

르베나의 말에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자 드록이 수치스러움에 흥분해 더 크게 외쳤다.

“버릇이 없구나, 르베나! 감히 숙부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무리 근본 없이 자랐다고는 하나 여기는 다른 왕국의 왕족들도 계신 자리인데! 정말이지 천박하기 이를 데 없구나!”

방금 전까지 본인의 행동은 일도 생각 않는 드록의 말에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웃는 순간 머리에 있던 티아라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숙부? 정말 웃기는군. 난 태어나 단 한 번도 너 같은 멍청이를 내 숙부라고 생각한 적 없다.

드록 디 디오니스. 도대체 네가 왜 여태껏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르베나의 몸에서는 어떠한 마력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드록의 앞에 서 있는 그녀는 온통 순백의 드레스를 입어 청초했다. 하지만 르베나의 눈을 보면 그녀는 마치 차가운 얼음에서 막 피어난 여왕과도 같아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조금의 티끌조차 묻지 않아 순수해보였으나 어떠한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는 듯한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모습 이어서일까.

르베나의 입에서 뱉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듣는 드록의 몸은 점점 체온이 내려가는 듯 차가워졌다.

꿀꺽. 침이 삼켜지고 덜덜. 몸이 떨려왔다.

“그, 그거야 나는 디오니스의 하나뿐인 와, 왕……!”

“아니. 아니다, 드록 디 디오니스. 네가 여태껏 살아 있는 이유는.”

드록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댄 르베나의 붉은 눈이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불타올랐다. 일렁이는 그 눈빛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자 덜덜 떨리던 차가운 몸이 한순간에 불덩이에 내던져진 것처럼 뜨거운 것만 같은 착각에 시달렸다.

“내가 널 살려 두기로 결 정 했 기 때문이다.”

쿵.

르베나의 말에 드록의 눈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절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마치 이 세상 깊숙이 숨겨진 금단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드록의 온몸이 공포감에 휩싸여 굳어갔다.

머리는 르베나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는데 사정 없이 뛰는 심장소리와 축축 하게 젖은 두 손이, 그리고 곧 기절해버릴 듯한 온몸이 무거운 진실을 말하 듯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런 드록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르베나의 머리에서 사르륵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순간 약간 사선으로 기울인 르베나의 모습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차디찬 여왕 같았고 드록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떤 자리에 위치한 존재같았다.

“그러니 드록. 잘 들어.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면 앞으로는 그 눈을 내리 깔고 그 입을 닥치고 그렇게 살아야 할 거야. 이게 내가 너에게 주는 같은 핏줄로써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언이야.”

르베나의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 드록을 한 번 더 바라본 르베나가 얕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으나 그만큼 위험해 보였다.

지독한 가시에 둘러싸인 탐스러운 장미. 그 장미를 건드리면 내 손이 얼마나 처참하게 그 가시에 짓이겨질지 드록은 비로서 깨닫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드록의 고개가 스르륵 아래로 향했다.

마력도 검술도 아닌 모습 그대로의 르베나에게 이 순간 드록은 완전히 패했다.

르베나는 눈앞에 고개 숙인 그의 모습을 어느새 싸늘하게 변한 두 눈에 담아내고는 미련 없이 만찬장을 떠났다.

또각또각.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라인에 따라 움직이는 드레스의 선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식적인 만찬은 끝났고, 드록의 시궁창 같은 입도 끝냈으니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 언니 너무 멋있어……. 하아……!”

디저트 스푼을 입에 물고 몽롱하게 중얼거리는 스릴 공주의 작은 말이 차갑게 식은 만찬장의 테이블 위 작은 숨이 되었다.

루드바하는 떠나가는 르베나의 뒷모습을 보다가는 더없이 차가운 눈길로 홀로 의자에 앉아있는 드록을 바라보았다. 그 옆의 레턴은 더 깊게 패인 미소를 기쁘게 베어 물고는 이미 사라진 르베나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고 있었다.

그리고.

발갛게 물들인 얼굴로 힐끔힐끔 르베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안 왕자가 그만 스릴 공주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순간 호안 왕자를 바라본 스릴 공주가 화사하게 웃으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언 니 는 내 거 야.’

스릴 공주의 입 모양을 읽은 호안 왕자는 마치 큰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귀까지 빨개져서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젠픽스의 첫 번째 일정, 왕족들의 만찬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달칵.

어두운 방에 순백의 드레스가 들어섰다. 방문을 닫고는 달빛이 조그맣게 새어드는 방 안에서 얕게 숨을 내어 쉰 르베나에 몸에서 옅은 마력의 파장이 불안하게 새어나왔다.

아마 마력이나 신력의 기척을 귀신같이 읽어내는 아한이 곁에 있었다면 말 없이 다가와 르베나의 몸을 제 작은 몸으로 안아주었을 정도로 지금의 르베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불안정했다.

“미천한 신분의 계집.”

“일국의 공주가 수치도 모르고!”

“가련하고 불쌍한 공주… 르베나…….”

드록이 내뱉은 더러운 말들이 르베나의 머릿속을 거칠게 헤집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해 날뛰던 마력들이 르베나가 방안에 들어서자 마자 조용히 흘러나왔다.

분명 르베나는 이전의 삶, 그 마지막을 확인한 이후 본인을 향한 조롱과 모욕에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그럼에도 오늘 들은 드록의 모욕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이 르베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르베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새어나오는 마력을 이렇게 홀로 어두운 밤에 풀어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풀썩.

거칠게 침대에 누운 르베나의 눈이 가만히 천장을 향했다. 정교하고 세밀한 음각이 두드러진 천장의 어느 곳에 곧 그녀의 멍한 시선이 고정되었다.

‘미혼모로 죽어 불명예를 남긴 일국의 공주.’

‘끝내 남자를 밝히지 못한 그녀의 비밀.’

‘불길한 붉은 눈을 남긴 디오니스의 적폐.’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한 사람이 생각났다. 아마도 디오니스에서 르베나만큼 더러운 수식어가 많은 여자는 이 사람뿐일 것이라 생각하며.

루아나.

두 번째 같은 삶을 살아감에도 조금도 생각나지 않는 그녀의 어머니라는 그 이름만이 어쩐지 르베나의 머릿속을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한번도 보고싶다 생각한 적 없었다. 한번도 그립다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번도 그녀가 불쌍하다 느낀 적 없다.

그녀의 결정으로 인한 고통은 모두 어린 르베나가 당해야만 했고 이제는 그마저 별 감흥없는 과거가 되었다. 제노스 왕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보이는 작은 액자 속 그녀의 모습에도 르베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루아나. 르베나를 보고 있느냐…….”

그저 아주 가끔 르베나와의 저녁을 먹고 난 제노스가 혼자 방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를 찾는다는 건 알았다. 그도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사실뿐. 그 순간에 느껴진 아주 별로인 기분을 그녀는 제노스 왕의 눈물 때문 일 거라 치부했다.

“…엄… 어 …머니.”

피식.

아주 조그맣게 평생 불러본 적 없던 단어를 입에 담은 르베나의 얼굴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지금 제가 뭘 하고 있나 싶었다.

그렇게 르베나는 태어나 처음, 정의할 수 없는 찝찝하고 무거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다고만 느껴지던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밤 새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은 루아나라는 세 글자가 지독히도 생소하고 지독히도 아픈 기분이었다.

그리고 샛별이 그 빛을 잃어갈 이른 새벽 겨우 잠이 든 르베나의 눈가에서는 그녀도 알아채지 못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한 방울의 눈물조차 그녀가 알지 못하게 떠오르는 태양에 져버리는 샛별과 함께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꺄악! 살, 살려주세요!”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번쩍. 르베나가 눈을 떴다. 뭔가 평소랑 달리 눈이 잘 떠지지 않는 느낌이 잠시 생소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시녀의 비명 소리에 그녀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사르륵.

제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움직이는 느낌에 제 몸을 본 르베나가 순간 놀랐다. 그녀답지 않게 전 날 드레스 차림으로 잠 든 탓이었다.

“누,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예민한 르베나의 청각에 들려오는 시녀의 비명에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여긴.”

곧 그녀가 문제의 방 앞에 당도하자 쏟아진 유리컵 앞에 주저앉아 창백하게 질린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엄청난 피웅덩이 속에 눈을 뜬 채 누워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드록 디 디오니스.

그가 젠픽스 이틀 째 아침, 차가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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