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4)
꿀꺽.
호안 왕자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놀라울 만큼 완벽한 정적이 자리를 지키는 만찬장에서는 오직 짙은 미소를 지은 드록의 표정만이 돋보였다.
그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그만큼 르베나의 소문은 모든 왕국에서 암암리에 유명했다.
베이라의 왕국, 디오니스에서 태어난 역대 최강의 베이라 공주. 그런 공주의 출신 배경도, 어린 시절 말도 안 되는 학대 이야기도. 한 베이라와의 전투 이야기도,
다른 공주와는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한 기사가 된 후의 이야기도.
르베나의 이야기는 때론 어떤 위대한 영웅의 일대기처럼 때론 어떤 사람들의 심심한 안주거리처럼 바람을 타고 조용히 퍼져나갔다. 게다가 다른 왕국의 수장인 이들 중 그녀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국의 공주를 이 정도로 짓뭉개는 드록의 말에 경악하면서도, 호기심과 긴장감이 섞인 눈빛들이 그녀를 향했다.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왕의 손녀.’
‘불길한 마력을 가득 타고난 베이라.’
‘어린 나이에도 살인을 한 잔혹함을 지닌 공주.’
‘기사의 길을 선택한 공주.’
그리고 검기란 미지의 영역을 만들어 낸 여기사. 정해진 그대로의 길만을 살아온 왕족에게 그녀야말로 미지의 존재였고 알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켄느 왕은 이렇게 공개적인 모욕을 당한 그녀의 반응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드록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모두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르베나는 무거운 손을 움직여 들었던 디저트 스푼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드록을 향해 고저 없는 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이곳은 디오니스에 있는 왕자님의 사사로운 장소가 아닙니다. 말씀을 가려 하시죠.”
르베나의 말에 레턴의 선홍빛 눈에서 이채가 스쳐 간 순간이었다.
흔들림 없는 감정. 고저 없는 목소리. 동요 없는 표정.
이런 모욕을 받아도 디오니스의 공주, 르베나는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점잖게 드록 왕자에게 가만히 충고를 건넬 뿐이었다. 정말 르베나의 목소리만 들으면 방금 드록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 꼭 르베나가 아닌 타인인 것만 같을 정도로 그녀는 멀쩡해 보였다.
이게 너무 새로워서 이게 너무 신선해서 마를한의 왕 레턴의 얼굴에 지어진 미소가 더 길어졌다. 하지만 드록은 정말이지 끝을 모르는 머저리였다. 그는 항상 언제 시작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았지만 언제 끝을 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난 너를 걱정하고 유파시드께 사과를 전한 것뿐이란다, 르베나. 그리고 너도 이참에 네 주제를 똑똑히 알아야지.”
드록은 제 어깨를 잔뜩 펴고 거들먹거렸다.
“여기에 이렇게 꾸미고 나온 너의 마음이 뭔지 나는 다 안단다. 여기에는 수많은 다른 왕국의 왕족들이 있으니 어느 한 분의 마음이라도 가지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르베나, 똑똑히 보렴.”
거들먹거리는 그의 고개가 주변을 슥 돌아보는 모습은 무척이나 천박해 보였지만, 정작 드록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곳에 네가 설 곳은 없어. 난 너를 아끼는 만큼 네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란다. 네가 헛된 기대에 실망하는 모습을, 숙부인 나는 보고 싶지 않거든.”
드록은 단번에 르베나를 왕족 하나 꿰어차고 싶은 우스운 여자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그런 드록의 말에 왕족들이 흠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도를 갖은 귀족이나 왕족은 수없이 많다. 더군다나 젠의 황제인 루드바하나 수려하고 매혹적인 마를한의 왕 레턴 앞에서라면 평소 점잔을 떠는 귀족가의 여식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설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더군다나 왕족들은 절대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런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망신 주지 않는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그것이 어릴 때부터 그들이 교육받은 그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인 르베나에겐 방금 드록의 말이 더욱 수치가 될 것이라 생각되자 모두들 이제는 호기심을 떠나 이 자리를 뜨고만 싶었다.
어떠한 말로도 또 어떠한 행동으로도 길이길이 수치로 남을 디오니스의 집안싸움에 굳이 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불편한 공기가 계속 팽배해지자 루드바하가 입을 연 것이다.
말을 꺼내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차갑게 굳은 얼굴만이 존재했다.
“여기서 나눌 대화 주제는 아닌 것 같군요. 게다가 드록 왕자님, 저는 르베나 공주를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루드바하의 목소리는 얼핏 부드럽게 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오히려 긍정적이지 않은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검을 든 그녀를 존경합니다. 이 점만은 확실히 하고 싶군요. 나를 빗대어 그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루드바하의 말에 순간 켄느 왕의 얼굴에 불쾌함이 서렸다. 지금의 발언은 조금 위험하다.
제국의 황제가 미혼의 여성인 타국의 공주를 존경한다니. 괜히 드는 생각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질 찰나 루드바하는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했다.
“또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희생되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의 피를 뿌리고 자신의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들은 그녀를, 르베나를 모욕할 자격이 없습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말투였지만 루드바하의 벽안은 어느 때보다 뜨거운 분노로 타올랐다. 그리고 그걸 고스란히 확인한 드록이 제 입술을 이로 짓눌렀다. 방금 그 말은 누가 들어도 드록 본인을 향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 능력도 없는 너는, 적어도 그런 너는,
그녀를 모욕할 자격이 없다고.
“하아…….”
이내 이런 상황들에 권태가 느껴지는 르베나가 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녀는 정말 드록에게 장단을 맞춰 줄 의향 따위는 없었다. 드록이 입을 열 때마다 호사가들의 입에 전해질 말들이 한 움큼씩 쏟아지는데, 르베나가 장단을 맞추면 말 그대로 국제적인 망신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통제 안 되는 멍청이 하나가 있는 것과 집안 모두가 멍청한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하지만 더 이상 드록의 뚫린 입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이미 돌이킬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디오니스는 충분한 망신을 받았고 이대로 드록을 계속 놔두는 것은 디오니스를 더 우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르베나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루드바하의 말에 자격지심을 들키고 만 드록은 여전히 끝날 때를 모르는 머저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죠. 그렇게 노력을 했다면 르베나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전 안타까울 뿐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아직 어린 조카가 노력과 훈련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여성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휘두르니 말입니다. 디오니스의 훌륭한 기사들이. 그런 추잡한 제 조카의 유혹에 넘어가 긍지와 의지를 버리고 만 것이… 말입니다.”
드록의 이어진 말에 스릴 공주가 헉.하고 숨을 들이셨다. 돌려서 말했지만, 여기에서 제일 어린 스릴 공주마저 드록이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성을 가지고 사람을 휘두르다니. 정말 이제는 드록 왕자가 정신줄을 놓았구나 싶을 정도의 말에 스릴 공주는 놀라고 말았다.
르베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스릴 공주는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자칸의 여성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마저 주저 없이 내걸었던 그녀를 직접 보았으니.
하지만 드록의 말을 들으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너무도 자극적인 소재의 말은 르베나를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미지를 안 좋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했으므로. 그리고 드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흐란이 분노 어린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드록에게 외쳤다.
“무례하군! 감히 누구한테 그따위 막말을……! 르베나 공주는 우리 자칸의 은인이요! 나의 은인에게 그따위 말을 하다니. 그대의 멍청함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군!”
바흐란의 얼굴에서 짙은 불쾌감이 스쳐 지났다. 그는 여차하면 드록을 베어 넘기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를 말려야 할 스릴 공주마저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드록에게 외쳤다.
“맞아요! 르베나 공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한번 본 적도 없는 자칸의 여성들을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건 은인이라고요! 제 평생 르베나 공주님처럼 멋진 여성은 본 적이 없어요! 근데 그런 분을 모욕하시다니! 드록 왕자님은 정말이지 못된 분이군요!”
드록은 예상치 못한 이들의 반격에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켄느 왕국의 사람들과 레턴마저 조금은 놀란 눈으로 바흐란과 스릴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드르륵- 의자가 뒤로 당겨지는 소리가 나더니 르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드록을 방관할 수는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멍청이 하나 때문에 모두의 화합을 위한 이 만찬 자리가 우스운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르베나의 몸짓은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는 여전히 왕족의 우아함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을 연무장에서 살아온 기사이기보다 평생을 궁에서 살아온 왕 같았다.
그 위엄과 카리스마가 주는 모습에 모두가 상황을 잊고 그녀의 자태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루드바하를 바라본 르베나가 조용히 양해를 부탁했다.
“유파시드님. 그리고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부족함으로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여기서 더 양해를 구할 수 있다면 만찬자리를 이만 파했으면 합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식사는 이미 끝난 지 오래입니다. 당연히 동의합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제발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나길 소망한 켄느 왕국의 왕도 뒤따라 말했다.
“동의합니다.”
그러고는 드록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던 자칸의 왕 역시 말했다.
“동의하오.”
“저도 동의합니다. 드록 왕자님께서도 휴식이 필요한 듯 하니.”
마지막으로 마를한의 왕 레턴 역시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을 내뱉는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굉장한 불쾌감을 느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처음으로 그가 드록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순간이었다.
젠픽스의 시작을 알리는 만찬장에서의 대화는 서기관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진다. 그렇기에 방금 드록의 말들도 대대손손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르베나가 드록에게 제제를 가한다면 그것은 디오니스의 더 큰 치욕. 그렇기 때문에 르베나는 서둘러 공식적인 자리를 파한 것이다.
모두의 허락이 떨어지자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한 르베나가 또각또각 걸어 이 모든 상황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는 드록에게로 향했다. 서기관과 모든 시종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고 켄느의 왕 역시 가족들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반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드록을 향해 한 걸음씩 옮기는 르베나가 가까워질수록 드록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마치 눈앞의 공포를 떨치려는 듯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뭐, 뭐 어쩔 건데! 이렇게 다른 왕족들이 있는 데에서 나를 또 공격하기라도 할 건가! 응?”
소리를 지르는 드록을 보며 르베나가 어느새 그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조용히 뇌까렸다.
조용히 입술을 여는 르베나의 자태는 여전히 매혹적이고 아름다웠으며 왕족의 배움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타고 전해진 음성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닥쳐라. 그 더러운 입을 꿰매 버리기 전에.”
자리를 뜨려던 켄느 왕이 경악한 눈으로 어쩡쩡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기도, 벌떡 일어나 나가기도 애매한 상황에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의 갈등만큼이나 번진 서늘한 스산함은 어느새 만찬장의 공기를 가득 메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