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94화 (94/276)

9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3)

달그락, 달그락.

비록 친분을 위한 만찬 자리였지만 그들은 모두 뼛속까지 왕족이었다. 누구 하나 식사예절에 어긋남 없이 최소한의 소리만이 나는 만찬장의 분위기는 절제되었지만 부드러웠고 조용했으나 적막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옅은 미소로 각 국의 왕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루드바하와

간간이 농을 던지며 웃음을 자아내는 레턴의 궁합이 퍽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릴 공주가 던지는 질문이나 말들은 그녀의 활달한 성격 덕에 언제나 격식을 따지는 그들에게 신선하고 귀여워보였다.

단 하나의 문제를 빼면 제국 선포 이후 모든 왕국이 참여한 젠픽스의 첫 번째 만찬은 정말이지. 성공적이었다.

“르베나, 나이프질을 누구한테 배운 거냐. 손의 각도가 정말이지 못 봐주겠구나.”

정말로 숙부 코수프레를 할 작정인지 드록이 계속해서 르베나를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정말로 손 윗 사람이 제 아랫 사람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것 같지만 이 만찬장의 어느 누구도 드록의 저의를 모르지 않았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나이프를 든 르베나의 손은 모법적인 왕족의 예법 딱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멈칫.

드록의 말에 순간 나이프 든 손을 잠시 멈춘 르베나의 붉은 눈이 드록을 향했다. 벌서 몇 번째 르베나를 지적하는 그의 행동에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다.

“하아…….”

하지만 이곳은 디오니스가 아니었다. 아무리 드록이 거지 같더라도 여기서 그를 힐난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국 다른 왕국의 앞에서 디오니스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밖에 되지 못한다.

그래서 르베나는 참기로 했다.

르베나가 지키고 싶은 것은 디오니스와 그 백성들이었다. 르베나는 진심으로 디오니스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고작 이런 덜떨어진 녀석 때문에 그런 디오니스의 이미지를 망치는 일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드록 하나 바보 만드는게 더 나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드록을 상대하기가 귀찮은 게 가장 컸다.

작게 한숨을 쉰 르베나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포크를 들었다.

‘똥은 언제나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르베나. 근데 저 똥은 멀리서도 보기가 힘든 똥이네’

드록이 앞을 지나가면 제 귓가에 속삭이던 아를의 목소리가 실시간으로 지원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드록은 망설이지 않았다.

“르베나. 포크를 쥐는 공주의 손가락이 그렇게 투박해서야… 쯧쯧.”

각종 훈련으로 일반적인 여성들보다 굳은살도 많고 잔뜩 거칠어진 르베나의 손을 보며 드록이 혀를 찼다. 그러자 포크를 쥔 르베나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사이, 처음으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드록 왕자님. 왜 자꾸 르베나 언니… 아니 공주님을 지적하시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르베나 공주님의 나이프 쥐는 각도는 완벽했어요. 게다가 공주님의 손은 공주님의 노력을 나타내는 거잖아요. 아무 일도 안하고 마냥 곱기만 한 손보다 훨씬 멋진 손인데.

그렇게 말하시니 듣는 제가 다 마음이 아파요 히잉…….”

할 말은 다하면서도 마지막에 곧 울 것처럼 눈물짓는 스릴 공주의 모습에 드록이 잠시 멈칫했다. 그가 아무리 르베나를 싫어해도 그도 일국의 왕자였다.

딸을 끔찍이 아끼기로 유명한 자칸 왕의 앞에서 그 딸을 울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물론 멍청하지 않다는 건 본인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게다가 스릴 공주는 꽤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스릴이 그의 신붓감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드록은 굳이 그녀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았다.

곧 드록이 일부로 당황한 얼굴을 그려내며 말했다.

“스,스릴 공주님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군요. 저 역시 우리 르베나의 손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곳에 다른 분들이 어떻게 보실지 몰라 미리 얘기를 한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드록은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려 스릴 공주를 마주보았다. 그도 그의 외모가 꽤 괜찮다는 것을 익히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꽈악.

하지만 포크를 쥐고 있는 르베나의 손에는 더한 힘이 가해졌다. 드록은 지금 마치 르베나를 위하는 척 하면서 르베나의 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그녀의 손을 보게 하기 위해서.

물론 르베나는 본인의 손이 부끄럽지 않았다.

비록 다른 여자들처럼 보드랍고 예쁜 손은 아니었으나 르베나의 손은 디오니스의 백성들을 지키는 손이었으니. 절대로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귀품을 중요시하는 다른 왕족들에게 르베나의 손은 그저 보기 흉한 이단아의 손일 뿐 일 것이고 또 그걸 악의적으로 지적하는 드록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줄 만큼 그녀는 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르베나가 나서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드록 왕자님.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르베나 공주님의 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주의 몸으로 백성을 지키고자 검을 든 그녀를 오히려 멋지다고 생각하죠.”

루드바하의 말이 이어진 것이다. 이에 드록이 제 이를 악 물었다.

‘저 자식이 왜 안 끼어드나 했다. 망할 놈의 유파시드.’

그러면서도 드록은 어머니인 세나르 왕비가 왕궁을 떠나기 전 그에게 신신당부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파시드는 르베나 그년의 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에게 맞서지 마세요. 꼭 당부합니다. 제발 이 어미의 말을 흘려듣지 마세요, 왕자.”

세나르 왕비가 왕궁을 떠나게 된 원인에 루드바하가 있다는 것을 드록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먼저 물러섰다.

루드바하를 자극하는 것은 나중이니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군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유파시드.”

드록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는 묵묵히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접시에 시선을 돌린 그의 눈은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젠의 유파시드, 거기에 자칸의 공주까지. 도대체 저 버러지만도 못한 계집애가 어떻게 사람들을 구슬렀나 궁금할 뿐이었다.

씨익.

하지만 드록은 곧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르베나의 모습을 지적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그걸 누군가 방해한다면 방향은 바꾸면 되기 마련이다.

루드바하의 말 이후 드록은 잠잠해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오랜만에 열린 젠픽스에 대한 기대와 각국 기사들에 대한 얘기까지.

그들이 나눌 가볍고 기분 좋은 주제는 적지 않았다. 르베나는 대화에 많이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모든 대화에 귀를 기울였고 디오니스나 아벨디온의 이야기에는 필요한 답변만을 적절하게 내놓았다.

그리고 점점 사람들은 르베나의 말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녀가 내놓은 이야기들은 많지 않았지만, 결코 대충 흘릴만한 것도 아니었다. 미지의 영역, 검기를 사용하고 착안한 베이라이자 검사인 그녀의 이야기는 다른 왕국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저마다 그에 대한 어떤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탓이었다.

그리고 드록은 당연히 이런 만찬장의 분위기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드록의 귀에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유파시드의 나이가 적지 않으신데, 아직도 황후 되실 분을 들이지 않으시니. 혹시 따로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으신 걸까요?”

단순히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건 자칸의 왕이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남성인 루드바하가 벌써 스물네 살이다.

늦어도 스무 살 전에는 약혼을 하는 보통의 왕족에 비하면 그는 이미 노총각 수준이었다. 그래서 모든 왕국은 젠 제국의 황제가 된 그가 맞이할 반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다는 듯 질문을 들은 루드바하가 가볍게 답했다.

“글쎄요. 아직은 여유가 없군요. 언젠가 좋은 인연이 있다면 생각해 볼 일인 것 같습니다.”

적당한 그의 대답에 자칸의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보통 유파시드들께선 넘치는 신력으로 인해 다른 이를 마음에 품는 게 힘들다 알고 있으니 전적으로 폐하의 마음에 달린 일이시죠.”

보통 이런 질문은 그에게 본인의 딸을 선보이고 싶은 귀족들의 질문이었지만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그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역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말처럼 신의와 정의를 중요시하는 세츠들은 신력이 높을수록 이성 간의 사랑에 무뎠다. 그래서 역대 유파시드 중 정치적 이유가 아닌 사랑으로 여성과 혼인을 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다만 이 기회를 놓치기 싫은 드록만이 얼른 이 틈을 타 말을 꺼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유파시드여. 혹시 여기서 괜찮은 신부감을 찾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들려온 드록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라니……? 이 자리에 있는 여성이라고는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된 스릴 공주와 르베나 뿐이었다. 물론 열다섯 살이면 왕족에겐 충분히 결혼이 가능한 나이였지만 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를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의문을 담고 쏟아졌다.

그때 약간은 불쾌감을 얹은 켄느 왕국의 왕이 말했다.

“여기서라니요. 방금 유파시드의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직은 혼인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아무래도 디오니스의 왕자께서는 신중치 못한 구석이 있는 것 같군요.”

이곳에 혼인이 가능한 여성이 없는 것은 켄느 왕국과 마를한이었다. 그러니 혹여라도 왕국의 이득을 위해 드록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이라면 들이밀 여식이 없는 켄느와 마를한에게는 불리한 일이었기에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은 켄느 왕의 목소리가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를한의 왕, 레텐은 그런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길게 늘어 뜨린 미소로 상황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드록이 제 수려한 얼굴에 짙은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인연은 가까운 곳에 있다기에 드린 말이었는데 제가 실언을 했군요. 가만히 생각하니 이곳에 유파시드의 반려로 적당한 이는 없는 것 같군요. 일단 스릴 공주님께선…….”

드록의 부드러운 미소가 스릴 공주를 향했다.

하지만 스릴 공주는 저를 바라보는 드록의 부드러운 미소가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분명 외모는 잘생겼지만 자꾸만 르베나를 괴롭히는 드록이 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록은 여전히 본인이 생각하기에 멋들어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결혼을 하기에는 앳된 귀여움이 있으시니 조금 이른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군요. 그럼 남은 건… 우리 르베나인데.”

드록의 눈이 순간 디저트 스푼으로 뜬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던 르베나를 향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의 눈 역시 그를 따라 함께 르베나를 향했다. 르베나가 순간 느낀 불쾌함에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얼굴 가득 진한 미소를 베어 문 드록이 말했다.

“아아… 이런……!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미천한 신분의 제 조카는… 감히 유파시드의 반려가 될 수 없겠군요. 불쌍한 르베나… 어미인 일국의 공주가 수치도 모르고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애를 배다니……!”

만찬장에 자리한 모두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하지만 드록만은 그의 가벼운 입을 멈출 줄 몰랐다.

“게다가 어린 시절 어수룩하고 어두운 성격 탓에 시녀들에게 학대마저 당했으니… 그렇게 큰 결합을 가진 공주를 데려갈 남자는 없겠지요. 가련하고 불쌍한 공주… 르베나 같으니라고…….”

드록의 말이 안타까움으로 끝을 맺자 곧 싸하게 가라앉은 정적이 만찬장을 감쌌다.

모두들 드록의 말에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말은 모두의 예상을 깰 만큼 비상식적이었으며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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