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2)
밝은 회색에 짙은 푸른색으로 포인트를 준 성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웅장한 크기의 뒤쪽으로는 잘 정돈된 정원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뒤로 보통 연무장의 열배 정도 크기는 되어 보이는 돔 형태의 건물이 있었는데 아마 기사들을 위한 곳인 것 같았다.
한 번에 다 둘러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성의 규모에 기사들은 저마다 넋을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런 기사단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레턴이 말했다.
“버려진지 오래 되었긴 했지만 이번 젠픽스를 위해 우리 마를한에서 다시 정리를 했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레턴의 물음에 르베나가 말했다.
“멋진 곳이군요.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물으니까 답한다. 영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르베나의 대답에 레턴의 입가에 묻은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리고 그런 레턴이 조금은 불편했던 르베나가 이어 말했다.
“기사들과 시녀들이 오랜 여정 끝에 지쳐서 그런데 방을 안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진 르베나의 담백한 말에 아차,싶은 표정을 짓던 레텐이 하하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아, 물론입니다! 제가 또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르베나 공주님과 그… 더럽 왕자님이라고 하셨나요? 그리고 두 분 부단장님은 이쪽으로. 나머지 기사 분들은 제 부하가 따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아무래도 왕족과 고위귀족인 자들과 아닌 자들의 숙소가 나뉘는 모양이었다. 레턴의 말에 그의 옆에 내 말없이 서있던 여성이 나서 다른 기사들과 시녀들을 모두 데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남은 드록이 씩씩 거리며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전 더럽이 아니라 드록입니다!”
여기를 오는 내내 르베나와 아벨디온 기사들의 기세에 눌려 찌그러져 있던 것도 열 받는데
처음 보는 마를한의 왕이 본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니 드록이 버럭한 것이다.
사실 이제 젠픽스에 도착했고 자신은 엄연히 디오니스의 하나뿐인 왕자이니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르베나를 볼 때와는 달리 마치 하찮은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한번 바라본 레턴이 누가 보기에도 꽤 선심 쓰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버럭 왕자님.”
“이……!”
또다시 잘못불린 이름에 드록이 발끈하려 했지만 당사자인 레턴은 이미 등을 돌려 르베나와 다한, 아를과 함께 멀어진 후였다.
그렇게 디오니스의 일행들이 도착한 다음날 아침, 켄느 왕국의 일행이 도착했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자칸에서의 일행이, 마지막으로 다음 날 아침 젠에서의 일행이
도착하는 것으로 젠픽스에 와야 할 모든 이들의 도착이 끝났다.
젠이 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처음으로 다섯 왕국이 모두 참여한 젠픽스에서의 첫 만찬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성의 규모만큼이나 만찬장의 크기도 남달랐다. 귀족가의 만찬장보다 훨씬 큰 장소는 왕의 별장답게 보통의 왕궁에 존재하는 만찬장과 비슷한 크기를 자랑했다. 큰 규모의 만찬장 가운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고급스럽고도 긴 식탁이 놓여있었는데 성인 오 십 명 정도가 앉아도 충분한 크기와 길이었다.
식탁의자 역시도 푹신하고 편안한 쿠션감을 갖추었으나 품격을 떨어뜨리지는 않은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오늘의 만찬은 젠픽스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자리로 각 왕국의 왕족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전통에 따라 각 왕국의 왕족들은 최대한 귀품 있고 멋있게, 또 우아하고 아름답게 꾸민 모습으로 하나 둘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자칸의 왕을 위시한 바흐란과 스릴 공주가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까무잡잡하고 건강한 피부와 맑고 짙은 녹안을 빛내는 가족의 모습은 유독 흰 피부를 가진 마를한 시종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또 날렵한 자칸의 자칼을 연상시키는 건강하고도 매력적인 외모나 분위기의 일가족은 한데 뭉쳐있자 더욱 빛이 났다.
하지만 만찬장에 들어선 바흐란과 스릴 공주는 모두의 관심은 고사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아직 안 오신건가?”
이어서 켄느 왕국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옅은 갈색 머리에 금안을 가진 켄느 왕국의 왕은 말수가 없고 점잖지만 굉장한 고집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금발에 옅은 하늘색의 눈을 가진 왕비가 있었는데 그녀는 누가 보기에도 아름다웠지만 굉장히 기운이 없고 여린 느낌이 강해 일국의 왕비라고 하기 에는 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그들의 아들이자 켄느왕국의 유일한 후계자, 호안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부모의 좋은 유전자만 빼내온 것처럼 화려한 금발에 금안을 가진 호안왕자는 본인의 외모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을 만큼 화려하고 깨끗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열 여덟살이 된 호안 왕자는 나이보다 훨씬 여린 체구와 앳된 얼굴을 하고 있어 화려한 외모와는 상반되게 소심하고 수줍은 모습으로 보였다.
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스릴 공주의 눈빛을 민망해하며 계속 피하는 모습만 해도 호안 왕자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칸의 왕과 인사를 나누는 켄느 왕국의 왕은 그런 자신의 아들이 상당히 못마땅한지 연거푸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젠의 황제 루드바하와 마를한의 왕, 레턴이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그 모습에 만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숨이 멎은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흰색의 예복을 입고 결 좋은 은회색의 머리에 너무 짙어 그 깊이를 알 수도 없는
푸른 눈, 언제나와 같이 옅은 미소를 베어 물은 루드바하는 신이 마지막 자신의 숨결마저
불어넣어 만든 듯한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떠한 결점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의 외모와 보기만 해도 신성함이 묻어나올 것 같은 고결한 이미지는 보는 이의 고개를 절로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레턴은 순백의 루드바하와는 전혀 다른 아우라를 뿜어냈다. 긴 적발을 하나로 묶은 그의 유독 흰 얼굴은 선홍빛의 눈동자를 더욱 부각시켰고 편한 검은 색의 옷을 입은 그는 모든 악마의 상징과도 같은 퇴폐미가 넘쳐흘렀다.
이 세상 가장 고결한 자와 이 세상 가장 타락한 자가 함께 들어서는 모습이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대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듦과 동시에 미묘한 심장의 감정을 계속해서 툭툭 건드리게 하였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것을 훔쳐 보는 것 같으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기묘한 감각.
루드바하와 레턴의 조합은 그런 것이었다. 게다가 둘은 유일하게 다른 가족이 없는 왕족이자 왕이었고 젊은 나이의 왕이었다.
그리고 루드바하와 레턴이 자리에 앉자 마지막 왕국. 디오니스의 르베나와 드록이 들어섰다.
“아… 언니… 최고…….하아…….”
루드바하와 레턴에게 오랜 시간 눈길을 빼앗겼던 스릴 공주가 이번에는 모든 혼을 저당잡힌 듯 들어서는 그녀,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는 스릴 공주만의 일만이 아니었다. 루드바하와 바흐란, 그리고 자못 놀란 듯한 레턴에 이어 수줍음 많은 호안 왕자마저도 제 볼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를 동그랗게 위로 모두 그려모아 묶은 르베나는 깔끔한 헤어스타일 덕분에
작은 얼굴이 더 눈에 띄었다. 새까만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내려오지 않았지만 머리에 꽂힌 아주 작은 티아라가 그 색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주었다.
그리고 작은 얼굴에 붉게 반짝이는, 언제나 시선을 빼앗기면 헤어나올 길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빛을 머금고 선명하게 반짝였다. 옅게 화장을 한 것인지 평소보다 훨씬 결 좋은 피부와 옅은 핑크빛의 입술은 르베나에게선 볼 수 없었던 청초함을 이끌어냈고 순백의 드레스는 르베나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아름다운 곡선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장신구라고는 오직 작은 루비 귀걸이가 전부. 하지만 르베나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분명 얼굴과 옷, 스타일 그 모든 것은 청초하기만 한데 도도하게 빛나는 눈빛과 표정이 자아내는 부조화는 극한의 조화보다 고혹적이었다.
물론 지금 르베나의 모습은 시녀 루의 엄청난 고집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루의 고집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제일 늦게 왔군요. 죄송합니다.”
외모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흘러나온 르베나의 말투에 모두가 환상에서 깨어난 듯 눈을 깜빡였다. 왠지 저 외모에는 지극히 매력적인 여성의 말이 들려와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나오는 말투는 세상 엄격한 기사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극에 자그맣게 더 짙은 미소를 지은 루드바하가 말했다.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그리고 아직 약속시간 전이니 늦은 사람은 없습니다, 르베나.”
다정하게 르베나를 부르는 루드바하의 말에 사람들이 사뭇 놀란 듯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반응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듯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보며 이어 말했다.
“제노스 왕께서 내일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혹 디오니스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염려스럽습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루드바하의 눈에 르베나가 주저 없이 답했다.
“유파시드의 염려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수도에 생긴 일 때문에 급히
국왕의 결제가 필요해 피치 못하게 일정이 미뤄졌을 뿐이라 합니다. 제가 대신해 양해를 구합니다.”
모든 왕국의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굳이 디오니스의 일을 주저리 말할 필요 없었던
르베나의 짤막한 말에 루드바하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베나의 말은 정답이었다. 제노스 왕이 젠픽스로의 일정을 하루 미루는 것은 필시 보통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칫 국내의 일을 경솔하게 다른 왕국에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젠픽스에 늦는 왕의 행동이 자칫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르베나의 말처럼 수도에 관한 일로 국왕의 결제가 빨리 필요한 일이라면 각 왕국의 정상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일임과 동시에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 또한 심어줄 수 있었다.
‘르베나 공주. 정치에는 뜻이 없고 기사의 길만 추구하는 베이라라고 들었는데.
제법 감이 있군.’
르베나를 바라보는 켄느 왕국의 왕이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평가했다. 그리고 이때 르베나의 옆에 공기처럼 앉아있던 드록이 그녀를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의 외모는 꿀 같은 금발에 탐스러운 호박색 눈이 막혀 아름다웠으나 르베나의 옆에 서 있으니 색이 바래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것이다.
“마치 본인이 무어라도 되는 양 말하기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게.”
작지만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만한 크기의 말. 다분한 악의가 선명히 담긴 드록의 말에 사람들이 의문을 담아 그를 바라보자 드록이 얼른 그려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제 혼잣말이 너무 컸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리고 철 모르는 조카를 걱정하는 숙부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지요.”
드록의 미소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그를 향했다.
‘숙부라…….’
그래.
항렬로 치면 드록은 르베나의 숙부가 맞았다. 하지만 하는 짓으로 보나 사람 됨됨이를 보나 르베나는 단 한번도 그를 자신의 손 윗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아니 피가 섞였다는 것 조차 역겨웠다.
드록 역시 언제나 르베나를 멸시하고 천시하였고 단 한 번도 르베나를 저와 같은 핏줄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본인의 입으로 숙부라니.
아마 이곳에 후벤이나 가스트가 있었다면 드록의 입에서 벌레라도 기어 나온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하지만 르베나는 드록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금세 거두어냈다.
세상물정 모르는 드록이 이 정도 개념 없는 짓을 할 것이란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알지 못했다. 드록의 개념 없는 짓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