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92화 (92/276)

9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1)

“벌써 이별이군요.”

눈앞, 마를한의 국가경계선을 바라보며 칸이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아벨디온 일행과 헤어지는 그의 눈에는 아쉬움 한 조각조차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칸과 루안을 보내야 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그들 모두 칸과 루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둘 모두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데다가 아벨디온 기사단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칸은 정말로 해박한 세상의 지식들로 모자란 기사들의 세상을 채워주었다. 그의 경험담과 지식들은 하나같이 책에서는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들이라 기사들뿐만 아니라 평소 독서량이 많은 르베나와 공작가의 자손으로 수많은 교육을 받은 아를마저도 귀 기울이게 했다.

반면 루안은 칸에 비해 말수가 적기는 하지만 호감이 갈 만큼 준수한 외모와는 다르게 까무잡잡한 피부와 훌륭한 골격의 소유자답게 엄청난 무력을 자랑했다. 이후로도 만난 몬스터들과의 대결에서 루안은 기사들 못지않은 실력으로 큰 전력이 되어주었고 틈틈이 아를, 다한을 비롯한 기사들과 대련을 하며 서로간의 자세와 검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짧은 몇 일 이었지만 금세 정이 들어버린 순박한 기사들의 눈망울에 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희 상단의 본사는 마를한에 위치해 있습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언제든지, 누구라도 찾아오시면 저희 상단은 예를 다해 기사 분들을 모실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한 칸이 작은 명함을 꺼내 르베나에게 주었다.

“제 명함입니다. 아벨디온 기사단은 언제라도 환영하도록 직원들에게 말해놓겠습니다.

부담 없이 언제든 들려 주십시오.”

[아네벨 상회]

칸이 전한 명함은 흰색의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종이에 금색의 테가 둘러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상회의 이름만이 오도카니 써 있었다.

“아네벨… 상회?”

르베나가 명함을 받고 작게 따라 읽으며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르베나의 손에 들린 명함을 본 아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네벨 상회의 주인이십니까? 하…….”

아를의 말에 르베나와 기사들이 의문을 담고 보자 오히려 그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듯 본 아를이 말했다.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도 어떻게 하나같이 아네벨 상회를 모르냐. 지금 대륙을 가장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 눈앞에 있는데.”

그리고 이어진 아를의 말에 칸의 얼굴이 자칫 어색한 미소로 바뀌었다.

“수년 전 마를한에 나타나 마를한 내 거의 모든 시장을 점령하고 이제는 젠과 디오니스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는 상회. 최근에는 엄청난 마법 물품을 대량으로 시장에 풀어놓으며 때아닌 귀족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는 상회. 그게 바로 아네벨이다.”

아를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하나둘 변해 가기 시작했다.

“아……! 혹시 그 신력이 막 나온다는 치유키트를 만든?”

“아! 얼마 전에 루펠 백작이 보여준 마법 팬던트를 판다는?”

아를의 말에 하나둘 기억을 끄집어 내는 기사들이 점점 칸을 보는 눈빛을 달리했다.

당신이 어떤 물건을 원하든, 어떤 정보를 원하든 그것은 아네벨 상회에 있다!’

이 말은 현재 전 대륙의 고위 귀족가를 휩쓸고 있는 가장 핫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무기에 관심이 많은 기사들은 마법 물품뿐만 아니라 마법무기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회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단의 주인이 지금 바로 아벨디온 기사단의 앞에 있는 것이다.

곧 어색한 미소를 한가득 지어보인 칸이 말했다.

“하하. 아를님께서 아신다니 정말 영광이군요.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음… 저희가 길이 바빠 이만 가야겠군요. 꼭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느긋했던 아까와 달리 빠르게 말을 마친 칸이 마지막으로 다소 멍한 르베나를 한번 보고는 빠르게 뒤로 돌아 걸어갔다. 그리고 어쩐지 그런 칸을 바라보는 루안의 얼굴이 사뭇 매서웠다.

“대박……!”

“역시……!!”

“아깝… 아니 엄청나다…….”

저마다 멀어지는 칸과 루안의 뒷모습을 본 기사들이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순박한 그들이기에 칸에게 뭘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무기에 대한 정보 정도는 물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 남았다.

그리고 제 손에 쥐어진 명함을 내려다보는 르베나의 붉은 눈도 어느새 흰색 일색인 종이에서 떨어져 저 멀리 작아진 칸과 루안의 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칸… 아네벨 상회…….’

어쩐지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르베나의 검은 머리칼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길었던 아벨디온 기사단의 여정도 드디어 끝이 났다.

젠픽스가 개최되는 마를한. 드디어 그곳에 다달은 것이다.

칸 일행과 헤어진 아벨디온 기사단은 머지않아 찬 공기가 서려있는 젠픽스 개최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입김이 나요!”

한참 봄바람이 부는 디오니스를 떠나오니 다시 입김이 나는 찬 바람이었다. 이에 신난 듯 말하는 랄프의 상기된 얼굴에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젠픽스다 꼬맹아! 하아……! 내 인생에서 젠픽스에 참가하는 날이 오다니.”

감격에 젖어있는 룬의 말에 랄프가 발끈하며 답했다.

“꼬맹이라뇨! 저, 저도 아벨디온의 정식 기사라고요! 저도 젠픽스에 참가하는데! 꼬맹이라뇨!”

웬일로 발끈하는 랄프가 귀여워 몇 번 더 꼬맹이라고 놀리는 룬의 목소리와 그에 발끈하는

랄프의 목소리가 긴 여정으로 지친 일행에게 생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소란한 일행은 드디어 눈앞에 놓인 커다란 성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성은 여느 왕궁만한 크기로 지어져 그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언제나 기온이 낮은 이곳의 기후에 걸맞게 희색의 테두리로 멋진 문양을 그려내는 입구의 성문은 뒤에 보이는 웅장한 성의 입구답게 장정 열 명은 세워둘 만큼 크고 단단하며 우아한 미적 감각이 엿보였다.

아주 오래전 명망 높은 어느 왕가의 궁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입구부터 시작해 뒤로 뻗어 있는 왕궁은 귀품 있고 웅장했지만 결코 사치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와 진짜 너무 멋있는데요!”

젠픽스가 열릴 곳이라니 멋진 곳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생각보다도 훨씬 멋진 성의 모습에 일행의 얼굴에 약간의 흥분이 섞여들었다.

그리고 그때 성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순간 모습을 드러낸 한 남성의 외모에 일행들, 특히 시녀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길게 흩날리는 적발의 머리는 여느 공주나 귀족 여식들의 것보다 부드럽고 윤기 있게 찰랑거렸다. 그 적발만큼이나 선명하게 빛나는 선홍빛 눈동자는 마치 최고급 보석을 박아놓은 것처럼 선명하고 매혹적으로 빛났다.

훌쩍 큰 키에 호리한 몸의 선이 그가 가진 매혹적인 모습을 사뭇 퇴폐스럽게 까지 보이게 만들었고 가늘게 웃는 눈의 선과 붉은 입가가 그려내는 호선은 더없이 유혹적이었다.

퇴폐적인 매혹미. 그를 이렇게 표현하면 제일 적절할 것 같았다.

뭇 여성들이 침을 꼴깍 삼킬 만큼 매혹적인 미소를 그린 그가 일행을 반기며 즐겁게 말했다.

“마를한의 왕, 레턴이라고 합니다. 디오니스에서 오신 여러분을 저희가 배웅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왕… 이라고?”

디오니스 왕인 제노스도 나이에 비해서는 꽤 늘씬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칸의 왕 역시 그 나이 대에 비해서는 꽤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이 십대 정도로 보이는. 게다가 눈만 마주쳐도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게 만드는 저 색정적인 모습의 남자가 마를한의 왕이라니……!

그의 예상치 못한 소개에 기사단이 얼 빠진 듯한 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의 모습이 익숙한지 온 영혼까지 홀려버릴 만큼 아찔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의 눈이 어느새 일행들을 하나하나 지나쳐 곧 한 사람의 앞에서 멈추었다.

더없이 무표정하고 도도한 모습의 여성.

모든 시녀들의 얼굴이 이미 그 원래의 색을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건만 여전히 무감각한 눈으로 마를한의 왕, 레턴을 바라보는 르베나였다.

그녀를 향해 유독 짙은 미소를 지어보인 레턴이 말했다.

“특히 르베나 공주님. 당신을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마치 한 눈에 반한 것처럼 깊어진 눈을 하고 르베나를 향해 요사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흘린 그가 돌연 표정을 가지런히 하고는 말했다.

“이런, 지치셨을 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군요. 모두 어서 들어오시지요.

마를한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레턴의 말에 모두들 주춤하며 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왕이 직접 배웅을 나오는 것은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레턴은 마치 이들이 올 것을 미리 안 것처럼 몇 대의 마차까지 대동해 성문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일행은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세 무리로 나누어 각자 마차에 탈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마차에는 르베나와 아를, 다한과 드록이 탑승했다. 덩달아 레턴의 왕과 그의 곁을 지키는 한 여성도 함께했다. 이렇게 여섯 명이 타고도 여유로운 마차는 정말이지 컸다.

그리고 성으로 향하는 내내 끊임없이 르베나를 보며 미소 짓는 레턴의 눈빛이 굉장히 부담스러울 만도 한건만 르베나는 내 그 눈빛을 무시하고 창밖을 내다보다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마차 안은 따뜻했지만 먼 거리를 온 르베나의 붉은 입술에서 뽀얀 김이 새어나왔다.

“젠픽스에 원래 주최자가 있습니까?”

르베나가 알기로 젠픽스에는 원래 주최자가 없다. 다만 다섯 개의 왕국에서 담당자를 뽑아 그들이 함께 그 해의 젠픽스를 개최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을 마중 나온 건 마를한의 왕 레턴뿐이었다. 한 왕국의 왕이 그들을 배웅 나온 것도 이해 못 할 일이었지만 그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이라 르베나가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레턴은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한 번 웃고는 말했다.

“젠이 제국으로 선포됨에 따라 젠의 왕, 유파시드께서는 한 나라씩 돌아가면서 젠픽스를 개최하는 것이 어떤가하는 의견을 내셨습니다. 위치는 원래대로 나라간의 경계에서 개최하지만 호스트(손님을 접대하는 주인)가 있는 젠픽스가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마를한의 경계에서 열리는 만큼 저희 마를한이 호스트를 맡았답니다.

그래서 제가 아리따우신 르베나 공주님을 직접 마중 나갈 기회도 얻었고요.”

그의 말에 르베나는 제노스 왕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 마를한의 왕이 직접 배웅을 나온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니

자세한 내막이야 상관없었던 것이다.

무심한 르베나를 보던 마를한의 왕, 레턴은 그녀를 보며 붉은 혀로 제 입술을 쓱 쓸었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건 르베나.

그녀는 본인을 향한 저 집요한 시선을 알면서도 단 한 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를 제외한 마차안의 모든 이들이 레턴의 시선을 불편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그렇게 더 이상의 대화도 없이 침묵 속에 그들의 마차가 멈추었고 그들은 드디어 성의 본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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