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0)
제 1기사단. 그들의 마음에 드리워진 죄책감과 먼저 죽은 동료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력감은 깊었다. 그래서 다른 기사단 어느 누구도 함부로 그들을 말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다시 사람답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르베나였다.
“아, 공주님이 왜 굶고 훈련을 하십니까! 룬 경 공주님 좀 말려 주십시오!”
“공주님! 잠 좀 주무십시오. 저희랑 똑같이 훈련하시면 몸이 상합니다, 제발요!”
제1기사단에 정식 입단한 르베나는 그들과 함께 훈련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처음에는 기사단 모두가 그들과 똑같이 훈련하려는 르베나를 말렸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르베나 몰래 훈련을 했더니 이번에는 그들의 회복을 위해 마력을 쓰기 시작했다.
“하아… 저희가 졌습니다. 저희를 위해 마법을 쓰실 거면 그냥 밥도 열심히 먹고 잠도 잘 잘게요, 공주님.”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덧 기사들은 제 페이스를 찾아갔고 암울함만이 감돌던 제1기사단에도 조금씩 미소와 생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르베나가 하고 많은 기사단 중 굳이 제1기사단을 지목해 입단한 이유를 그제야 모두가 납득했다.
르베나는 쥬라와의 전투가 끝난 그 이후에도 그녀와 함께했던 제1기사단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 떠올린 랄프는 방금 본인의 말이 얼마나 다른 기사들을 아프게 만들었을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니.
하지만 기사단의 막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느 기사단이나 명백하다. 평소에는 선임 기사들의 훈련을 도우며 여러 심부름과 훈련을 하고 전투 시 비상사태를 맞게 되면 미끼가 되는 것이다. 좀 더 실력 있고 좀 더 생존 가능성 높은 기사들의 도피를 위해.
하지만 랄프는 상관없었다.
‘아벨디온이 될 수 있고 르베나 공주님의 동료가 될 수만 있다면, 또 내 우상인 기사님들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고작 일회용인 방패나 미끼가 되어도 좋아!’
한 번도 누구에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랄프는 언제든 그렇게 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이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조금 전, 가젤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아서며 제일 먼저 뛰어든 것이 아벨디온의 막내인 그였지만 랄프는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망설임 없이 방패가 될 겁니다. 주저 없이 미끼가 될 겁니다! 그게 제가 우리 기사단에서 할 몫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랄프의 말에 순간 기사 모두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그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랄프가 어떤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했을지, 그 나름대로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지 그들도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르베나가 랄프의 곁으로 다가왔다. 순간 르베나를 본 랄프의 눈이 다시 떨려 왔다.
‘단장님 앞에서만은… 이런 모습… 정말 보이기 싫은데.’
목을 가다듬고 멀쩡한 척, 괜찮은 척 말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랄프의 어깨에 르베나의 손이 얹어진 것은 그때였다.
흠칫.
놀란 랄프의 눈이 르베나를 향했다.
“랄프.”
고저 없는 르베나의 부름에 랄프가 꽉 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단장님! 죄송… 정말 죄송합……!”
“내가 너를 왜 아벨디온 기사단에 뽑았다고 생각하지?”
평소 감정을 좀 채 드러내지 않는 르베나의 부름에 분명 혼날 거라고 생각한 랄프가 뜻밖의 질문에 잠시 젖어있던 감상도 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답.”
르베나의 짤막한 재촉에 랄프가 아차,하며 눈을 굴렸다. 지금 그의 머리는 슬픔과 감상, 고마움 따위보다 르베나의 말에 알맞은 대답을 하는 것이 더 먼저였기 때문이다.
“빠… 빨라서입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빠르니까… 보통 기사단의 막내는 빠른 사람을 뽑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야… 좀 더 오래……! 미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답이다.”
쿵.
떨어진 르베나의 말에 랄프의 심장이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알고 있다. 차마 그에게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 약한 기사들과는 달리 냉정한 르베나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쯤은.
“랄프, 너는 근력이 약하고 순발력이 좋다. 그리고 기사단의 단장들은 너와 같은 타입을 꼭 막내로 뽑지. 위급한 상황에는 모두를 살리기 위한 발 빠른 미끼가 필요한 법이니까.”
냉정한 줄은 알았지만 단장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말은 더 시렸다. 르베나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뾰족한 검이 되어 랄프를 잔인하게 찔러왔다.
“네, 단장님.”
순간 랄프의 작은 대답에 르베나가 랄프를 쥔 어깨에 힘을 주었다. 마치 그게 랄프의 처지를 비난하는 것만 같아 그는 더욱 땅속 깊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랄프. 너는 내가 고작 다른 기사단의 단장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물어오는 단장, 르베나의 붉은 눈은 여느 때처럼 무감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 서린 미지의 감정은 그 빛을 뚫고 랄프에게로 그대로 뻗어왔다. 그리고 랄프는 더 이상 멀쩡한 척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 빛에 어린 것은 랄프 본인을 향한 르베나의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가치도 없고 검조차 서툰. 의지 하나로 아벨디온이 된 막내에 대한 단장의 신뢰.
울컥.
순간 랄프의 목이 무거운 것에 잠기듯 꽉 졸라지는 것만 같았지만 그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저, 저는… 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단장님은 검사이자 베이라시고 또 본인의 안위보다 다른 이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십니다. 또, 또… 공주님이시면서도 소탈하시고 그런데 너무 예쁘시… 헉……! 아니, 아니 제 말은…….”
르베나가 다른 단장들과 다른 점을 찾으려다 보니 어쩌다 르베나 자랑 잔치가 되어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해버렸다. 그런 본인이 너무 멍청한 것 같아 랄프가 제 입을 꽉 깨물었다.
피식.
하지만 들려온 소리에 랄프의 눈이 놀라 앞을 향했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미소를 담은 르베나, 그의 단장이 서 있었다.
“랄프, 똑똑히 들어라. 네 말대로 너는 근력이 없지만 순발력이 좋다. 그러한 너의 장점은 기사단의 미끼로써 제격이다. 단, 기사단에 미끼가 필요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 기사단에는, 이 아벨디온에는 그런 미끼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그리고 이어 나온 말에 땅 밑으로 꺼졌던 랄프의 심장이 다시 쿵쿵 소리를 내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벨디온은 우리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린 어떠한 상황에서도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죽을 듯이 훈련을 하는 이유는. 백성들을 지키기 이전에 나와 내 동료를 지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랄프. 다시 묻지. 나는 너를 왜 아벨디온에 뽑았을까?”
아까와 같은 르베나의 질문에 랄프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랄프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내뱉기로 했다. 언제나 희망처럼 생각했지만 말도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나무랐던 이유. 희망이자 빛이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망각이라 생각했던 그 이유를.
“저의 없는 근력은 검기로 충당될 수 있기 때문에. 검기로 충당된 힘이 저와 순발력과 만나면… 저도 꽤… 괜찮은… 기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말을 내뱉던 랄프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온몸이 떨려 왔다.
“그리고.”
하지만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랄프는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게 향한 르베나의 눈에 홀린 듯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단장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식이 해박해서… 언제고 꼭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랄프의 말이 끝나자 르베나의 입가에 완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순간 랄프의 심장은 다시 터질 듯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자꾸만 눈가가 붉어지고 목이 메어왔다.
“믿어라, 랄프. 방금 네가 한 말을. 그리고 그 말을 믿을 수 없을 때에는 그런 이유로 널 뽑은 날 믿어라. 우리가 미끼가 될 때는 오로지 우리보다 힘없고 약한 자들을 위해서다.”
르베나의 말에 랄프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네… 흑! 단장님! 절대로 잊지… 흐윽……. 않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단장님의 말씀을… 흑흑… 잊지 않겠습니다!”
온 숲이 다 울리도록 우렁찬 랄프의 목소리와 울음소리에 룬이 크게 웃어 젖히며 말했다.
“랄프 기합 제대로 들어갔는데? 이제 미끼이니 뭐니 그딴 소리 하면 진짜 혼난다?
그리고 웃지 마. 울다 웃으면 너 큰일 나. 장가 못 간다!”
아벨디온 기사들의 웃음소리에 이어 마른 경이 말했다.
“한 번만 더 미끼 소리 하면 그때는 가젤 동굴에 진짜 던져 버릴 줄 알아!”
계속해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공기 속 만연했던 모든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 언젠가 한 번은 꼭 풀고 가야 할 랄프의 문제가 때아닌 곳에서 터져 조금은 당황했던 다한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아를도 작게 중얼거렸다.
“귀찮은 게 하나 더 늘었어.”
다시 화르륵 타오르는 모닥불 앞. 모두의 소탈하지만 정다운 저녁 식사가 진짜로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기사단은 이전보다 훨씬 생기가 돌았는데 막내인 랄프의 컨디션이 좋아 끊임없이 분위기를 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선두에 서던 르베나는 오늘 칸과 함께 나란히 하며 후미에서 말을 몰았다.
칸의 품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팅에 대해서 좀 더 알기 위해서다.
“종족… 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르베나의 물음에 칸이 제 품 안에서 노는 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팅은 원래 무리생활을 하는 종족입니다. 보통 짝을 지으면 평생 그 짝과 함께하는 습성을 지녔는데 수명이 백 년 이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평생 동안 낳는 새끼는 한두 마리에 그칩니다. 그래서 새끼가 굉장히 귀해 무리 생활을 하며 보호하고는 합니다.”
칸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팅을 향했다. 그러고는 근심 섞인 눈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팅은…….”
“아마도 르베나 님이 그 베이라한테 들은 대로라면 어떠한 사정으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걸 발견한 모양입니다. 그는 나팅을 키메라로 만들었다고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이 아닐 겁니다. 나팅이 전설속의 동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주인으로 인식한 사람 외의 마력이나 신력에는 일체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르베나의 반짝이는 눈을 확인한 칸이 말을 이었다.
“특히 나팅이 마법사를 주인으로 인식하기 위한 과정은 한 번의 진화를 할 만큼 많은 양의 신력이나 마력을 주입하는 건데 웬만한 마법사는 엄두도 내지 못할 양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공주님께서 팅을 떼어내려고 마력을 주입했던 때, 팅이 진화를 한 것 같습니다.”
칸의 말에 르베나는 오랜 궁금증을 해소한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왜 갑자기 르베나를 공격하던 팅이 르베나를 지키던 것인지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는 궁금증들은 아직 있었다.
“그… 능력에 맞게 저장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얼만 큼인지 알 수는 없을까요?”
르베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긴 칸이 말했다.
“글쌔요… 제가 친구를 통해 들었을 때는 웬만한 마석 백 개보다 낫다고 들었습니다.”
칸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알아야 르베나도 마법을 시전 할 때 더 효율적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르베나를 가만히 보던 칸이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주제 역시 르베나가 큰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언령 마법 말입니까? 간단한 단어 하나로 같은 마법의 위력에 소비되는 마력을 절반 이하로 줄여준다는 고대의 마법. 하지만 남겨진 자료가 전혀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모든 마법사들이 찾아 헤맨 고대의 마법. 지금 칸은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가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놀라웠고 심지어는 경이로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르베나를 보고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보며 르베나는 그녀답지 않게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이제 막 중년에 들어서는 그의 미소. 따뜻하게 이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을 것만 같은 그의 미소가.
썩, 나쁘지 않은 거 같다고. 그리고 그 뒤로도 르베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언령 마법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지속됐다. 그들의 이별이 다가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