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9)
“하아… 이백 마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솨악……!
그어진 칼날에 앞발이 잘려 나간 가젤의 독을 피하며 루안이 말했다. 그러자 눈앞의 가젤을 바스타드 소드로 크게 베어낸 아를이 그에게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한 게 그쪽의 상사야.”
그러자 루안이 그들의 주위를 새카맣게 둘러싼 가젤들을 보며 말했다.
“어쩌면 이참에 저를 죽이고 싶으셨던 게 아닐는지.”
그의 말에 아를이 피식 웃고는 횡으로 검을 내지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걱정 마. 우리가 한번 그 계획을 망쳐보자고.”
처음 맞춰 보는 합이지만 루안은 아를이나 르베나와 꽤나 합이 잘 맞았다. 그리고 아를은 그런 루안이 마음에 들어 보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의 무거운 입이 루안에게 열렸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를과 루안의 뒤에 있던 르베나 또한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곧 르베나의 몸에서 검붉은 마력이 일렁거렸고 손 안 가득 마력이 차오르자 루안과 아를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내 뒤로 가!”
르베나의 외침과 동시에 루안과 아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순간에 몸을 동굴의 입구쪽으로 날렸다. 그와 동시에 르베나의 손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나오며 동굴 깊숙이 날아갔다.
콰르릉. 쿠궁……!
큰 굉음과 함께 르베나 앞쪽의 깊은 동굴이 순식간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막고 있던 가젤들에게서는 기이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끼이잉이---! 끼기기기---! 끼이잇!
“안쪽에 알이 있나 본데?”
무너진 동굴을 안쪽을 보고 격분하는 가젤을 보며 아를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남은 가젤들을 해치우기 위해 제 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조금 전 셋은 기세 좋게 동굴 안으로 들어와 눈에 보이는 족족 가젤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무리가 보통 이 백 마리 라는 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 듯 가젤은 베고 또 베도 기어나왔다. 그렇게 어느새 이 백 여 마리를 족히 베어 넘겼음에도 가젤들은 마치 안에 복제하는 기계라도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기어 나왔다.
“이거 끝이 없겠는데?”
“이건 칸 님이 저를 없애시려는 게 분명하다고 봅니다.”
아를과 루안의 말에 르베나도 내적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결국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다는 생각에 르베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으로 동굴 안쪽을 차단해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동굴은 르베나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한 듯 처참하게 무너져 더 이상은 안에서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휘익……! 쉬이익……!
남아있는 가젤들을 빠르게 해치우는 세 개의 은빛 섬광이 어두운 동굴 안을 번쩍였다. 그렇게 고작 몇 분.
촤악……!
마지막 칼날을 묵직하게 휘두른 아를이 마지막 가젤의 독이 튄 제 옷깃을 털어내며 말했다.
“이제 끝인 거 같아, 르베나.”
그의 말대로 동굴 입구 쪽엔 더 이상 가젤들이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이제 더 이상 안에서 나오는 놈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곧 또 다른 문제가 발생 할 것을 르베나는 알았다.
우르릉……!
아니나 다를까 나는 불길한 소리에 아를과 루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고는 동시에 르베나를 불렀다.
“…르베나!”
“르베나 공주님!”
그들의 외침과 동시에 르베나의 어깨에 붙어있던 팅에게서 요요한 푸른빛이 났다. 푸른색으로 환해진 동굴 안, 아를과 루안은 팅에게서 나온 마력이 르베나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리고 팅에게서 마력을 받은 르베나의 힘이 그녀를 감쌈과 동시에 입구쪽에 있는 아를와 루안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우르르… 콰광!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아를과 루안이 서 있던 동굴의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르베나의 염려대로 그녀의 마력에 충격을 입은 동굴의 나머지 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하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말했잖아… 하아… 그 계획 같이 실패시키자고.”
르베나와 함께 동굴의 바깥에 모습을 나타낸 아를과 루안의 안도가 이어졌다. 그들을 감싼 검붉은 마력이 사라지는 순간 팅이 부스럭거리며 소리쳤다.
“티이잉!”
칭찬해 달라는 듯한 그 소리에 르베나가 팅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어, 팅.”
르베나는 본래 팅의 마력을 잘 끌어다 쓰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다 쓰는 게 팅과 본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 가거나 전투 시에는 팅을 데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자칸에서의 일 이후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팅을 데리고 다니기로 했음에도 팅의 마력을 끌어다 쓰고 나니 왜인지 모를 미안함이 남기는 했다. 상황이 급해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이제 구조도 거의 다 된 거 같은데?”
조금 지쳐 보이는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앞쪽의 늪을 향했다. 그들과 가젤의 싸움이 꽤 오랜 시간 동안이었는지 다행히 모든 일행들이 그사이 늪에서 빠져나와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동굴도 알맞게 무너져 가젤이 적어도 몇 개월은 밖으로 나올 일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순간이동으로 동굴의 밖에 모습을 드러낸 르베나 일행을 보며 늪 건너편 진흙에 잔뜩 절어있던 룬이 소리쳤다.
“단장님! 오늘도 변함없이 멋지십니다!”
룬의 하얀 이가 진흙투성이 몸 가운데서 유독 빛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소리들이 목청껏 들려왔다.
“아를 단장님과 루안 님을 구하신 겁니까? 역시 아름다우십니다!”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 저희는 많이 찝찝하지만 괜찮습니다!”
“뭐라는 거냐, 루나타! 아하하하!”
르베나를 향한 아벨디온 기사들의 말에 곧 기분 좋은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 웃음소리들을 배경 삼으며 르베나의 눈이 저 멀리 하늘을 향했다. 어느새 해는 지고 동굴에서의 답답함을 씻어내듯 차갑고 청량한 바람이 그들 주위로 불어 왔다. 동시에 늪에서 나와 서로를 놀려대고 웃으며 장난치는 아벨디온 기사단의 모습이 르베나의 눈에 남김없이 들어찼다.
“…하아.”
르베나가 깊게 불어오는 바람을 폐 깊숙한 곳까지 끌어다 담았다.
속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바람은 제법 차가웠고 르베나의 손끝에 걸린 팅의 털은 보드라웠으며 계속해서 들려오는 아벨디온의 웃음 소리는 듣기 좋았다.
그리고 이 순간.
르베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
일행 중 대부분이 늪에 빠졌기 때문에 르베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는 모두에게 짐을 풀라고 명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호수가 이번에는 진짜 물인지 확인하고 시녀들부터 차례로 간단히 몸을 씻도록 했다. 그렇게 하나 둘 상쾌한 얼굴이 된 일행은 따뜻한 불을 피우고는 저녁준비에 돌입했다.
“루나타, 아직 안 씻었냐?”
“씻고 온 겁니다 룬 경!”
“푸하하하.”
위험에 빠졌던 모두가 하나의 상처도 없이 돌아온 것이 기쁘고 좋은 듯 모두의 곁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를 털어내며 룬이 랄프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오 랄프, 막내 주제에 그 상황에 겁도 없이 뛰어들다니! 다시 봤는데?”
조금은 대견한 듯, 또 조금은 걱정스럽게 말하는 룬의 말에 랄프가 자신감에 찬 얼굴로 말했다.
“원래 몸빵은 제일 막내부터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아벨디온 기사단에 뽑힌 그 순간부터 생각했습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몸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당연히 기사단에서 제일 약한 저의 몫이라고요! 근데 저 좀… 멋있었습니까, 룬 경?”
본인이 생각해도 본인의 생각이 자랑스러운지 랄프가 어깨에 잔뜩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랄프의 말에 순간 웃음이 끊이지 않던 기사단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짓던 룬의 차가운 얼굴을 처음 본 랄프가 움찔하며 말했다.
“룬 경……? 제가 뭐 실수라도……!”
언제나 친근한 형같이 웃어주던 룬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와 기사들의 분위기에 랄프가 사뭇 당황한 게 느껴졌다. 그러자 룬이 랄프를 보며 조금은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는 그런 말 입에 담지 마라, 랄프. 이 기사단 어느 누구도 너를 방패로 생각하지 않아.”
평소와는 다른 룬의 엄격한 어조에 랄프가 당황하자 룬의 옆에 있던 마른 경이 말을 이었다.
“랄프의 말이 맞아. 우리는 동료를 방패로 삼지 않는다. 네가 우리 중 막내이고 검술이 제일 약하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든 너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건 우리를 우습게 만드는 일이야.”
마른과 룬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지자 랄프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 제 말은… 그러니까……! 어, 우리 기사단 사람들이 그렇단 얘기가 아니고……!”
랄프가 당황한 채 선뜻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일 뿐인데 왜 룬 경과 마른 경이 이렇게까지 정색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기사들까지 왜 얼굴을 굳히는지 랄프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다한이 랄프에게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본인이 무엇인가 실수를 한 것 같은데 부단장인 다한까지 다가오자 랄프의 온몸이 긴장으로 조여들었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몹시 그립고 지금의 이 분위기가 숨 막히게 낯설었다.
“부단장님, 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랄프를 보며 다한의 눈이 룬과 그 옆의 마른, 그리고 또 그 옆의 또 다른 기사들을 순서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랄프를 향해 차분히 말을 꺼냈다.
“랄프, 알다시피 아벨디온 기사단의 대부분은 예전 제1기사단 출신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베이라 쥬라와의 싸움에서 돌아온 자들이다.”
“…아!”
순간 랄프의 눈이 하염없이 떨려왔다.
베이라 쥬라와의 싸움.
그걸 모르는 이는 디오니스 기사단에 없었다. 랄프는 그때 비록 견습 기사 신분이었지만 떠도는 소문은 듣지 않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처절했던 싸움.
단 한 명의 베이라에게 디오니스 제일의 기사단이 처참히 패배했다. 그 싸움으로 인해 기사단 중 절반이 목숨을 잃거나 귀환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르베나 공주에 의해 강제로 안전을 보장받는 처절함을 또 한 번 겪어야만 했다.
서로를 지켜야 할 동료의 죽음 앞에 그들은 무력했으며 동료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르베나 공주마저 그들은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이후 남은 제1기사단 기사들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야 저러다 제1기사단 다 죽는 거 아니냐? 이틀 째 굶고 훈련만 한다며?”
“야 오늘 비가 이렇게 오는데 쟤네 뭐 하냐? 미친 거 아니야?”
“룬 경, 마른 경! 그만하십시오! 다한 단장, 제발 말려 주십시오! 제발이요!”
모두의 만류에도 그들은 자지도 먹지도 않고 훈련에만 임했으며 마치 그러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들처럼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궂은 날씨에도 그들은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고 고된 훈련에 하나둘 지쳐 나가떨어져도 누구 하나 제 몸을 살피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제1기사단의 별명이 어느새 좀비 기사단으로 불렸던 건 그 시절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