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8)
“그래서. 저랑 혼인하지 않으면 마르망 백작과 혼인을 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벌게진 눈가로 부들부들 손을 떠는 루안 공녀를 보며 루드바하가 묻자,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겨우내 눈물을 그친 눈가에서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하아…….”
루드바하의 입에서 거친 한숨이 새어나왔다.
루안 공녀의 집안은 룩센 공작가로 젠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 중의 하나다. 대대로 유파시드를 배출한 루드바하의 가문 아래로 룩센 공작가와 바후 공작가는 오랜 시간 끊임없이 세력을 다투고 있다.
그중 룩센 공작가는 대대로 엄청난 신력의 세츠들을 배출했지만 번번이 루드바하의 집안에 밀려 꽤 오랫동안 유파시드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룩센 공작가는 대대로 신력이 강할수록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를 갖는데, 불행히도 이번 대의 장녀인 루안 공녀는 아주 옅은 보랏빛의 눈동자를 타고났을 뿐이었다.
게다가 여성이기까지 한 그녀는 여러 조건들 때문에 세츠로써의 자질을 알아보기도 전에 유파시드의 신부를 목표로 길러졌다.
루안 공녀는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나이부터 아버지 룩센 공작의 명에 따라 틈틈이 궁중의 법도를 배우고 유파시드 배우자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워 왔던 것이다.
“너한테 남은 길은 유파시드의 아내가 되어 젠의 황후가 되는 것뿐이다, 루안.”
모두 루드바하나 그의 가문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었지만 루안 공녀 역시 자신이 루드바하의 정혼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약혼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제 아비를 단 한 번도 제지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녀를 루드바하의 약혼자라고 떠들어 대도 이에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가냘프고도 청초한 본인의 외모가 여성으로써 큰 경쟁력임을 깨달았다.
고고한 유파시드도 결국은 사내. 그녀의 미모를 보며 마음 한구석 그녀를 그의 반려로 인정한 것이리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젠이 제국으로 선포되기 바로 직전. 디오니스에 다녀온 그는 그때부터 달라진 사람 같았다.
“다시는 그 누구도 저의 정혼자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마십시오. 분명히 말하지만, 나의 혼사는 오로지 나의 뜻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이전까지 신경도 쓰지 않던 루안 공녀에 관한 소문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나아가 소문이 쉬이 사라지지 않자 종래에는 룩센 공작을 불러들여 공녀와 혼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런 소문이 들리지 않게 하라 주의까지 주었다. 말이 주의였지 협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루안 공녀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도 아니었던 그는 딸의 소용가치가 없어지자 본색을 드러냈다.
“쓸모없는 것!”
“쓸데없는 데다 한눈을 팔고 다니니 이 모양이 아니냐!”
하지만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도 별다른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젠 제국의 황제이자 유파시드인 그가 직접 거절한 일을 감히 그들이 마음대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루안 공녀는 공기마저 불편한 공작가의 집에서 그렇게 숨죽여 지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녀만 보면 못마땅한 듯 내색하는 룩센 공작의 화도 그렇게 서서히 줄어드나 싶었다.
하지만 그의 아비는 결코 쉽게 물러날 이가 아니었다. 어느새 잠잠해졌다 싶었던 룩센 공작이 마지막 수를 들고 그녀를 겁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 기회다, 루안. 네가 유파시드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마르망 백작과 혼인시킬 테니 그런 줄 알거라.”
마르망 백작은 이름 없는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비록 나이가 마흔에 여자를 좋아하고 근본도 없을 정도로 품행이 방정맞다 소문났으나 그가 가진 광산은 누구나 탐낼 만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는 다이아몬드만 해도 젠 제국 전체 다이아몬드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안 공녀는 그런 남자와는 죽어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루드바하를 찾아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루드바하의 허락뿐이었다. 그것만이 그 멍청하고 늙은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을, 그 숨 막히게 무거운 공작가의 공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걸 꼭 갖고 말 거야. 그리고 지금은 이 방법… 뿐이야.’
그리고 그녀는 자신 있었다. 지금은 비록 눈물을 떨구고 있지만 그는 이 모습에 현혹되고 말리라. 지금은 비록 그녀가 그를 원하고 애원하지만 언젠가는 그가 그녀를 애타게 찾으리라.
루안 공녀는 자신의 무기로 어느 여자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또한 그 무기는 제아무리 젠의 황제이자 유파시드인 그라 하여도 단숨에 제압시켜버릴 힘이 있다고 믿었다.
가녀린 실루엣. 보기만 해도 만지고 싶은 보드라운 살결. 젠의 모든 귀족 남성들이 한 번이라도 닿아보고 싶은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를 유파시드의 손에 쥐어 주었다.
“폐하… 제발… 제발 저를 받아 주세요. 어차피 대대로 유파시드는 너무 강한 신성력 때문에 이성에게 사랑을 잘 못 느끼잖아요. 그러니 누구라도 상관없다면… 부디 저를… 제발……!”
적막이 내려앉은 방. 시리도록 푸른 벽안의 눈동자는 앞에 앉아 눈물을 떨구는 가녀린 실루엣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짙푸른 눈빛에는 그 어떤 동정이나 연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골치 아픈 숙제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루드바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제 책임이 일부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룩센 공작이 예전부터 그대를 나의 약혼자처럼 말하고 행동했을 때 싹을 잘랐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여긴 제 침묵이 잘못임을 인정합니다.”
루드바하의 목소리는 이제껏 루안 공녀가 들어본 어느 목소리보다 차갑고 딱딱했다. 안 그래도 떨리는 루안 공녀의 손이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루안 공녀의 귀를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소름이 끼칠 만큼의 선연함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 때문에 이제껏 그대와 룩센 공작에게 꽤 정중하게 내 뜻을 보냈건만. 이런 식으로 저를 곤란하게 하시다니요.”
루드바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안 공녀는 주뼛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감싼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리고 무심결에 고개를 든 그녀의 옅은 보랏빛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려 왔다.
마주친 그의 눈에는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루안 공녀 본인을 향한 새카만 어둠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꿀꺽.
갑자기 아로새겨진 캄캄한 공포에 루안 공녀가 침을 삼켰다. 루드바하의 새파란 벽안이 그녀의 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따라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와 또다시 마주한 그의 눈빛에 이제는 감히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마지막입니다, 공녀. 내가 그대와 공작에게 보내는 호의는. 내가 항상 웃으며 대해 준다고 하여 나를 편한 일개 귀족의 영식과 같이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젠 제국의 황제이자 그대들 세츠들의 왕, 유파시드입니다.”
지독하게 냉혈한 눈빛이 그보다 숨막히는 오싹함과 함께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나의 허락 없이 감히 그대와 그대의 아비가 나의 옆자리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새기십시오. 그리고 룩센 공작에게 가 전하세요. 한번만 더 내 앞에서 이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면 룩센 공작가는 젠 제국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거라고요.”
쏟아진 루드바하의 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참는 건 딱, 여기까지입니다.”
태어나 처음 꿇어본 무릎에 돌아온 것은 차디찬 땅의 한기였고 숨이 막히도록 쏟아낸 눈물에 돌아온 것은 소름이 일도록 차가운 거절이었다.
‘결혼하자고 했더니 멸문하겠다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조차 루안 공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제나 보기 좋게 옅은 미소를 머금었던 그의 표정은 지금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고 언제나 접혀있던 눈가와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이었다.
루안 공녀는 지금 이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야… 그는.’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루안 공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방을 나섰다. 짤막하게 숙인 고개가 인사의 전부였다. 그에게 눈물은 전혀 통하지 않는 무기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할 일은 재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 더는 그의 화를 돋우지 않는 것이었다.
언젠가 공작이 말한 적 있었다.
“기억해라, 루안. 유파시드가 웃는 낯을 거두는 순간 그곳에 있는 누군가의 목숨도 거두어지는 거란다.”
루안 공녀가 비록 이 결혼에 모든 것을 걸긴 했지만 목숨까지 건 아니었다.
빠르게 그의 방을 벗어난 루안 공녀가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제 이를 악다물었다.
표독스럽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와 악다문 새하얀 잇새로 피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새빨간 입술이 보였다.
그 모습은 조금 전까지 루드바하의 앞에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떨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옅은 보랏빛 눈이 강하게 빛났다.
“젠장… 눈물은 안 돼. 이건 안 통한다고! 하지만 두고 봐. 꼭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말테니까! 언젠가 오늘의 일을 싹싹 빌며 곁에 있어 달라 사정하게 만들어 줄 거야!”
작게 중얼거린 루안 공녀가 또각또각 더없이 당당한 걸음으로 루드바하의 궁을 벗어났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루안 공녀의 모습 어디에도 벌벌 떨던 여린 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루드바하의 옆에서 없는 사람처럼 업무를 보던 유안이 작게 속삭였다. 속으로는 왜 항상 루안 공녀랑 독대를 할 때마다 자신이 있는 집무실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무릎 꿇을 준비를 하셔야겠는데요.”
그런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공녀에 대한 경고는 너에게도 해당된다, 유안. 다시는 이런 일로 공녀를 내 앞에 데려오지 마라. 명령이다.”
명령.
루드바하가 거의 쓰지 않는 단어가 나왔다. 이제 정말 다시는 루안 공녀를 유파시드의 앞에 데려오지는 못하겠단 생각이 유안의 머릿속을 스쳐 간 순간.
가녀린 모습으로 우는 공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용히 제 눈앞의 서류로 시선을 옮긴 유안은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서류가 너무 많았다.
그런 유안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드바하는 조금 전까지 루안 공녀가 앉아 있던 빈 의지를 보다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적당히 그칠지 모르고 끊임없이 제 옆자리를 탐내는 부녀의 연극은 언제나 피곤했다. 그리고 동시에 보고 싶었다.
상황에 떠밀려 무기처럼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리는 공녀를 보고 나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버티고 그럼에도 끝내 울 수 없던 그녀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치열하게 버텨내고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녀가.
정말 미치게도.
“보고 싶다…….”
그의 한숨 같은 말이 조용한 방에 연기처럼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