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7)
칸과 루안의 합류 이후 일행에는 전에 없던 웃음이 감돌았다. 말수가 적은 루안과는 다르게 칸은 아주 유쾌한 사내였는데 오랜 여행경험으로 박학한 지식과 헤프닝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칸 님?”
“그 뒤엔 어떻게 됐습니까! 빨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행이라고는 인연이 없는 기사단은 모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때로는 가슴을 졸이고 때로는 함께 응원해가며 이야기에 동화되어 갔다.
종래에는 말수가 없는 아를과 다한마저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맨 앞에서 묵묵히 말을 모는 르베나도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니 그의 말솜씨와 유쾌한 성격은 정말 대단하다면 대단한 것이었다.
“아, 르베나 님, 비록 제가 아는 게 많지는 않지만 나팅에 관해 아는 모든 건 꼭 들려드리겠습니다.”
칸의 이 말만으로도 르베나는 그들과의 동행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잠시 쉬어가는 거니 막사는 치지 않겠습니다, 단장님.”
가젤과의 전투 이후 모두는 재정비와 휴식을 위해 한 연못 근처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르베나는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때는 초여름이었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것 만으로 많은 땀이 났고 먼지가 묻어났다. 곧 르베나가 아벨디온에게 명령했다.
“시녀들이 연못에서 간단히 세안을 하거나 먹을 물을 구할 것 같다. 호위를 위해 아벨디온 두 명은 함께 가도록.”
시녀들과 기사 둘이 떠나자 나머지 일행들은 각자 지친 말을 달래고 건포 조각을 뜯으며 허기를 달랬다. 르베나는 마력으로 제 몸의 땀과 먼지들을 씻어내고 아를, 다한과 함께 마른 과일과 육포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지척을 울리는 큰 비명 소리가 그들의 짧지만 달콤한 휴식시간을 산산조각 내고야 말았다.
“꺄악……!”
“르베나 님!”
다급한 여성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르베나를 찾는 소리에 모두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앞의 상황에 직면한 일행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그들의 지척에 있던 연못은 어느새 질척한 늪이 되어 시녀들과 두 명의 기사를 삼키고 있었고 맞은편 동굴에서는 셀 수도 없는 수의 가젤들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젤들의 은신처……!”
그리고 칸의 절망적인 목소리가 일행을 해일처럼 덮쳐온 순간이었다.
“가젤들의… 은신처?”
르베나의 되물음에 칸이 다급히 제 갈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가젤들이 무리 생활을 하시는 건 아실 겁니다. 보통 가젤들이 무리 생활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은 신중하게 은신처를 찾습니다. 보통은 깊은 동굴을 주로 선택하죠. 그리고 게 중 지능이 높은 리더가 있으면 덫으로 보이는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겁니까?”
아를의 물음에 이제껏 침묵을 유지하던 루안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원래 늪지대가 많은 지역입니다. 게다가 비가 내린 지 얼마 안 됐다면 늪지대 위에 고인 물이. 하아… 종종 사람들의 눈에는 연못처럼 보였을 수도 있을 겁니다.”
루안의 말을 끝으로 일행의 눈은 모두 허리까지 늪에 잠긴 채 움직임을 조심하는 기사들과 울며 공포에 질린 시녀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 때마침 동굴에서 나온 가젤들은 위협적으로 산성의 독을 뚝뚝 흘리며 그들의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제일 앞에 있던 가젤의 앞발에서 독이 뿜어져 늪에 있던 일행에게 향하자 다한이 지체 없이 뛰어들어 자신의 검기로 독을 쳐냈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의 몸도 늪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다한은 예상한 듯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몸에 힘을 빼고 뒤쪽으로 몸을 뉘었다. 덕분인지 그의 몸은 무릎 정도에서 잠기는 걸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젤들은 멈추지 않았다. 르베나 일행 모두가 그들의 알을 탐하러 온 포식자인 것처럼 그것들은 늪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아벨디온을 향해 계속해서 독을 뿌려 댔다.
“이번엔 제가 갑니다!”
“이번엔 접니다!”
그때마다 아벨디온은 하나둘 망설임 하나 없이 제 몸을 날려 검과 검기로 독을 막고 늪에 처박혀 갔다. 시녀들과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동굴에 있을 가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 상황에서 이 방법은 언젠가 끝이 나고야 말 것이다. 그나마 장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한 르베나와 아를이 검기와 마법으로 가젤들을 견제하고 있긴 했지만 늪에서 일행들을 꺼낼 만큼의 여유를 만들지는 못했다.
가젤들은 멀리 있는 르베나와 아를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늪에 빠진 일행들을 쉼 없이 공격해댔기 때문이다.
르베나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늪에 빠지지 않은 전투 가능 인력은 르베나와 아를 그리고 루안이 전부였다. 드록과 호위 기사들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먼 곳에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기대가 없어 그런가 놀랍지도 않네.”
드록과 그의 호위 기사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건넨 아를의 말에 조소가 어렸다.
르베나 역시 드록 일행을 한번 한심하게 바라본 후 늪에 빠진 제 사람들에게 일단 검붉은 마력의 실드를 씌워 주고 칸에게 물었다.
르베나가 금방 구현해 낸 마법을 보며 칸과 루안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그걸 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늪에서 일행들을 빼낼 방법이 있습니까?”
잠시 봤을 뿐이지만 칸은 굉장히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물음에 칸은 머뭇거림 없이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며 답했다.
“한 명 한 명 이쪽에서 건져 내는 수밖엔 없을 겁니다. 이 지역의 늪은 밀도가 높아서 사람을 통째로 삼키지는 않습니다. 대신 꺼낼 때에도 웬만한 힘을 가지고 당기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굉장히 묵직한 힘으로 오래 끌어당겨야만 겨우 한 명 정도 빼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가젤들이 저렇게 위협을 하는 상태에서는 그 한 명도… 어렵습니다.”
칸의 대답에 르베나가 망설이다 다시 물었다.
“혹시… 가젤들이 보통 몇 마리로 무리를 이루는지 아시는지요.”
르베나의 물음에 칸이 대답하기를 망설이다가는 마지못해 답했다. 이 대답 끝에 그녀가 제발 예상대로의 결정을 하지 않길 빌면서 말이다.
“보통은 이 백 마리 정도입니다. 참고로 아무리 공주님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지원군 없이 무리 전체를 상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시다시피 가젤의 독은 치명적이라 한 번만 맞아도 중상에 이르거나 사망합니다.”
칸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제 품속에서 파란 눈을 요요하게 빛내는 팅을 보며 물었다.
“팅, 마력은 충분해?”
언제나 르베나의 곁에서 그녀의 마력을 조금씩 흡수하는 팅에게 마법을 충분히 써도 될 만큼의 마력이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르베나의 마력이 부족하면 팅의 것을 공유 받을 수 있도록.
“팅!팅!”
팅 역시도 그동안 티격태격하던 아벨디온이 걱정되는지 잔뜩 쳐진 눈으로 답했다.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라고 생각된 것을 들은 아를이 제 검을 쥐며 말했다.
“당연히 같이 갈 거야.”
르베나는 아를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칸과 루안을 보며 말했다.
“저와 아를이 가젤들의 동굴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두 분께서는 저희 일행을 꺼내 주십시오.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르베나의 말에 칸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빛이 어렸다. 절대로 동의하고 싶지 않은 무모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그것 말고는 저들을 구할 방법도 없었다.
그때 칸이 르베나를 보며 결심이 선 눈으로 말했다.
“제가 늪에 빠진 기사들을 먼저 몇 명이라도 건져내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꺼내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은 걱정마시고 루안도 데리고 가십시오. 분명 방해는 안 될 겁니다.”
그의 말에 루안이 놀란 듯 칸을 바라보자 칸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르베나가 루안을 보며 물었다.
“만약 도움을 주신다면 거절하지 않겠으나 위험한 만큼 거절하셔도 무방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임시방편인 그녀의 마력으로 보호받는 기사들을 보며 르베나의 마음이 조금 다급해졌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칸을 바라보던 루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로 가시지요, 시간이 없으니.”
루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베나와 아를은 그와 함께 곧바로 가젤들을 향해 돌진했다.
검붉은 르베나의 마력이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훈련 상황은?”
먼지 하나도 감히 내려앉을 수 없는 새하얀 망토에서는 누군가의 손으로 잡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성스러움이 묻어났다. 어깨에 걸쳐진 망토가 후덥지근한 바람에 휘날리고 그 바람이 놀라 달아날만큼 차가운 벽안을 빛내는 루드바하의 질문에 라웅이 답했다.
“언제든 문제없어! 젠픽스에 갈 인원들은 미리 얘기한 대로 추려놨고.”
라웅의 대답에도 루드바하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연무장을 가득 채운 성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족히 천명도 넘을 인원들이 합을 맞춰 훈련을 하는 장면은 가히 누가 보아도 장관이건만,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상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익숙한 듯 라웅 역시 여느 때와는 다르게 표정을 굳히고 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그때 루드바하와 라웅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다가오는 청색의 머리가 보였다.
“어? 유안이 무슨 일이지? 연무장은 먼지 날린다고 싫어하잖아?”
라웅의 말에 루드바하 역시 말 없이 멀리서 다가오는 유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응? 근데 기척이 둘이네?”
하지만 돌연 들려오는 라웅의 말에 그들은 머지않아 유인이 그들이 있는 연무장으로 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루드바하의 눈은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 저 사람은……!”
라웅이 말끝을 늘어뜨리며 슬그머니 옆에 선 루드바하의 눈치를 보았다.
햇살에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갸날픈 몸매와 옅은 금발의 머리. 그리고 그보다 옅은 빛의 보랏빛 눈동자, 루안 공녀.
그녀가 가쁜 숨을 내어 쉬며 루드바하의 앞에 다가온 것이다. 서늘한 루드바하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한 루안 공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 폐하… 무례인 줄 알고도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저를 좀……. 살려주세요!”
갑작스레 눈물을 뚝뚝 흘리는 루안 공녀가 루드바하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구슬같이 뚝뚝 떨어지는 어여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제발…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저는 죽어요… 아, 아버님께서 폐, 폐하와 결혼하지 않으면 마르망 백작과 결혼을 시킨다고 하세요. 제발… 흑……. 폐하……!”
그렁그렁한 눈물을 흘리며 먼지 가득한 연무장에 무릎을 꿇은 그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져버릴 물망초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저리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그 모습은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짓이 길만큼 아련하고 청초했다. 거기다 크고 옅은 보랏빛 눈에서 떨어지는 투명하고 작은 구슬들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애틋한 보석인 양 보는 이의 마음을 절절 애끓게 하였다.
‘이 정도면 될까? 제발……!’
그리고 루안 공녀는 본인이 일으킬 그 신비롭고 애절한 세계를 모르지 않았다. 그녀가 눈만 마주쳐도 남성들은 그녀에게 닿고 싶어 안달이 났고 그녀가 눈시울을 붉힐 때면 곧 함께 울기라도 할 것처럼 애통한 표정을 짓는 게 바로 남자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먼지가 이는 연무장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처연하게 울고 있으니 이제 곧 그녀를 향한 애통하고 절절한 누군가의 위로가 이어질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남성들, 그들만은 그녀가 일으키는 환각의 세계에서 예외라는 것을 말이다.
‘우와 되게 신기하게 눈물이 계속 떨어지네?’
라웅은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듯 루안 공녀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지만 머지않아 흥미가 떨어진 했다. 유안은 그저 이곳으로 공녀를 데려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무심했으며 루드바하는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내가 이렇게까지 울고 있는데?’
그리고 루안 공녀가 일이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할 즈음,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언제나와 같은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흘려 버리고 어떠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녹여버릴 듯한 미소.
‘역시……!’
그의 미소를 확인한 루안 공녀의 마음속에서 처연하게 흘리는 눈물과는 상반된 기쁨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는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에게 향했다.
“일단 일어나시지요. 이곳은 사람들의 이목이 많습니다, 공녀. 궁으로 돌아가… 마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의 목소리가 저를 향하자 루안 공녀의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유안.”
하지만 유안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 사람이고는 믿을 수도 없을 만큼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분명 루안 공녀를 그에게로 데려온 자신에 대한 분노인 줄 알면서도 유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예.”
순간 유안과 눈이 마주친 루드바하가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정중하게 모셔오도록, 궁으로.”
그러고는 흰 망토를 거칠게 뒤로 젖힌 루드바하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루드바하가 떠난 그 자리에는 여전히 물망초같이 여린 자태로 흘린 루안 공녀의 눈물만이 짙은 얼룩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더불어 유안의 한숨 섞인 자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