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6)
“난 반대다. 나를 호위하기에도 손이 모자란 상황에서 저런 쭉정이를 둘이나 들이다니!!”
당당하게 그들 사이로 나선 드록 드 디오니스. 그의 입에서는 언제나처럼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아! 이제는 데리고 있던 남자들로도 부족해 처음 본 남자들도 끼고 놀고 싶은가 보지? 피가 정말 무섭긴 무섭군.”
드록의 말에 르베나가 그를 한번 차갑게 바라봤으나 그녀는 드록을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록 역시 그를 저지하지 않는 르베나에게 안도와 함께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방금까지 그의 눈에 비친 장면들로 인해 받은 충격과 분노가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사실 예상치 못한 때에 몬스터에게 연달아 두 번의 습격을 당하며 극한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몬스터들에게 그가 야심차게 데려온 네 명의 호위 기사는 그저 드록의 곁에 서 있는 것 만해도 고마워해야 할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더욱 무섭게 만드는 게 있었으니. 바로 르베나와 아벨디온 기사단이었다.
이제껏 그가 르베나의 마력에 한두 번 목이 졸린 적은 있어도 르베나가 적을 상대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미, 미친 거 아냐?’
드록이 본 그녀는 한마디로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앞에 아무리 거대한 몬스터들이 있어도 그것들은 그녀의 검과 움직임에 결코 아무런 제약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고작 열 명이라고 비웃던 그녀의 기사단의 움직임도 장관이었다.
그들은 마치 수십 년간 합을 맞춘 것처럼 서로의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유기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여유롭게 처리해 나갔다.
“저, 정말 대단합니다.”
“아벨디온이 저 정도라니……!”
겁에 질려 있던 드록의 호위들조차 그들을 보며 감탄에 젖어갔다. 선두로 나간 르베나와 아를, 다한뿐 아니라 뒤를 따르는 여덟 명의 기사, 그 누구의 눈에도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몬스터들을 처리해나갔다.
“아를 경 저건 제가 맡습니다!!!”
“야, 그거 내 거였어!!”
“아 뭐래! 넌 저기 작은 거나 상대해!!!”
“랄프! 아직 살아 있냐?”
재기발랄하기까지 한 그들의 모습에 드록은 문득 두려워졌다. 그런 그들이 그를 노리기라도 한다면? 데리고 온 네 명의 호위 기사는 종잇조각이나 마찬가지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를 지배한 또 다른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그 모든 게 그의 것이어야했다. 용맹하고 강한 기사들. 절대적인 충성심과 존경심. 그 모든 것이 그를 위한 것이었어야 했단 말이다.
‘그들은 내 말에 눈을 빛내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어!! 저 붉은 눈의 불길한 계집애따위가 아니라 말이다……!’
드록은 문득 자신을 향한 모두의 마땅치 않은 시선을 느끼며 조금 전 느꼈던 분노가 다시 솟아오름을 느꼈다.
그러나 르베나의 시선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제 앞에 선 두 남성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진하게 머금은 보랏빛 눈과 다정한 진갈색의 눈. 그들의 눈을 보며 르베나가 대답을 망설이는 그때,
그녀의 허리춤이 들썩거리더니 흰 털뭉치가 불쑥 나타났다.
“…팅?”
한번 잠을 자면 열흘도 넘게 자는 팅이 7일 만에 깨어난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평소에 르베나의 마력을 양식 삼아 먹는 팅은 원래 잠을 많이 잤다. 하지만 전에는 하루나 이틀 정도 자던 팅이 근래 들어 한 번 잠이 들면 열흘이 지나도 깨지 않았다.
르베나는 처음에 팅의 긴 잠을 걱정했으나 깨어난 팅은 또 평소처럼 잘 놀고 르베나의 마력을 먹었기에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최근 팅은 르베나와 함께 젠픽스에 간다는 행복감에 젖은 것도 잠시, 젠픽스를 떠나는 날 아침, 또다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일어난 팅의 행동은 놀랍기만 했다. 평소보다 일찍 깬 것도 놀라운데 르베나 말고는 누구도 싫어하는 팅이 그녀의 허리춤에서 나오자마자 칸의 품으로 파고든 것이다.
“뭐야 저 털뭉치 새끼?”
“아니, 나는 근처만 가도 전기를 쏴 대면서 지금 외부인한테 간 거야?”
“이때까지 전기를 쏴도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저놈이……!”
팅의 행동에 르베나 뿐만 아벨디온 기사단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팅을 얼떨결에 받아든 칸 역시도 뜻밖의 일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품에 뛰어든 것의 모습을 본 그는 놀람을 지나 경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팅……!! 이건 나팅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칸의 말에 르베나가 놀라 물었다.
“나팅을 아십니까?”
품 안에서 보드라운 털을 비벼대는 팅을 보며 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인들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경험을 합니다. 그중 나팅에 대한 전설은 유명하지요. 나팅은 신화 속의 동물이 아닙니까?”
“…신화요?”
“네, 신력과 마력을 마음껏 흡수했다 내뱉으며 숙주에 따라 마법을 부릴 수도 있는 종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그 모습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아 저도 종이에 그려진 것으로 딱 한 번 본 것이 전부입니다. 정말 놀랍군요!!”
상인답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제 품으로 들어온 팅을 보는 칸은 조금 신나 있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나팅에 관한 정보를 들은 르베나의 눈도 빛났다.
“혹시… 나팅에 대해 더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르베나의 말에 칸이 품속의 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제 지인 중에 나팅에 관해 정말 관심이 많은 녀석이 있습니다. 저도 그 녀석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들었죠.”
칸의 대답에 르베나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본 다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 사이로 의견을 냈다.
“동행하시죠, 단장님. 이들이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젠으로 들어가려면 다시 일주일을 가야 합니다. 그동안 몬스터를 만나지 말란 법이 없으니 차라리 저희와 동행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다한의 말에 칸과 루안의 눈에 밝은 빛이 반짝 비쳤다. 르베나 역시도 긍정의 뜻으로 침묵을 지켰다. 다한과 같은 생각을 한 것도 있지만 처음으로 팅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아아, 그래. 새로운 남자들이 나타났으니 귀한 혈통의 의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테지!”
갑자기 튀어나온 나팅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있던 드록은 동행을 허락하려는 듯한 르베나의 모습에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에겐 몬스터 앞 그의 안전만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 저 멍청한 계집애는 본인을 향한 말에는 반응하지 않아! 그러니까 저 계집애만 조롱하면 난 얼마든지 저걸 마음껏 짓밟을 수 있어!’
드록은 순간 르베나가 발끈할 때는 언제나 한 경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주변 사람을 건드리는 것. 그래서 드록은 이제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르베나를 모욕하고 돌아온 그녀의 침묵을 이용해 마음껏 그녀를 조롱하기로 말이다. 그럼 르베나는 절대 그를 겁박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고 조금 전 일로 그는 그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보군.”
“제가 맡겠습니다, 부단.”
“아니, 그냥 제가 저 자식을 죽이고 처형당하겠습니다. 어차피 전 같이 죽을 가족도 없잖습니까!”
“야, 바리타, 너 안나한테 고백한다며? 그러니 저놈은 내가 죽인다!!”
아를의 싸늘한 분노에 이어 아를의 옆에 있던 룬이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남은 아벨디온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드록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허락만 떨어진다면 곧바로 그의 목을 베어 버릴 듯했다.
르베나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한 열 명의 아벨디온 기사단. 그들은 르베나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누구든 벨 수 있는 기사들이었다.
처음 한 번의 모욕은 왕족에 대한 예의로, 르베나와 다한의 눈짓이 있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더는 자신들의 단장을 모욕하는 드록을 가만히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왕족 시해로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팅, 팅~!!”
심지어 칸의 품에 있던 팅 마저 짜릿짜릿한 전기를 뿜어내며 드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들을 말리는 것은 바로 모욕의 당사자, 르베나였다.
“놔둬라. 마음대로 지껄이게.”
“…하지만 단장님!!”
르베나의 말에 룬이 발끈해 대꾸하려 하자 그녀가 더 빠르게 룬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차피 저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쓰레기일 뿐이니 너희들의 시간과 감정을 소비할 가치가 없지 않나.”
대응할 가치도 없다는 르베나의 말이 저의 행동보다 더욱 가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룬이 검집에서 미련 없이 손을 거뒀다.
“상종도 못 할 쓰레기는 무시하는 게 답이긴 하죠.”
르베나가 한 말과는 좀 다르긴 했지만 룬은 본인이 내뱉은 말이 꽤 만족스러운지 피식 웃으며 드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드록을 향한 아를과 아벨디온 기사단의 살벌한 #눈빛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들의 살기가 진심임을 느낀 드록이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어? 감히 디오니스의 하나뿐인 왕자인 나를 죽이기라도 할 텐가?”
데드라인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인지한 드록은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르베나 본인을 향한 어떠한 행동과 말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으며 기사들의 행동 또한 제한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아, 디오니스의 하나뿐인 왕자… 혹시 드록 왕자님이십니까?”
뜻밖에도 칸이 드록을 알아본 것이다. 드록이 자못 놀라며 칸을 보았다.
“네까짓 놈이 나를 어찌 알지?”
기고만장한 드록의 말에도 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작긴 하나 상단을 운영하는 상단주 아닙니까. 디오니스의 하나뿐인 왕자님인 드록 왕자님을 모를 수가 없죠. 아무래도 긴가민가했는데 방금의 말씀을 듣고 확신했습니다. 왕자님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드록의 얼굴에 흡족한 빛이 번져 나갔다. 이렇게 지나가는 쭉정이마저도 저의 위상을 알고 있으니 나름 뿌듯했던 것이다. 이어진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더욱 그러했겠지만.
“그렇다면… 아… 이분이 혹시 르베나 공주님이십니까? 디오니스에 하나뿐인 공주님이 기사가 되어 기사단을 창설했다는 이야기는 상단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특히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이 아주 아름다우신 외모와 기사로써도 베이라로써도 아주 뛰어나시다는……! 이런… 제가 너무 늦게 알아봤군요. 공주님, 정말 송구합니다.”
드록을 알아봤을 때와는 반응이 전혀 달랐다. 르베나를 보며 말을 잇는 그의 눈에는 전에 없던 빛이 가물거렸다.
무한한 기쁨과 설렘 그리고 존경 따위의 빛이 말이다.
그의 말이 자칫 낯간지럽기는 했으나 덕분에 드록의 입을 다물게 하였으니 르베나는 그것대로 괜찮다 여기며 답했다.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 기사의 신분이니 공주라는 존칭은 생략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가 누구인지 아셨으니 짐작하시겠지만, 저희는 지금 젠픽스로 가는 중입니다. 목적지가 마를한의 경계이니만큼 그곳까지는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떨어진 허락의 말에 칸과 루안의 얼굴 가득 기쁨이 번져 나갔다. 그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은 칸이 말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르베나 공주님”
그리고 왜인지 그의 웃는 얼굴이 르베나는 싫지 않았다. 덩달아 아벨디온의 얼굴도 조금 펴졌다. 단장의 진가를 알아보는 상인 짐짝 하나쯤은 더 거둬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왼쪽!!”
다한의 외침에 룬이 재빨리 뛰어나가 검을 들어 날아오는 독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대로 푹 아래로 꺼져 들었다.
“젠장……!!”
룬의 목소리가 들리자 일행 사이에는 침묵이 깔렸다.
“이제 우리 네 명뿐인가…….”
조금 가라앉은 아를의 목소리에 모두의 분위기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시작은 언제나처럼 방심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