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86화 (86/276)

8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5)

젠의 경계. 그곳엔 분명 몬스터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소형 몬스터 몇 마리가 어쩌다 나오는 게 전부였다.

왜냐하면 이곳이 젠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유파시드와 세츠들의 땅이 가장 인접한 곳.

한마디로 가장 신성한 힘이 넘치는 곳. 몬스터들이 싫어할 만한 곳이란 소리였다.

하지만 어제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고 들어본 적도 없는 몬스터들의 공격에 일행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더 당황하게 한 것은 눈앞 자칼 무리 한가운데 달랑 서 있는 두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아니, 가젤 무리 속에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가젤 속에 달랑 둘?”

어제 만난 트롤과 달리 이번에 만난 몬스터들은 ‘가젤’이라 부르는 무리 성향의 몬스터였다.

이들은 거미를 닮은 머리와 전갈을 닮은 기다란 몸에 커다랗고 큰 집게발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곳엔 땅에 닿기만 해도 흙을 녹일 만큼 강한 산성의 독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검은 든 사내 한 명과 그가 보호하는 듯한 남성은 그 가젤의 무리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그것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르베나 일행이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검을 든 사내는 계속 자신의 동행을 보호하면서도 쏘아지는 가젤의 독을 꽤 날렵하게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혼자서 동행을 보호하며 가젤을 공격까지 막지는 못했다. 가젤은 몬스터 중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소문난 종이었기 때문이다. 단신으로 누군가를 보호하며 이만큼 버텼다는 거 자체가 기적과 같았다.

그리고 기다리던 위기는 오래지 않아 나타났다.

“위험합니다!!!”

아벨디온 한 기사의 외침이 마치 신호인 것처럼 검을 든 사내가 앞에서 쏘아진 가젤의 독을 피해 동행한 사내를 붙잡고 피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으로 다른 가젤의 독이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순간 위협을 느낀 사내가 검을 버리고 동행한 남성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안으며 가젤의 독이 날아드는 쪽으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돌아선 그의 등 뒤에 있는 것은 가젤의 독이 아니라 어둠보다 짙은 누군가의 머리칼이었다. 하나로 곧게 묶은 머리는 움직임의 여진에 흔들리며 그의 등과 가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붉은 기운이 투명한 막을 만들며 공기와 공명하는 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위잉--!!

가젤의 독은 그녀가 쏘아낸 장막에 닿아 치이이익 소리와 함께 흘러내렸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날아온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는 깨끗하게 가젤의 앞발을 그어 내렸다.

“카악-!!”

가젤이 잘린 앞발을 들어 올리며 비명을 내지르자 검은 머리의 사내가 가젤의 독이 묻은 검을 털어 내며 그녀의 옆에 섰다.

“이게……!”

제 일행을 감싸며 고통을 예상했던 사내는 잠시간의 상황에 당황했다. 하지만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다음부터 벌어진 장면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 여성과 남성은 지체없이 가젤들의 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가 그들을 말릴 새도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놀라울 정도의 실력으로 가젤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무자비할 만큼의 압도적인 검술로, 또 때로는 검에서 뻗어나간 어떤 힘으로 가젤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륙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한 가젤의 집게발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가 급히 검을 들었지만, 그보다 빠른 게 있었다. 신나 보일 만큼 가벼운 몸놀림으로 가젤들을 제압하는 남녀와 같은 기사복을 입은 다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외형만큼이나 깔끔한 동작으로 다가온 가젤의 집게를 깨끗하게 잘라 냈다.

그때부터였다.

무리 생활을 하는 가젤들이 이 세 명의 기사와 곧 합류한 나머지 네 명의 기사에게 단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두 전멸한 것은.

치익--. 치지직---.

모든 가젤이 죽어간 땅에서는 가젤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독이 흥건했다. 그것들이 땅에 스며드는 소리만이 그들 모두가 살아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하나같이 검붉은 망토를 걸친 기사들이 제 검에 묻은 가젤의 피를 털어 내고 있었다. 그들의 망토 색은 앞장서 가젤을 도륙해내던 여성의 눈과 똑 닮아 있었다.

뚜벅뚜벅.

곧 곤경에 처해 있던 사내들 앞으로 다가온 그녀, 르베나가 사내들의 모습을 무심히 훑었다.

검은 든 사내는 제법 까무잡잡한 피부에 골격과 체격이 훌륭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 자는 일반 기사보다도 훨씬 월등한 실력을 지닌 자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꽤나 반듯하고 깔끔한 외모가 주는 인상도 좋았다.

다만 사내는 왜인지 르베나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묘했다. 선명한 그의 보랏빛 눈이 어떤 격렬한 혼란을 빚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그런 남성을 지나쳐 그 옆을 향했다. 검은 든 남성보다 조금 더 큰 키에 놀랍도록 잘생긴 그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분위기임에도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30대까지도 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외형은 옆의 사내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마치 어디서 한 번쯤 본 것만 같은 그의 얼굴은 어느 귀족가의 고운 자제처럼 티 없는 피부에 약간은 날카로운 듯한 눈매를 가졌지만 부드럽게 지어 보이는 미소 속에 숨겨진 표정을 쉽게 읽어내기 어려웠다.

“이거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게 되었군요.”

그가 입을 열었다. 조금 강렬한 외모와는 다르게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흔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이 보였다. 또 그의 목소리는 왜인지 약간의 흥분과 떨림을 내재한 듯했지만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은 무슨 일로 지나가시는 겁니까?”

고저 없는 르베나의 물음에 남자가 약간 놀란 듯하다가는 다시 미소를 그려내며 답을 이어갔다.

“저는 자그마한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호위인 루안입니다. 저희는 중요한 거래 차 마를한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웃는 낯으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상단을 운영하는 터라 이 길을 통한 것은 이미 여러 번인데 갑자기 몬스터를 만나 당황하던 참이었습니다. 기사 분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중한 그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르베나의 눈이 지그시 그를 향했다. 사실 그의 말에 의심이 가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이 길은 원래 몬스터들이 없기로 유명하고 상단들도 곧잘 이용하는 길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력도 없는 남자가 달랑 호위 한 명만 달고서 가기에는 분명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하지만 보통 이 길을 이용하는 건 짐이 많은 상단이 검문에서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짐도 없는 두 분이라면 굳이 이런 길 말고 젠을 통하는 게 더 안전할 텐데요.”

석연치 않은 의심을 담은 르베나의 말에 이번에는 루안이라는 호위가 답했다.

그는 생김새에 어울리게 무척이나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상단의 물건은 사람보다 더 많은 검문을 거치기에 상단들은 검문을 거치는 것보다 경계를 따라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상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칸 님께서는 여러 사람을 거치며 검문을 받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십니다. 또한 저희는 이미 여러 번 이곳을 지나며 몬스터가 없는 안전한 곳이란 걸 확인했기에 주저 없이 이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충분히 납득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검문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는 칸의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수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도 이들의 여정은 더 이상 계속되어선 안 된다. 언제 또 몬스터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길을 두 사람이 계속 가는 건 절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럼 간단하군요. 아시다시피 이 길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희도 어제부터 몬스터 무리를 마주친 게 벌써 두 번째입니다. 더 없지 않다는 보장 역시 없습니다. 그러니.”

하지만 르베나는 뒤를 이어 말할 수 없었다. 내 기분 좋은 미소로 르베나를 바라보던 그, 칸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희가 기사 분들과 동행을 해도 될까요?”

뜻밖의 이야기를 물어오는 칸의 다갈색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그리고 동시에 아벨디온 일행들에게서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이 이상은 무리 아닌가요, 룬 경?”

간절한 바람을 담아 뒤쪽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랄프의 힘 빠진 얼굴에 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한테 무력한 짐 덩이는 저걸로 이미 충분하니까.”

칸의 제안에 아벨디온 모두가 침묵을 지킨 이유. 짐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드록 일행만으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몬스터가 나타날 때마다 시녀들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기에 바쁜 그들을 지키느라 아벨디온은 진이 빠져 있었다. 이 이상 동행이 느는 것은 그들에게 힘만 들 뿐이다.

그때 마치 모두의 침묵을 예상이나 한듯 한 사람이 먼저 제 의견을 피력하며 나섰다.

“난 반대다. 나를 호위하기에도 손이 모자란 상황에서 저런 쭉정이를 둘이나 들이다니!!”

르베나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내내 침묵을 지키던 드록이었다.

설령 그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다고는 해도 그의 입은 걸레를 문 쓰레기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모두는 한마음으로 제발 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보기 좋게 모두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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