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85화 (85/276)

85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4)

“여름이라도 숲의 밤은 차.”

조금은 무뚝뚝한 아를의 말에 그의 망토를 치우려던 르베나가 그냥 제 어깨에 걸친 채 두었다. 추워서가 아니라 그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망토에서는 여름밤의 바람 냄새와 함께 어쩐지 그의 금안을 닮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이 났다.

“너 역시 보초가 아니잖아, 아를.”

르베나의 눈이 천천히 제 옆의 아를을 향했다.

피식 웃은 아를이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지며 말했다.

“우리 단장님께서 안 주무시는데 내가 어떻게 자겠어.”

아를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엔 잠시간 말이 없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만이 적막한 그들 주위 유일한 소음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의 일렁거림을 담아낸 르베나의 옆모습이 문득 마른 나뭇가지를 채우던 아를의 눈에 담겨왔다.

세운 제 무릎에 두 팔을 기대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가만히 르베나의 모습을 담던 아를의 금안이 서서히 감겨들었다. 그리고 곧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고요한 모닥불 앞 그의 목울대를 움직이며 퍼져나갔다.

“미안… 지켜주지 못해서. 자칸에서… 혼자 둬서. 바로 가지 못해서… 미안해, 르베나.”

너무도 작아 바로 옆에 있어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르베나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마음. 차마 르베나를 보고 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아를은 감은 눈 너머로 들리지도 않게 겨우내 전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가만히 제 눈을 아를과 맞춘 르베나에게서는 어떠한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장작에서 타오르는 불티의 여러 색만이 그녀의 얼굴을 파도처럼 쓸어올 뿐이었다.

자칸에서부터 내내 아한은 르베나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녀의 피를 보고 싶지 않았건만 다시 아를이 찾아낸 그녀는 의식불명의 피투성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를 또다시 혼자 두었다는 죄책감과 구하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 아를을 짓눌렀던 탓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며칠 동안 눈을 뜨지 않던 르베나의 모습이었다.

무감각하게 빛나는 그 붉은 눈이.

선명하게 빛나면서도 때때로 어떤 보석보다 찬란한 빛을 담는 그 붉은 눈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아를은 한 시간이 하루처럼 미쳐가는 것 만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몇 년 전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그는 한순간에 드록으로 인해 붉게 점칠 된 그녀의 온몸을 낫게 했던 그 날처럼, 너무도 쉽게 그녀를 낫게 했다.

그가 가진 신력으로 그녀를 치료하며 아무 것도 못 하고 서 있는 아를의 무능력함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아를 드 메이슨 경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군.”

아를은 그 날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이 후회스러웠다. 만약 그가 쥔 게 검이 아니었다면, 만약 그가 될 수 있는 게 기사가 아니었다면……!

‘만일 내 몸속에 르베나와 같은 마력이나 그와 같은 신력이 충만했다면 한 번 정도는 그녀를 지킬 수 있었을까……?’

한번 든 생각은 점점 그를 좀먹고 르베나에 대한 그의 마음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과연 그녀를 지키지도 못하는 그가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도 되는 걸까……?

누구보다 빛나는 그 붉은 눈에 감히 이렇게 뜨거운 마음을 품어도 되는 걸까……?

디오니스로 돌아와 젠픽스로 다시 떠나는 그날까지도 아를은 르베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고자 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그래서 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선명하게 붉은 눈을 가슴에 품기에, 가끔씩 지어주는 그 아릿한 미소를 욕심 내기에, 그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하지만 젠픽스를 향해 떠나는 첫날. 아를은 그녀를 포기할 수 없음을 알아버렸다.

본인에 대한 모욕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서 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 모든 힘을 풀어 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자신보다 제 품 안의 사람들을 지키겠다며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욕심내지 않을 수 있을까……?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미치도록 지키고 싶은데. 정말 모든 걸 다 내어주더라도 그 옆에 나란히 서고 싶은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는 모자랄지도 모른다. 더없이 강하고 언제나 혼자서 굳건히 버티는 그녀를 지키기에. 그는 베이라도 세츠도 아닌 기사니까!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는 이미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속에 속해있는데!

그리고 아직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옆에 설 자격은.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실력은, 그 이상의 노력은 결국 그가 만들어 가면 될 것이다.

생각과 마음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눈을 뜬 그의 금안에 여전히 타들어 가는 모닥불에 일렁이는 르베나의 눈이 들어왔다. 제가 눈을 감는 내내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졌다.

그 눈을 통해 겨우내 전한 그의 미안함이, 그래서 이제는 떨쳐버리고 싶은 그 납덩이처럼 무거운 짐이 그녀에게 닿았을까?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모자라더라도, 부족하더라도. 그만큼 더 노력해서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있고 싶어, 르베나.”

얼핏 애절하게까지 들리는 그의 음성이 조금은 떨려 왔다. 그럼에도 흔들림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르베나를 담으며 그 속삭임의 끝, 아를의 금안이 짙게 번져나갔다.

이 마음을 르베나는 모르겠지?

어떻게 해서든 너에게 닿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 너에게 가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 너를 지키고 싶고. 어떻게 해서든 너에게 당당해지고 싶은 이런 내 마음 따위는.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미친 놈일까?’

다시 피식 웃어버린 아를의 눈이 다시 감기었다. 따뜻한 모닥불과 그 앞을 지키는 르베나.

그리고 그 옆을 차지한 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

이보다 완벽한 날이 있을까. 용기 내 전한 진심이 르베나에게 완전히 닿지 못했다 해도, 르베나가 충분히 전해 듣지 못했다 해도 그에게 이 순간 이 밤은 완벽했다.

그리고 그렇게 감긴 아를의 귀에 그녀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충분해. 지금 그대로도 아를, 넌 충분히 내 옆을 지킬 자격이 있어.”

르베나의 작은 대답이. 아를을 향한 그 짧고 작은 대답이.

아를의 귀에 천둥처럼 꽂혀 왔다.

부르르.

순간 자신의 무릎에 기대 있던 아를의 팔이, 온몸이 떨려왔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제 품 안의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너를. 상처투성이의 온몸을 가져도, 제 사람에게는 희망을 전하는 너를.

‘르베나, 어떡하면 좋을까?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이렇게나 소중한데. 나는 정말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한없이 부족한 나도 괜찮다는 너를 정말…….’

감겨있던 아를의 금안에 가득 습기가 고였다. 태어나 단 한 번 도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았는데. 마음속 알 수 없는 추가 달린 듯 일렁거렸다.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치솟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녀의 눈을 닮은 시뻘건 물이 제 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괜찮다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지금 그에게 그 어떤 위로보다 힘이 되는 말임을 미치도록 다정한 그녀는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녀는 알기나 할까.

꾹 감은 아를의 눈꺼풀이 살짝 떨려왔다. 그러고는 꽉 잠긴 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또다시 그들의 주위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더 이상 적막만을 만들지 않았다. 타닥타닥 거리는 그 규칙적인 소리는 이제 제법 따뜻한 훈기와 너울거리는 다정한 빛을 만들어내며 모닥불을 둘러싼 모두를 품고 있었다.

언제나 제 사람들을 있는 힘껏 감싸 안는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처럼.

다음 날 아침,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저마다 개운한 얼굴로 일행들은 서둘러 짐을 꾸렸다.

아직 해가 트기 전, 부지런히 움직여야 마를한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조용히 검을 점검하고는 말고삐를 잡아 끄는 아를을 보며 다한 경이 그 옆에 서 자신의 말을 점검하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보이는군, 아를.”

다한 경의 말에 아를이 단조롭게 대답했다.

“언제나와 같을 뿐인데.”

피식.

아를의 대답에 다한 경이 작게 웃으며 본인의 말에 올라탔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자칸에서 돌아온 이후 뭔가 달라진 아를의 분위기를

다한 경은 누구보다 빨리 캐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를의 마음을 그는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괴감과

그럼에도 나아가고 싶은 호승심.

하지만 르베나를 볼 때마다 고개를 드는 무력감.

2년 전 뼈아픈 경험을 했던 다한 경의 모습이 최근 아를의 모습에서 보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를은 다한 경의 생각대로 그보다 훨씬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아마 이번 젠픽스가 아를이 그 기분에서 해방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란

그의 기대보다도 훨씬 빨리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본 아를의 얼굴은 정말 가까운 사람만 알아볼 수 있을만큼

들떠 있었다.

무표정한 듯 하지만 살짝 일렁이는 그의 금안.

그런 아를의 모습에 같은 부단장의 위치에 있지만 나이가 더 많아서인지 사뭇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티내는 것은 아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 작은 미소로 다한 경은 본인의 마음을 대변할 뿐이었다.

아를 역시 그런 다한 경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답지 않게 작게 웃어 보이고는 훌쩍 가볍게 말에 올라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진한 숲 내음이 아를의 마음에 가득 들어찼다.

어젯밤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맡았던 것 같은 내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왜인지 말의 배를 차는 그의 발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만이 채우는 일행의 여정은 어제 몬스터를 만나 잠시 흔들렸지만 다시 순조로웠다. 르베나는 일행의 책임자답게 가장 체력이 약한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드록 일행이 지치지 않았나를 틈틈이 점검하며 일정대로 움직여 나갔다.

사실 드록의 기사들은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아벨디온 기사단에 비해서는 체력도 실력도 볼품이 없었다. 결국은 무늬만 호위 기사인 그들까지 르베나는 다섯명의 짐을 추가로 얻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쯤 지났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문득 르베나는 그녀의 말고삐를 빠르게 잡아챘다. 그녀의 말이 갑자기 멈춰 서기가 무섭게 다한과 아를이 거의 동시에 말을 세우며 오른손을 들어 일행 모두를

정지하게 했다.

그리고 르베나가 마치 무엇인가에 집중하듯 미간을 잠시 모으고는 다한과 아를에게 물었다.

“…들리나?”

그러자 아를과 다한 역시 살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답했다.

“네.”

“응.”

대답과 동시에 셋은 모두 서서히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고는 조용히 수신호를 보내 뒤편의 기사들에게 곧 다가올 전투를 알렸다. 아벨디온은 다한과 아를의 수신호를 받자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네 필의 말에 올라탄 기사들이 시종들과 시녀들을 둘러싸 보호하는 듯 그들의 주위를 돌았으며 남은 네 명의 기사들은 언제라도 뛰어 나갈 수 있게 다한과 아를의 뒤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드록을 호위하는 기사들 역시 바짝 긴장하며 드록을 보호하듯 감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팔은 이미 공포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제 난생 처음 몬스터를 본 공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일행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고약한 냄새와 함께 지척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땅을 울리던 진동은 어느새 커다란 소리와 실체를 지니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젤!”

누군가의 경악과 함께 모두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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