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3)
드록의 얼굴이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르베나를 향했다. 분명 호기롭게 던진 조롱의 말이 벌써 귀에 닿았을 텐데, 지금 흉흉하게 저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을 보면 분명 그럴 텐데.
‘왜 저게 반응을 안 하지?’
르베나는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본인의 말에 다가가 안장이며 장비들을 점검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의 모습이 드록의 비뚤어진 화를 더 부추겼다.
그래서 드록은 절대 해선 안 되는 말마저 하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태연하게 굴어봐. 언젠가! 반드시 언젠가……! 어머님의 누명을 벗기고 내가 네년을 처벌할 테다. 그때가 되면……! 내 두 발로 네년의 얼굴을 짓밟고 지금 네년의 곁에 선 저들 모두를 도륙해 버리고야 말겠어! 그들의 피로 이룬 강물로 네년의 몸을 적셔… 억!”
기세 좋게 소리치던 드록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목을 손으로 더듬더듬 감았다.
언젠가 느껴보았던 압박감. 숨을 쉴 수도 눈을 깜빡 일 수도 없이 강하게 조여 오는 압도적인 힘.
그 힘이 다시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 힘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힘으로 그를 옭아맸다.
“으… 으흑……!”
질식을 견디다 못해 이제는 질질 침을 흘리는 드록의 몸이 마치 누군가 들어 올린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경악에 찬 그가 허공에서 바둥거리며 끅끅거리는 소리를 냈다. 흡사 살려달라는듯 들리는 소리에 그의 호위 기사들이 서둘러 허공으로 올라가는 그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더없이 강하고 압도적인 힘은 그들의 방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달칵……!
드록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천천히 제 말의 안장을 다시 채운 르베나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드록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한 걸음 또 한 걸음. 르베나가 드록에세 다가갈 때마다 그를 압박하는 무형의 힘은 거세졌다. 그리고 이내 르베나가 드록의 바로 지척까지 다가오자 드록은 이제 날짐승들이나 낼 법한 소리를 끼륵끼륵 내며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한번 올려본 르베나가 고저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나를 뭐라고 부르든지, 뭐라고 모욕하든지 너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갑자기 드록을 에워싼 르베나의 살기가 팽창하듯 뻗어나갔다. 그 팽팽한 살기는 드록을 지나쳐 그를 호위하려 발버둥치는 네 명의 호위 기사들마저 에워쌌다. 갑작스러운 살기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힘에 그들은 굴복하여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아벨디온 기사단이나 르베나 궁의 어느 누구도 그들이 느끼는 힘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르베나의 목소리에 스민 분노를. 그 분노는 조금도 정제되지 않고 생것 그대로 전달되는
고저 없는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옴에도 더없이 뜨거웠고 더없이 묵직했으며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만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사람들을 모욕하고 겁박한다면.”
“어윽……!”
드록의 입에서 쉴새 없이 침이 떨어지고 그의 눈과 코에서 뭔지 모를 맑은 것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르베나의 눈에서 얼핏 살의가 스치는 것을 드록의 호박색 눈이 그대로 담아내었다.
“다시는 그 더러운 입을 열지 못하게 해 주지. 너에게 베푸는 자비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툭……!
르베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드록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와 호위 기사들을 속박하던 힘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런 이들에게 등을 돌려 다시 말로 돌아가는 르베나의 표정은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 스민 분노의 한 자락조차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로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연신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는 드록과 호위 기사들의 모습만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줄 뿐이었다.
“…다들 준비됐으면 출발한다.”
어느새 말에 올라탄 르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그 목소리에 흠칫한 아벨디온 모두가 허둥지둥 제 말을 찾아 그 위에 올라탔다.
그들은 지금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했다.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그들의 단장이 르베나여서, 그들이 르베나의 사람들이라서.
정말 정말로 다행이라고.
그렇게 저마다의 안심과 불안을 품은 그들의 젠픽스 여정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일행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선두에는 르베나와 아를, 다한이 섰다. 이어 가운데에는 르베나 궁의 시종들과 시녀들을 말에 태운 아벨디온 기사들 몇이 위치했고 말단에는 나머지 기사단과 드록 일행이 뒤를 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조용한 길 위에는 수십 마리 말들의 말발굽 소리만이 들려왔다.
르베나에게 호되게 혼난 드록 일행 역시 그 뒤로 조용히 말을 타고 일행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간혹 드록 왕자가 심통난 시선과 말을 지껄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은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며 젠픽스를 향해 나아갔다.
이번 젠픽스는 마를한과 젠의 경계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대륙 정중앙에 젠이, 그 아래에 디오니스가 위치했다. 그리고 대륙의 최남단에는 따듯한 기후의 자칸이, 최북단에는 낮은 기후의 마를한이 존재했다. 사계절 내내 온화한 날씨를 유지하는 켄느 왕국만이 동쪽에 홀로 존재하는 만큼, 이번 주최지인 마를한은 그나마 이동이 편한 편이었다.
르베나는 일행과 함께 젠의 국경 바깥쪽을 통해 마를한으로 향했다. 젠을 가로지르면 거리상으로는 빠를 수 있었으나 검문 등의 절차로 인해 걸리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국으로 승격된 젠에는 부쩍 관광객이 많아져 그들과 함께 검문을 받으려면 날을 새야 할 수도 있었다.
비록 보름이 걸리는 길이었지만 이들의 일정은 장장 일주일 동안 순탄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캬아악!”
“쉬쉬익-!”
“끼에엑.”
사악.
녹색의 피가 진창을 이루고 겁에 질린 시종과 시녀들을 아벨디온이 감쌌다. 젠의 국경을 벗어나면서 몬스터들을 맞닥뜨린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몬스터들의 수가 그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거대한 크기의 트롤들이 주를 이룬 몬스터는 기사당 서너 마리씩 상대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까아악! 살려 주세요!”
“꺄아! 무서워!”
“다들 조용히 해!”
그리고 그때, 트롤 무리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시녀들을 향해 한 거구의 트롤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녀 루가 두려움을 참고 그들을 단속하긴 했지만 어림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몬스터들을 유인하여 싸우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라, 시녀들을 둘러싼 기사는 고작 세 명만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들 모두가 다가온 다른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곧 큰 그림자를 그려 내는 트롤의 방망이가 사납게 시녀들을 향했다. 저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녀들의 비명조차 극한의 두려움으로 멈춘 때.
검붉은 빛이 날카롭게 쏘아지더니 큰 방망이를 향해 날아갔다.
펑……!
큰 굉음과 함께 한순간에 트롤의 방망이가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드럽게 날아든 은빛의 검이 허공에서 터진 방망이를 보며 멍하니 서 있던 트롤의 목을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크륵… 크르륵……!”
목에 찔린 검에 가래 끓던 소리를 내던 트롤이 순간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동시에 시녀들을 지키던 세 명의 기사들이 상대하던 트롤을 해치우고 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단장님!”
시녀들을 지켜낸 그녀, 르베나를 부른 기사의 목소리에 르베나가 휙 뒤로 돌아 사람들을 살폈다. 그녀의 붉은 눈이 겁에 질린 시녀 루와 그녀 곁의 다른 이들을 빠짐없이 살펴보고는 물었다.
“다친 곳은?”
르베나의 물음에 루와 시녀들이 무엇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홀연히 그들을 덮자 르베나가 뒤를 돌았다. 순간 하나로 묶인 르베나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찰랑거렸다. 그리고 머리카락보다 빠른 그녀의 검이 이미 몬스터를 세로로 갈라놨다.
쩌억… 쾅……!
세로로 갈라진 몬스터가 양 옆으로 벌어지자 그 사이로 싸늘한 금안의 아를이 보였다.
하지만 아를은 르베나가 그를 부를 새도 없이 곧바로 자리를 떠 다른 몬스터에게로 갔다.
언제나 싸우던 중에도 르베나의 안위를 묻고 함께 등을 맞대던 평소의 아를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빠르게 사라지는 아를의 뒷모습을 한번 바라본 르베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는 곧 나타났을 때처럼 싸움이 한창인 다른 곳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자리를 지켜라!”
그녀의 기사들에게 짧은 말만을 남기고. 그리고 더 이상 시종들과 시녀들은 소리치지 않았다.
다만 발갛게 물든 얼굴로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는 검붉은 흔적만을 열심히 눈으로 좇았을 뿐이다. 르베나 팬클럽의 발촉대가 선발된 어느 날이었다.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지친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와의 접전 이후 일행은 더 이상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깔고 쉬기로 했다.
기사들도 몬스터들과의 접전으로 조금은 지친 상태였고 무엇보다 시녀들과 드록 왕자가
거의 혼이 빠져나가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행은 이른 저녁을 먹고 모두 낙엽 잎을 침대 삼아 지친 몸을 뉘었다.
몇몇 기사들은 밤새 보초를 서기 위해 교대로 잠을 청했고 어느새 밤은 깊어져 숲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와 동물들의 울음소리만이 그들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알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보초를 서는 몇몇의 기사들을 찬찬히 둘러본 르베나가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닥, 타닥……!
마른 장작을 타고 오르는 모닥불의 불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와 르베나의 몸에 제 망토를 걸쳐준 누군가가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자리했다. 성큼 채워진 옆자리의 온기가 따뜻했다. 온기만큼이나 이 밤에 어울리는 금안의 주인, 아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