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2)
“우리가 드디어 젠픽스라니……!”
“이거 꿈 아닙니까, 룬 경!”
“이것도 챙겨야 해, 루!”
조금 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젠픽스로 향하는 아벨디온 기사단과 르베나의 무도회 참가를 위해 따라가는 일부 외궁의 시녀들로 이루어진 무리에는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 한창이다. 아벨디온 기사단과 외궁의 시녀들은 같은 사람을 모시는 이유 탓인지 유독 서로를 잘 챙기며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첫 젠픽스 참가로 모두가 들떠 있는 그때, 부드러운 분위기를 단숨에 깨 버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그럭, 덜그럭.
“드록 왕자님의 마차다! 모두 물러나라!”
들려오는 소리에 왕궁 입구에 서 있는 일행에게서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적막 사이로 제법 크고 화려한 모양의 마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기사 복 차림의 드록 왕자였다.
그리고 그런 드록 왕자를 보는 모두의 눈에 몹시 언짢은 기색이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드록 왕자는 3년 전 세나르 왕비의 폐위와 함께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다. 든든하게 버텨주던 외가, 루치아 공작마저 공작직을 박탈당하고 자취를 감춘 이후, 그는 살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감사한 이름뿐인 왕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망가져 갔다. 그 전에도 망가져 있긴 했지만 정도가 더해갔다. 내내 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고 주변의 시녀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방으로 끌어들여 못된 짓을 일삼았다. 이를 알게 된 제노스 왕의 분노로 어느새 드록의 시중을 드는 이는 모두 남성 시종으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 년 후. 폐인이 되어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던 드록이 갑작스레 제노스 왕에게 한 가지를 청하였다.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폐하.”
때는 르베나가 검기를 익히며 다한, 아를과 함께 훈련을 시작했을 때였다. 제노스 왕은 드록 왕자가 르베나를 시샘하여 같은 것에 도전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드록은 그에게 있어 미워도 자식이었다.
세나르의 배에 잉태된 순간부터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아비의 정을 주지는 못했지만 제노스 왕은 더 이상 제 핏줄들에게 후회와 원망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르베나와의 상의 끝에 그에게 기사 시험을 볼 것을 허락했다.
그 결과, 그는 현재 제4기사단의 기사 단원이 되었다.
“폐하, 저도 디오니스의 왕자로써 젠픽스가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런 그가 최근 젠픽스 동참을 요구한 것은 사실 제노스 왕으로써도 굉장히 난감한 일이었다.
드록이 기사로써 참가하는 건 불가하지만 만약 왕족으로써의 참가를 원한다면 왕의 입장에서 이를 막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던 탓이다.
“그렇게 해 주시죠. 다만 폐하께선 크론과 함께 나중에 출발하실 테니, 드록 왕자는 저희 일행에 넣는 걸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르베나의 배려로 쉽게 일이 해결되었다. 르베나는 분명 제노스가 드록 왕자의 젠픽스 참여를 막고 그로 인해 사이가 벌어지게 될 것을 예측하고 이를 막기 위해 먼저 제안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어른인 그보다 더 속이 깊고 사려 깊은 르베나에게 제노스 왕은 마음 깊이 고마워했다.
그리고 현재. 하루라도 빨리 먼저 젠픽스에 도착해 몸을 풀기 위해 모두 말에 올라탄 기사단 일행 사이로 드록 왕자가 마차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젠픽스에 왕족으로 참여하는 그가 당당히 기사복을 입고 말이다.
마차에 탄 드록의 거들먹거림을 보던 다한이 보다 못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왕자님, 뭔가 전달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모두 빠른 일정 소화를 위해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이동합니다. 동행하는 시종과 시녀들까지도 모두 기사들의 말에 함께 타고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다한의 말에 드록 왕자가 그를 한번 흘겨보고는 그의 기사복에 유독 시선을 오래 두었다.
여느 기사복과 같이 흰색의 기사복은 단정했다. 다만 그의 어깨에는 검붉은 회오리가 생동적으로 그려진 표식이 붙어 있었고 양 어깨에서 이어지는 망토는 그 표식의 회오리만큼이나 멋지고 고급스러운 검붉은색이었다.
누구의 피를 묻혀도 티가 나지 않을 검붉은 망토.
그것을 어깨에 두른 다한을 보는 드록의 눈에 불쾌한 빛이 일렁거렸다.
“전달은 제대로 받았다. 하지만 난 그 거리를 말로만 이동하지 못해. 왜냐하면 불편하니까! 그래서 나와 내 호위 기사들은 모두 마차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렇게 알도록.”
그의 말에 모두의 눈이 차게 얼어붙었다.
겨우 함께 가는 주제에 마차와 호위 기사라니. 드록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모두 답답함을 참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다한은 모두를 대표해 다시 한번 드록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마차의 이용은 불가합니다. 저희 단장님께서도 말을 이용하시니, 왕자님께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는 길 내내 저희 기사단이 동행하니 별도의 호위 기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왕자님.”
다한의 말에 드록 왕자가 피식 얕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의 천한 단장 계집이 말을 타고 간다고 해서 나까지 말을 타야 한다는 거냐? 정말이지 다들 웃기고 자빠졌군.”
순간 드록 왕자가 조롱의 말을 내뱉자마자 그들의 주위에 시린 기운이 내려앉았다. 아벨디온 기사단의 몸에서 한순간 살기가 뻗쳐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르베나 궁의 시녀와 시종들마저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에 드록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고작 내 한마디에 이렇게 살기를 쏘아내면서 호위무사가 필요 없다고? 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니들이 날 죽일지 내가 어떻게 알고! 어?”
그의 말에 다한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아벨디온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곧 그의 엄격한 다갈색 눈에 단호한 빛이 어리자 순식간에 그들에게서 살기가 거둬졌다. 이에 드록이 분한 듯 이를 으득 소리가 나게 세게 물며 비아냥거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어? 그 더러운 마녀 계집이 왜 나를 이 일행에 함께 오라고 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가다가 사고로 위장해 날 죽이려는 그 더러운 속을 내가 모를 것 같냐고!”
악에 받친 드록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모두 똑똑히 들어. 만약 젠픽스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죽거나 다치면 너희는 모두 왕족 시해죄로 사형될 거야!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냐고!”
핏발선 그의 외침에 불구하고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없는 싸가지에 이어 정신착란까지 장착한 그에게 이 이상 무슨 대답이 필요하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만큼은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들은 모두는 슬슬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행의 구석에서 금방이라도 드록 왕자를 베어버릴 듯한 아를의 번뜩이는 금안을 본 다한은 서둘러 한 발 앞으로 나가 말했다.
“일행 중 누구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르베나 단장님께 목숨을 건 기사들입니다. 저희 앞에서 그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예의를 차리긴 했지만 르베나를 입에 담는 그 순간 다한의 눈에 싸늘한 빛이 감도는 것을 드록 왕자가 못 봤을 리 없다. 곧 드록의 눈이 르베나의 기사들을 향했다.
저마다 엄청난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멋들어지게 아벨디온 기사단의 옷을 차려입은 기사들.
그중에는 드록이 제 호위 기사로 삼고 싶었던 기사들도 꽤 있었다.
메이슨가의 아들, 천재적인 기사 아를부터 어릴 때부터 곁에 두고 싶었던 다한 경까지.
그가 탐내던 모든 인재들이 르베나를 찬양하며 한곳에 뭉쳐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드록 왕자의 속에서 다시 천불이 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드록은 멈추지 않았다.
“아 더러운 마녀계집이라는 소리는 내가 좀 심했나? 차라리 근본도 모를 계집이라거나,
아니면 아무데나 몸을 구르는 더러운 계집 정도가 더 어울리려나? 크크크크크!”
드록이 다시 던진 말에 결국 이번에는 모두가 참지 못했다.
“…이!”
“……!”
저마다 이를 악물고 일제히 무기에 손을 올리는 아벨디온 기사단의 기세가 흉흉했다.
그리고 이번엔 차갑게 눈을 내리깐 다한 마저 그들을 말릴 생각이 조금도 없어보였다.
이제 감히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이제 디오니스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것이 지난 시간동안 그녀가 흘린 피와 땀에 대한 보답이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건 기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하지만 눈앞의 드록 왕자는 여전히 더러운 제 입을 단속하지 못하는 듯했다.
순간 분위기가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자 드록이 데려온 호위 기사 네 명이 서둘러 그를 둘러쌌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탓이었다.
누구 하나의 숨소리, 침 넘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들 중 누구 하나라도 움직이면 그것이 곧 신호가 될 터였다. 그렇게 숨 막히는 긴장과 싸늘한 예기를 탄 공기가 빡빡하게 팽창되어 갈 때,
“그만.”
고저 없는 목소리가 터지기 직전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들어왔다.
펄럭.
검붉은 망토가 휘날리며 칠흑처럼 검은 머리가 함께 나부꼈다. 여느 때 보다 붉게 침잠된 붉은 눈동자가 다한과 아벨디온 기사단을 한 번씩 훑었다.
그리고 그녀, 르베나의 눈이 아를과 마주쳤을 때, 드록으로 인한 분노로 점칠 되어 있던 아를의 금안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런 아를에게 오래 시선을 두지 않고 말했다.
“모두 제자리로. 출발 준비를 한다.”
깔끔한 르베나의 명에 모두들 언제 그랬냐는 듯 살벌한 기세를 거둬들였다. 르베나에 대한 아벨디온 기사단 열 명의 충성심은 이토록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저마다 살며시 걱정스러운 마음에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보다 청력이 훨씬 뛰어난 베이라인 그녀가 드록 왕자가 내뱉은 더러운 말들을
못 들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나는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드록과 그의 뒤에선 호위 기사, 그리고 마차를 한번 훑어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마차는 안 됩니다. 말을 타십시오. 그리고 호위 기사의 동행은 정 불안하다면 허락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르베나가 용건이 끝난 듯 바로 뒤돌아 본인의 말로 향했다.
자신에 대한 모욕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르베나의 눈. 르베나에 대한 아벨디온 기사들의 절대적인 충성심. 그리고 그 앞에서 모든 것이 숨 쉬는 자연스러운 르베나의 모습.
그 모든 것이 이 순간 드록에게는 더없이 견디기 힘든 현실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왜 네까짓 년의 말을 들어야 하지? 근본도 모르는 더러운 계집이 기사단장 자리를 꿰차더니 이젠 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어?”
그래서 드록은 끝없이 더러운 말들로 르베나를 도발했다.
르베나는 변하면 안 됐다. 그녀는 예전처럼 드록의 말에 상처받고 눈물을 흘러야 했다.
르베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저들 모두가 그의 것이어야 했다. 심지어 르베나가 두른 검붉은 망토는 지금 드록의 어깨에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 만약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면 르베나에게도 허락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공평하고 바람직한 디오니스였다.
적어도 드록의 생각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