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젠픽스 편 (1)
“다음 해 젠픽스에 아벨디온 기사단이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밤이라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르베나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자칸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해 입은 상아색의 머메이드 라인 드레스. 그곳에서 반짝이는 진주가루가 이 밤을 비추는 별빛 같았다. 그리고 이 밤에 잘 어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듯 잠시 멈칫한 르베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벌써 젠픽스가 다가오고 있군요.”
이곳, 자칸이 더워 그렇지 벌써 디오니스에 겨울이 왔다는 사실을 되새긴 르베나의 눈에 약간의 기대감이 어렸다. 르베나의 옆에 앉아 자신의 벽안을 몇 가닥 뺨 위로 흘러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에 고정한 루드바하 역시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움직여 말했다.
“아시겠지만 젠픽스는 다섯 개 왕국의 왕과 후계자, 그리고 국가의 대표 기사단이 함께 참가하는 이른바 왕국연합회의입니다. 각 나라의 주요 현안과 이슈에 대한 회의를 하는 것이 주된 쟁점이라고 하죠.”
루드바하의 부드러운 설명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아는 젠픽스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이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흩날렸으나 르베나는 이마저도 모르는 듯했다.
젠픽스. 다른 말로 하면 왕국연합회의. 3년을 주기로 여름에 시행되는 젠픽스가 벌써 내년으로 다가왔다.
계속된 신마전쟁으로 젠과 디오니스를 선두로 한 다섯 개의 왕국은 이유도 모를 전쟁을 쉬지 않고 치러야만 했다. 그렇게 언제일지 모를 때부터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배척했지만 그래도 나라와 백성의 생존 나아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상호간 무역과 교역을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겉으로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는데, 그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가 바로 젠픽스였다.
그리고 젠이 제국으로의 승격을 선포하고 신마전쟁이 종료된 후 처음으로 다시 열리는 젠픽스가 내년이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진정한 친목을 다지는 계기가 될 터였다.
“이번엔 드디어… 디오니스가 참여하게 됐네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는 르베나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에 그녀의 눈이 설렘으로 작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게 귀여워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그려졌다.
사실 신마전쟁이 사실상 젠의 승리로 끝나며 급격히 나라가 기울어진 디오니스는 그동안의 젠픽스에 참가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못한 것이다. 젠픽스엔 왕족을 지킬 정예기사들을 대동해야 했는데 제노스가 후벤을 위시한 기사단을 데리고 갈 경우, 세나르가 르베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디오니스는 평화의 발돋움을 하고 있으며 그들에겐 하나의 뜻으로 통일된 기사단이 있었다. 심지어 젠의 유파시드와 협력하는 기사단, 아벨디온이 말이다.
문득 생각에 잠긴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얼핏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왜인지 말을 하는 그의 목울대가 한번 꿀꺽 삼켜지는 것이 르베나는 느끼지 못할 정도의 세심한 긴장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렇다면 젠픽스 마지막 날 열리는 무도회에 그대의 파트너가… 필요하겠군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이 또다시 생각지 못한 문제를 들었다는 듯 잠시 멈칫했다.
‘무도회라.’
디오니스에서 보통의 귀족아가씨가 열 입곱 살에 치르는 데뷔탕트조차 르베나는 아직 치르지 않았다. 이제껏 디오니스의 공주가 아니라 디오니스의 기사이고 싶은 르베나로써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마 젠픽스에는 디오니스의 후계자로써도 참석해야하는 만큼 데뷔탕트 여부와 관계없이 무도회에 참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곳에 파트너가 필요한 게 맞긴 하네.’
하지만 그녀에게 무도회 파트너란 그저 먹어야 할 식사를 하는 것처럼 때마다 함께 해야 할 의미 없는 상대일 뿐이었다.
다만 르베나가 멈칫한 이유는 그녀가 잊고 있던 파트너란 자리를 떠올려서이기도 하지만
루드바하 때문이기도 했다. 본인도 잊고 있던 파트너를 몇 년 만에 만난, 그것도 젠의 황제이자 세츠들의 왕인 유파시드가 챙기는 사실이 사뭇 신기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제라 그런가 워낙 남의 일에도 세심하군.’
담백하게 생각을 끝낸 르베나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길 뿐이었다.
“음…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대답에 루드바하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럼 혹시 파트너는… 정하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르베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또다시 멈칫했다.
이 짧은 산책 중에 루드바하와의 대화로 인해 그녀는 꽤 많은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르베나가 젠픽스에 참여하는 비중은 디오니스의 공주로써가 20이라면 아벨디온의 기사단장으로써가 80이었다. 당연히 르베나는 무도회든 파트너든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루드바하의 발언으로 처음 인식한 정도였다.
당연히 본인은 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제노스 왕과 함께 입장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르베나의 당혹스러움을 읽은 루드바하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렇다면 제가 요청해도 될까요, 르베나? 그 날 제가 그대의 파트너로… 입장하고 싶습니다.”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그의 요청에 르베나의 눈이 그를 향했다. 아무리 무지한 르베나라도 보통 무도회의 파트너는 의미 있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녀는 무도회를 싫어했지만 일국의 왕이었던 적 역시 있었으니. 물론 그때는 가스트나 후벤이 항상 자처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아를에게 항상 듣던 말을 남을 보며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가족도, 르베나의 기사도, 심지어 연인도 아닌 그가 파트너를 자처하는 이유를 르베나는 정말 몰랐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고심에 잠기듯 가늘어졌다. 루드바하가 본인에게 파트너를 요청한 저의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하나였다.
‘루드바하가 나에게 사심이라…….’
르베나는 언제나와 같이 옅은 미소를 띈 얼굴로 본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사심을 가지고 르베나에게 이런 요청을 한 것이라면 그녀의 당연히 대답은 싫습니다,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누구나가 원하는 권력과 위상 그리고 힘이 있다. 무엇보다 어떤 절세의 미인도 한 눈에 반하게 할 정도의 외모까지 지녔다. 남의 외모에 큰 관심이 없는 르베나가 보기에도 그의 외모는 모든 여성들을 설레게 할 만큼 완벽해 보였으며 큰 키와 온몸 가득 배어 있는 근육질의 단단한 몸 역시도 제 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탐(?)이 났다.
하지만 그런 그가 르베나에게 연인이 되기를 청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파트너를 고집하는 이유라…….’
르베나의 눈이 또 다른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을 때였다.
두근두근.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 루드바하의 심장은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마지막 만찬이 끝난 후 그녀에게 산책을 하자고 권유한 것도, 자연스럽게 젠픽스 얘기를 꺼낸 것도. 모두 이 제안을 하기 위한 그의 수많은 시뮬레이션 중에 하나였다는 것을 그녀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던져진 물음에 답을 기다리는 그의 심장은 지금 과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를 탐색하는 그녀의 붉은 눈도, 그 시선이 던지는 약간의 경계를 담은 빛도, 그리고 대답을 생각하는 이 잠시의 순간도.
평생 무엇도 두려워해 본 일 없던 그를 이토록 긴장되고 두렵게 한다는 사실을, 과연 그녀가 알까?
‘제발 몰랐으면 좋겠군.’
세상 모든 이가 알아도 르베나만큼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며 루드바하는 제 손의 식은땀을 모른 척 했다. 그리고 드디어 생각에 잠겨있던 르베나의 붉은 눈이 이채를 바랬다.
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는 루드바하의 마음에도 간질간질한 기대가 함께 샘솟았다.
“아, 제가 베이라이기 때문이군요! 유파시드께서 선포하신 대로 저와의 친분으로 베이라와 세츠가 더 이상 적대관계가 아니란 것을 알리기 위해… 젠픽스 파트너로 그걸 보여주기 위함이겠군요……!”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알아냈다는 듯, 루드바하의 흑심은 일절 의심하지 않는 르베나의 반짝이는 눈. 그 눈에 루드바하는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절대로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니지만 어쩐지 용기 낸 그의 새카만 흑심마저 순수한 취급을 받는 이 상황이 왜인지 기쁘지 않았다. 그의 순수한 신력이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티 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하… 좋습니다. 아, 그리고 르베나. 약속을 잊은 것 같군요.”
그의 말에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어! 라고 생각한 르베나가 약속이란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가 말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생각난 탓이었다.
순간 그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얼굴에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벽안에 어린 빛은 르베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주고 싶은 그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곧 루드바하가 터질 듯한 제 심장의 박동이 르베나에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자칫 여유롭게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
그의 질문에 르베나가 곧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인 르베나를 원한다면 결코 수락할 수 없겠지만, 동맹 관계를 위한 제의를 베이라로써의 르베나는 거절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시지요. 유파… 아니. 루드… 바하.”
어쩐지 어두운 밤 조금은 붉어진 르베나의 귀를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에 이제껏 누구도 그에게서도 보지 못한 빛이 차올랐다.
그 빛은 눈앞의 여성을 향한 더없는 사랑의 눈빛이기도 했고 생전 처음 보는 귀한 것을 바라보는 아주 생경한 눈빛이기도 했으며 누구에게도 이 순간을 보여주기 싫다는 어둡고 끈적거리는 소유의 빛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르베나의 붉은 눈이 저를 향하자 그는 또다시 환하게 웃으며 사심이라고는 일도 없는 말간 눈으로 답하였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그렇게 서로 전혀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진 그들의 밤이 자칸에서의 마지막 밤과 함께 지고 있었다.
* * *
‘그게 벌써 작년인가.’
사나와 루를 비롯한 외궁의 시녀들이 잔뜩 쌓아놓는 수십 벌의 드레스를 보며 르베나가 문득 루드바하와 보냈던 자칸에서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물론 제노스 왕과 후벤 그리고 아를이 젠픽스 파트너를 묻는 이야기를 할 때 대답으로 내뱉긴 했지만 딱히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때마다 하나같이 썩어가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르베나를 고개를 갸웃했다.
빤히 보이는 동맹관계에 대한 그의 마음이 자신을 아끼는 자들에게는 썩 좋아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디오니스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문득 르베나의 시선이 제 방의 큰 창을 통해 보여지는 디오니스 왕궁의 정문을 향했다. 시끌벅적한 기분 좋은 설렘이 가득 느껴졌다. 동시에 불어오는 초여름의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르베나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이걸로 넣을까요, 사나 님?”
“그 구두도 함께 챙기렴, 루. 아 이것도!”
조금은 시끌벅적한 외궁의 제 방도,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왕궁 정문의 소리도… 그리고 이 바람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이제 스무 살.
르베나가 맞이하는 생애 첫 젠픽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