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81화 (81/276)

81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30)

“이렇게 떠나면 다음에 보는 건 젠픽스겠군.”

많은 이들을 거느리고 배웅을 나온 자칸 왕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날 처럼 사막의 바람이 무덥게 부는 날 아침, 자칸에서의 일이 마무리되었기에 아벨디온 기사단은 이제 그만 자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자칸의 영웅이 된 아벨디온 기사단을 마중하러 나온 많은 이들의 아쉬운 얼굴이 아벨디온을 기분 좋게 웃게 만들었다.

어젯밤 급히 젠으로 떠난 루드바하를 제외하고 바흐란과 자칸의 왕, 그리고 눈물을 그렁그렁 단 스릴 공주까지도. 왕의 간략한 인사가 끝나자 스릴 공주가 성큼 나와 르베나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젠픽스 때 꼭 만나요, 언니. 저 꼭 젠 마법학원에 입학해서 언니의 뒤를 이을 훌륭한 베이라가 될게요! 그때는 꼭 언니 옆에 서게 해 주세요. 그래 주실 거죠?”

언제 다시 르베나의 호칭이 언니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맑은 녹안을 빛내며 친근하게 구는 스릴 공주가 르베나는 결코 싫지 않았다.

울며불며 베이라가 되겠다고 떼를 쓰며 만찬장에서 끌려 나간 스릴은 요 이틀 새 아버지인 자칸의 왕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눈 듯했고, 그사이 르베나와 루드바하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결국은 나쁘지 않은 결론을 맺은 듯했다.

‘또 한 명의 베이라 공주라… 나쁘지 않네.’

그런 생각을 하며 르베나가 눈앞의 스릴 공주를 바라보았다. 맑기만 한 녹안에는 더 이상 어떠한 두려움도 자책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앞을 향해 나아갈 희망과 의지만이 엿보았다.

그 때문일까, 스릴 공주를 보며 르베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 것은. 덩달아 그 모습에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달라진 것 역시도. 그녀의 입가에 작게 지어진 그 미소에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는지 르베나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대박……. 지,진짜 예쁘다……!”

여자인 스릴 공주마저 르베나의 옅은 미소에 넋이 나간 듯 입을 헤 벌렸다. 그 때 르베나의 곁에 바흐란 왕자가 다가왔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조금은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와 르베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르베나가 그의 손을 바라보며 선뜻 악수를 하지 않자 그가 재촉하며 말했다.

“자칸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아. 악수를 청하는 상대는 오직 나와 실력이나 위치가 비등하거나 더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뿐이야. 같은 검을 쓰는 사람으로써, 그리고 스릴의 오빠로써 또 자칸의 왕자로써 청하는 악수야, 이건.”

그의 말에 르베나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르베나의 손을 잡은 그가 쉽사리 놓지 않고 가만히 르베나를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이에 한 마디 하려고 하는 순간 바흐란 왕자의 얼굴이 훌쩍 르베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서 나온 서늘한 숨이 느껴질 정도의 아슬아슬한 거리.

“아니, 저 자식, 아니 왕자가!”

“당장 떨어지지 못해! 아니 못합니까!”

아벨디온의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숱 많은 르베나의 긴 속눈썹은 어느새 바흐란의 얼굴에 닿을 듯했고 무감감한 르베나의 붉은 눈이 가까이 다가온 바흐란의 녹안을 지그시 응시했다.

모두가 바흐란의 행동에 난리를 쳤지만 르베나는 태연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의 얼굴을 본 바흐란이 애석한 듯 고개를 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닌가 보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그 붉은 눈이 나를 보며 동요하게 만들 거야.”

뜻 모를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가 답했다.

“결투를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하지.”

이어진 르베나의 답을 들은 바흐란이 마치 뜻밖의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멈칫하다가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그런 바흐란을 르베나가 미친놈이라도 되는 듯 바라보았지만, 바흐란은 계속 숨넘어가듯 꺽꺽 웃어 젖히며 아를을 한번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하하. 하하하… 진짜 다행히도 우리 공주님은 아직 너무 순진하네. 누군가는 속이 썩어들어가겠지만,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하하하하하!”

바흐란의 모습을 슬쩍 찌푸린 인상으로 바라보는 르베나에게 그가 겨우내 웃음을 그치고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슬쩍 닦아내며 호쾌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대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을 거야. 대신 르베나 그대가 나를 보고 다른 걸 하고 싶게 만들 거야.”

말을 마친 바흐란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맑고 진득하게 빛나는 녹안의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은 꽤 많은 여성들을 설레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르베나는 감흥이 없었다.

‘몸의 밸란스가 좋아 검을 잘 쓰는 건가. 다음 결투때는 그걸 역이용 해야겠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말이다. 또한 말의 뜻을 오해하는 르베나와는 다르게 바흐란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아벨디온 기사단은 하나같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감히 우리 단장님께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그들이 모두 이렇게 합창을 하는 듯했다. 특히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어느 금안에서는 바흐란을 뚫을 듯한 레이져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아벨디온을 한번 보고 속없이 웃어 보인 바흐란을 뒤로 하고 르베나 일행은 드디어 자칸의 왕궁에서 등을 돌렸다.

“언니~ 곧 봐요! 언니 사랑해요~~!”

꽤 멀어질 때까지 들려오는 스릴 공주의 목소리에 르베나의 얼굴에는 여전히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래의 나라 자칸.

그곳에서의 일정은 겨우 일주일 남짓이었지만 르베나에게 그곳은 아벨디온과 함께 첫 발자국을 남긴 뜻깊은 왕국이 되었다.

그렇게 다시 긴 여정을 거쳐 디오니스로 돌아온 아벨디온 기사단은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한 달 후에 열리는 젠픽스를 위해 곧 여정을 떠나야 했고 이번에 처음 젠픽스에 출전하는 기사들이 많은 만큼 다한과 아를을 선두로 한 기사단은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르베나는 연무장을 찾은 가스트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기사단과 함께 훈련한 르베나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조금은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그 열을 식혀 주는 듯했다.

“팅! 티잉~!”

옆에서는 팅과 티격태격 놀고 있는 아한이 자리했다. 팅은 르베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기 싫은지 아한의 손에서 제 자그마한 몸을 빼내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한은 마력으로 팅을 붙들어가며 놀고 있었다.

“아벨디온이 젠픽스에 나가다니, 꿈만 같군요.”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라의 선한 힘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검기를 쓰는 아벨디온의 젠픽스 참가는 이미 그 첫발을 딛은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아벨디온의 훈련을 지켜보는 르베나의 눈에 만족스러움이 어렸다가는 어두운 빛이 스친 건 그때였다.

“자칸에서 유파시드를 만났다. 가스트, 그대 얘기를 하더군.”

갑작스레 꺼낸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가 잠시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칸에서 그녀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가스트는 아한과 디오니스의 외진 마을에서 사람들을 돕고 있어 연락이 늦게 닿았다. 그가 급히 출발하려 할 때 이미 해결됐다는 연락을 받긴 했다.

‘그게 유파시드일 줄이야……!’

루드바하와의 만남을 얘기하는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는 다소 놀란 심정을 보였지만 곧 언젠가 없어진 르베나를 찾던 살기 어린 그의 눈빛을 기억해 냈다. 이내 가스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하지만 르베나가 먼저였다.

“가스트, 넌 내가 왜 기사가 되려 한 줄 아나?”

갑작스럽고 뜻 모를 그녀의 물음에 가스트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인자하면서도 끝 모르게 깊은 회색 눈으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지키고 싶으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공주님의 소중한 이들과 디오니스를. 타고난 권력과 핏줄이 아니라, 순전히 공주님의 노력으로 얻은 힘으로 말입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느리게 답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군.”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가 의문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자 그 시선을 느낀 르베나가 말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그들의 목숨과 안전이 아니다. 그것을 나아가 난 그들의 일상을… 지키고 싶은 거다. 궁 안의 살림을 도맡아하며 소리도 지르고 웃기도 하는 사나의 일상을, 모든 기사단을 거느리면서도 끊임없이 검술을 위해 노력하는 후벤의 일상을, 디오니스의 재건을 위해 다시 힘을 내시는 할아버님의 일상을 말이다.”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의 인자한 얼굴에도 말간 미소가 피어났다.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르베나가 이런 얘기까지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듣게 된 르베나의 이야기에 가스트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가스트. 내가 지키고 싶은 누군가의 일상에 그대와 아한이… 포함되어 있을까?”

르베나의 붉은 눈이 연무장을 벗어나 옆에 앉은 가스트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에 순간 가스트의 심장 깊은 곳이 따뜻하게 저려 왔다.

“물론… 이라고 대답하면 너무 오만한 늙은이의 생각 일는지요? 하하.”

웃음기 어린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아주 약간의 미소를 담은 채 다시 앞을 향했다.

앞을 향한 르베나의 눈이 붉게 일렁이는 듯했다.

“나는 사나와 후벤. 그리고 그대와 아한의 일상을 지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 기사가 되었고 그대들을 위해서라면 나의 무엇도 아끼지 않을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나의 선택, 내가 정한 나의 길일뿐이다.”

그 거친 듯한 말속에는 가스트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어떤 회의가 깃들어 있었다.

“내가 그런 길을 택했다고 해서 그대들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시키거나 참을 필요는… 전혀 없단 말이다.”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르베나가 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유파시드님을 통해 들으신 게로군.’

그가 먼저 유파시드에게 받은 제안과 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해 르베나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모르길 바랐건만.

그런 가스트의 마음을 뒤로한 채 르베나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다시 들려왔다.

“그러니 가스트, 그대가 가야 할 길에 나를 선택지로 두지 말아라. 그대들이 나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기 때문에 그대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에 지키는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르베나가 다시 입을 뗐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르베나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대들은 나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 삶을,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

르베나의 붉은 시선이 자잘하게 떨리는 가스트의 회색 눈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그것만이 나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다.”

알고 있었다.

가스트와 후벤 그리고 사나가 선택한 그들의 주인이 얼마나 속 깊고 따뜻한 소녀인지.

그녀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하고 정의로운 사람인지. 그들이 그녀를 주인으로 택했음에도

그녀는 그들에게 이제껏 어떠한 희생이나 봉사 한번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하지만 가스트가 오늘 그녀를 찾아온 건.

유파시드의 제안과 그에 대한 가스트의 거절의사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르베나가 유파시드의 얘기를 꺼낸 순간부터 가스트는 어쩌면 르베나가 그 제안에 대해 알고 있단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공주님이라면 분명 본인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겠지.’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가스트는 본인의 거절 의지를 제대로 밝히고자 했다.

루드바하가 잠시 그녀의 편을 들었다고 해서 그녀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진 것은 아니었으니.

공주이자 베이라로써 기사의 길을 택한 그녀는 앞으로도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때로는 그녀를 시기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질 것이고 때로는 그녀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속삭임에 바싹 타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공주님은 언제나처럼 저 여리고 작은 몸으로 혼자 그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시겠지.’

그래서 머물 것이다. 그도 후벤도 사나도. 어린 아한마저.

그녀에게 방패가 되어주고 쉼터가 되어주기 위해. 그들의 작고 어린 공주가.

그들에게는 아마도 영원히 작고 여리게만 보일 공주가. 언제라도 제 한 몸을 기대 쉴 안식처가 되어주기 위해.

그러기 위해 젠 마법학원자리의 거절은 그와 아한에게 크게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스트는 보다 쉽게 거절할 생각을 르베나에게 전할 수 있다 믿었다.

하지만 전해진 르베나의 말은 가스트의 예상보다도 훨씬 깊고 뜨거웠다.

‘내 눈에는 아직 어리기만 한 소녀가 어떻게 이토록 제 사람들을 아끼고 소중히 할 줄 아시는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는 수많은 귀족과 왕족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을 내건 그녀가 어떻게 이토록 온전히 사랑을 나누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인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스트의 녹슨 마음을 두드렸다. 그녀의 정직한 눈빛이 가스트 마음의 빗장을 속절없이 열어 버렸다.

그래서 가스트는 도저히 르베나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준비해온 거짓의 어느 한마디 그녀의 정직한 붉은 눈을 보면서는 할 수가 없었다.

젠의 마법학원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한에게 이렇게 좋은 기회를 포기시키고 싶지 않단 이야기는.

욕심인 줄 알면서도. 미련인 줄 알면서도.

정직하고 올곧게 향해오는 그 붉은 눈에 거짓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스트의 회색 눈이 천천히 감기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큰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욕심이라… 생각했습니다. 음지에서 손자 녀석이나 건사하던 제가 스스로 공주님의 곁을 자처했거늘, 공주님의 곁을 지키지 않고 아한을 위해 젠으로 떠나는 것은. 욕심을 지나쳐 늙은이의 노망이고 욕망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옆에서 팅을 데리고 고군분투하는 아한을 바라보았다.

아한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입가에는 더없는 애정을 담은 미소가 어렸다. 자신에게 향하는 가스트의 회환깊은 눈빛을 느끼며 르베나가 말했다.

“충분하네. 그대와 아한의 미소면. 그대와 아한의 심장소리면.

그대들에게 받을 것은… 이미 충분해.”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의 늙은 눈에 기어이 눈물이 어리고야 말했다.

그리고 그런 가스트의 모습을 본 르베나의 얼굴에는 좀 더 깊은 미소가 어렸다.

이미 넘치게 받았음을.

그대들의 평생과 목숨을. 그대들의 충의와 마음을.

르베나는 이미 이전의 삶을 통해 넘치게 받았음을 그들은 모른다.

이미 가스트와 아한이 르베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희생했는지.

이전의 삶, 가스트가 르베나를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 단순히 목숨을 넘어서 그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던 아한의 옆자리라는 것을.

르베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번 생이 르베나에게 그들을 다시 한번 믿고 지킬 수 있는 기회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되찾고 그들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것만으로.

그들이 그녀의 바로 곁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따뜻하게 뛰는 심장을 가지고

온전한 피와 살을 가지고 가끔은 소리 내어 웃으며 사는 그것만으로.

그녀는 충분하다고.

후련해진 얼굴의 르베나와 그런 그녀를 눈물 어린 회색 눈으로 바라보는 가스트의 주위로 디오니스의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그들의 회귀한 삶의 또 다른 시작을 축복하듯이 차갑지만 따뜻한 훈풍을 몰고 올 바람이 팅과 아한의 말간 웃음 사이로, 그렇게 점점이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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