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80화 (80/276)

80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9)

“이게 무슨 짓이오, 르베나 경!”

그의 분노어린 고함에 르베나가 그에게 지지않고 말했다.

“그 손을 놓아주십시오! 스릴 공주는 아직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전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르베나의 이야기에 왕이 분노 섞인 눈빛을 그녀에게 쏘아냈다. 스릴 공주가 베이라인 것을 뻔히 아는 르베나가 말리긴 커녕 스릴 공주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니 이상한 배신감이 들었던 탓이다.

‘게다가 인형 놀이라니!’

감히 자신에게 그딴 말을 지껄인 르베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에 르베나가 자칸의 왕에게 말했다.

“스릴 공주는 더 이상 전하의 품안에 머무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스릴 공주는 전하의 공주이기 이전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전하의 판단대로 스릴 공주를 분리하고 격리하는 것이 진정 그녀에게 행복이라고 여기십니까? 지금 스릴 공주의 얼굴을 보십시오.”

르베나의 말에 왕이 신경질적으로 휙 고개를 돌려 스릴 공주의 얼굴을 보았다.

흠칫.

언제나 쾌활한 공주. 말간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 내어 웃는 공주.

그런 공주의 모습을 본 것이 언제일까. 언제부턴가 스릴 공주는 잘 웃지도 않았고, 가끔가다 짓는 미소조차 슬퍼보였다. 게다가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공주의 모습은.

또다시 혼자만이 존재하는 그 새장 속으로 들어가기 싫어 몸부림치는 작고 여린 새 같았다.

제 날개가 다 부러지게 몸부림치며 그곳에 갇히길 거부하는 작은 새.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스릴의 얼굴 어디에도 행복은 없었다.

그때 르베나가 왕에게 다가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게다가 저기 앉아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유파시드입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절대 모를 리 없다는 말입니다.”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왕의 눈이 충격으로 떨렸다.

르베나의 말대로라면 유파시드는 이미 스릴 공주가 베이라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왕이 망설이는 틈을 타 스릴 공주가 르베나에게 말했다.

“저 좀 구해 주세요, 공주님! 전 공주님같이 훌륭한 베이라가 되고 싶어요! 제발요! 흐윽!”

울부짖는 스릴 공주의 말이 언뜻 지금의 상황에서 꽤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했지만 르베나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군가의 보호만을 기다리고 누군가에게 의지만 하는 삶은 순간은 편하지만 결코 안정적이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르베나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누군가의 도움만이 구원이던 시절, 그녀에게는 사람들의 눈짓 한번 손짓 한번이 지옥이고 천국이었다. 남들에 의해 수없이 바뀌는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서 언제나 무방비상태로 존재하는 그녀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그 상황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였다.

그리고 르베나는 알고 있다.

결코 인생의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는 없다는 것을.

결국 나의 인생을 나의 힘으로만 받쳐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고 발버둥치며 노력하려는 스릴에게 르베나는 약간의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 스릴 만큼은 이점 삶의 르베나처럼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고 의지하다 결국 후회하는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스릴 공주의 모습에 자칸의 왕 역시 번민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드러나 버린 지금, 정말로 본인의 생각이 맞는 건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뜻밖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르베나 공주보다는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한데.”

모두의 눈이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 루드바하에게 향했다. 만찬장의 상석, 그 자리에 언제나처럼 옅은 미소를 베어 물은 그가 있었다.

“자칸의 왕께서 괜찮으시다면 스릴 공주가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그러면 왕께서도 다소 안심할 수 있으시겠죠.”

때 아닌 그의 말에 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질려갔다. 그리고 스릴 공주는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고 르베나는 조용히 루드바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오로지 한 사람, 루드바하만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참 재미있는 만찬이었습니다.”

사락사락.

발목 쯤에서 길게 끌리는 그의 흰색 로브가 풀잎을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만이 가득한 밤. 소란스러웠던 만찬장에서 벗어난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잠시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사색이 된 자칸의 왕이 급히 스릴을 데리고 사라진 후 강제 종료된 만찬장에서 루드바하가 언제나와 같이 온화한 얼굴로 그녀에게 산책을 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재빨리 르베나를 채갈 법한 아를은 조용히 불쾌한 내색만 비출 뿐 말없이 자리를 떠나가 버렸다.

르베나가 자칸의 뜨거운 공기를 느끼며 숨을 뱉어낸 순간이었다.

“스릴 공주는 어떻게 도우실 생각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라면 나에게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습니다.”

그리고 르베나의 붉은 눈을 한번 부드럽게 응시한 루드바하가 말을 이었다.

“현재 르베나도 알다시피 젠에서는 마법학원을 운영 중 입니다. 그곳에 자칸의 왕을 설득해 스릴 공주를 입학시키려 합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마전쟁이 한창인 시절. 모든 왕국에 존재하는 마법학원은 딱 두 개였다.

디오니스의 베이라 마법학원과 젠의 세츠 마법학원.

둘은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 뛰어난 학생들을 배출해내는 최고의 마법학원이었다.

하지만 세츠들의 승리로 오랜 신마전쟁이 끝나며 디오니스의 마법학원은 마지막 교장인

가스트의 퇴임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현재 왕국과 제국에 남은 마법학원은 젠에 존재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르베나가 말했다.

“하지만 젠의 마법학원은 오직 세츠만을 양성하지 않습니까. 같은 마법을 구현한다고는 해도 신력과 마력은 구현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그곳에서 스릴 공주가 베이라로써 성장을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녀를 보며 뭔가 뿌듯한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르베나도 알다시피 저는 옳은 일을 행하는 베이라는 세츠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순리처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르베나 그대를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오래도록 저만의 생각에만 그쳤을 겁니다.”

잠시 르베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시작이 같은 곳에서 받는 교육으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현재 젠에서는 마법학원에 베이라들을 위한 수업 과정을 마련하고자 좋은 베이라 선생님들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르베나가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젠의 마법학원에 베이라 과정이 생긴다니…!’

아무리 그가 파격적인 유파시드라 하여도 이는 파격 중에서도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좋은 베이라 선생?

르베나가 알기로 현재 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칠 만큼 실력 있고 밖으로 드러난 베이라라면,

“아! 가스트… 군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난 번 디오니스에 갔을 때 제안을 하긴 했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의 수락만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죠.”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트가 젠의 마법학원에서 베이라를 가르친다… 라.’

그건 그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베이라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고 젠과 디오니스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며 가스트 역시 잃었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으니.

게다가 그렇게만 된다면 아한 역시 가스트의 보호아래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가스트가 이런 좋은 조건들을 두고도 아직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마음이 가라 앉았다.

바로, 그 이유가 자신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는 후벤과 함께 남은 평생을 르베나의 곁을 지키는데 썼고, 그의 힘은 언제나 르베나를 보호하는데 만 쓰여졌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어린 아한을 두고 눈을 감는 그 순간마저 르베나를 위해 싸웠다. 게다가 그의 시체는 마치 실험대상이라도 된 듯 세츠들에 의해 끌려가기까지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르베나를 위해 싸우고 그녀를 위해 죽으면서도 미안하다고 말한 가스트가 떠오르자 르베나의 마음에 순간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동시에 까끌하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목을 죄듯 아파 왔다.

갑자기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에 루드바하의 눈이 옆에 있는 르베나를 향했다.

이상하게 요동치는 르베나의 마력이 힘겹게 그녀의 주위로 일렁거렸다. 결코 보기에 기분 좋은 마력의 흐름이 아니었다.

루드바하가 곧바로 그녀를 잡아 세우며 고개를 내려 바라보았다.

“르베나…….”

마주친 그녀의 눈빛에 고통이 어려 있었다. 언제나 무감각한 붉은 눈이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억에 사로잡혀 망각에 빠져버린 눈처럼 르베나의 눈은 눈앞에 선 루드바하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곧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듯 떨려오는 르베나의 눈을 본 루드바하의 손에 푸른 힘줄이 돋았다.

언젠가 보았던 그 고통의 빛이 다시 르베나의 눈에 어린 지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장소에서 혼자 숨죽여 울던 열일곱 살의 소녀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 소녀는 르베나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했다.

르베나의 모습에 루드바하의 벽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이 살며시 그녀를 안을 듯 다가왔다. 어떤 온기를 나눠서라도, 아니 어떤 것을 주어서라도 그녀 안의 고통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은 아주 찰나의 시간에 불구했다.

그리고 루드바하의 긴 팔이 르베나를 감싸 안으려던 순간, 르베나의 눈에 어려 있던 깊은 어둠이 깨끗이 사라졌다.

“…괜찮습니다.”

그러고는 르베나가 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직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는 루드바하의 팔만이 방금 전 어떤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피식.

허공에 멍하니 떠있는 제 팔이 우스워 한번 웃어버린 루드바하의 눈에 순간 짙은 아쉬움이 베었다.

‘…아직은.’

아직은 그녀의 마음과 고통을 나눠 가질 명단에 그는 없는 모양이었다.

순간 자칸의 밤바람이 조금은 시원하게 앞서간 르베나의 얼굴과 뒤에 선 루드바하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늦은 밤, 조금 벌어진 거리,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던 우스운 팔.

이 모든 게 언제가 르베나와 함께 나눌 둘만의 추억이 되기를. 루드바하는 조용한 바람을 담아 자칸의 바람에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앞서간 르베나의 발을 쫓아 부지런히 거리를 좁혔다.

언젠가는 그의 바람이, 마음이. 그녀에게 온전히 닿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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