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8)
스릴 공주의 눈물로 싸늘하게 식은 식사 분위기에 르베나는 사뭇 난감함을 느꼈다.
여성이란 존재는 르베나에게 있어 언제나 지켜줘야 할 대상이었다. 그도 아니면.
“공주님, 어떻게 공주의 신분으로 그 날카로운 검을 들 수가 있죠? 혼인 생각이 있긴 한 건가요?”
“공주님! 바지로 된 기사복을 입고 기사 분들과 함께 훈련 하신다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남사스러워라.”
알 수 없는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르베나에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사람들의 일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다르므로 작은 언행으로 함부로 그들을 평가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르베나는 그저 귀족 여성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만 했다.
근데 누군가가. 그곳도 타국의 공주가 저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니 이건 또 다른 곤혹이고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때 스릴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게… 흑… 아니… 흑… 에요…!”
울면서 얘기를 하던 돌연 스릴 공주가 르베나를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절… 히끅… 절 책임져주세요! 르베나 경!”
제법 크게 소리치는 스릴 공주의 말에 놀란 것은 비단 르베나뿐 만이 아니었다. 스릴 공주가 그 당시 뺨을 맞았단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공주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자칸의 왕도, 그럼에도 줄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르베나만을 바라보던 바흐란 왕자도.
그리고 우는 스릴 공주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아를, 언제나와 같은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지만 눈빛만은 싸늘하게 식어있던 루드바하마저.
스릴 공주의 언행에 다소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제일 놀란 것은 당연 르베나였다.
르베나가 언제나처럼 무표정하지만 조금은 황당하다는 말투로 스릴 공주에 되물었다.
“도대체… 뭘 책임지라는 건지 정확히 말씀해주십시오.”
르베나의 말에 대충 눈물을 닦은 스릴 공주가 여전히 물기가 어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 날 르베나 경이 제 뺨을 때렸을 때…! 수치심과 분노 같은 것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였어요.”
스릴 공주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매 한번 안 맞아봤을 스릴 공주가 뜻밖의 상황에 뺨을 맞았으니 당연히 그러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스릴 공주의 말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 언제나 자칸의 여성들을 무시했어요. 남자들의 뒤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그들을…
또한 그런 자칸의 문화는 소극적이고 보호받는 걸 당연시 여기는 여성들의 탓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전 그들과 다르다고 자부 했어요.”
스릴 공주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아주 오래전부터 수없이 되 뇌였던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결국 저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어요. 위험에 처한순간 제가 차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절 구하러 올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고, 그 순간 제가 무너진 것은 절 구하러 왔을 르베나 경이 나보다… 저보다 다른 이들의 안전을 우선시 한다고 생각돼서 였어요.
이러다가는 제가 제일 먼저 구출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불안감이… 그 끔찍한 기분이 저보다 약한 여성들을 방패로…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라도… 살고 싶어서… 흑…….”
스릴 공주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녀가 무엇이 부끄럽다고 말하는지.
르베나는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그 현장에 있던 그녀만은 말이다.
뜻밖의 상황을 직면해야 했던 당혹감. 누군가의 목숨이 어쩌면 본인에게 달려있다는 책임감.
내가 누군가보다 뒤쳐져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 그럼에도 그들을 쉽게 저버릴 수 없는 무게감에서 오늘 갈등. 그 모든 것을 어린 나이의 여성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르베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 상황에 무너져 버린 스스로의 모습에 실망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스릴 공주는 적어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타를 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뚜벅뚜벅.
아벨디온 기사단의 옷을 차려입은 르베나가 천천히 걸어 스릴 공주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자세를 낮춰 스릴 공주와 제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르베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고저가 없었지만 충분한 힘을 갖고 퍼져나갔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매우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르베나의 말에 스릴 공주가 우는 얼굴을 들어 르베나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스릴의 녹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경……!”
분명 르베나 경은 이런 스릴 공주 본인의 마음이 한심하다고, 그렇게 여길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스릴 공주의 녹안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 어디에도 자신에 대한 경멸이나 분노의 빛은 없었다. 르베나는 그저 담담한 진실을 말하는 듯했다.
“누구든 그런 상황이 생기면 누군가 도와주러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누구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누구보다 빨리 자신이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는 것을 버겁다고 느끼고, 그럼에도 떨쳐버릴 수 없는 본인의 위치를 원망도 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스릴 공주님을 탓하거나 한심하다 여기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스릴 공주의 눈이 조금 더 세차게 떨려왔다.
“제가 그때 스릴 공주님의 뺨을 때린 것은. 제 안에 존재하는 기대치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왕족이라면. 그들이 피땀 흘려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그들을 지키고 보호할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지 알아야 한다는 저의 기대. 그런 저만의 기대를 마음대로 공주님께 갖다 대고 실망한 건 분명한 저의 불찰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사과드리죠.”
르베나의 말이 결코 스릴 공주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몇몇의 사람들은, 특히 아벨디온 기사단과 루드바하만큼은 알아들었다.
어린 나이에 지독히도 혹독한 경험을 한 그녀가 보드랍고 따뜻한 공주의 옷을 벗고 거칠고 피비린내 나는 기사 복을 왜 입게 되었는지,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릴 공주에게 전하는 르베나의 담담한 위로가 오히려 아벨디온 기사단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런 르베나의 위로를 들은 스릴 공주는 오히려 제 주먹을 꼭 쥔 채 맑은 녹안을 빛내며 답했다.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전… 저는… 르베나 경의, 아니 르베나 공주님의 소문을 들으며 커왔어요. 제게… 마력이 있단 사실을 알고 외롭게 지냈던 그 모든 시간. 제게 희망이 되고 웃음이 되었던 건 먼 나라에 사는 르베나 경의 이야기였어요. 르베나 공주님의 모든 발자취가 제가 걸어가고 싶은 길이었다고요! 그런 분에게 사과를 듣고 싶지도, 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스릴 공주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르베나가 살짝 물러나 스릴 공주의 계속 경청했다.
그리고 스릴 공주는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조금 더 큰 소리로 제 뜻을 전해 왔다.
“그런데 전… 전 그 첫 단추를 보기 좋게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책임져 주세요. 절… 저를 르베나 공주님의 제자로 삼아 주세요. 저, 전 베이라예요! 제겐 마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게 그때와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제 목숨을 위해 도망치는… 그런…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 르베나 공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지키는 사람일 수 있는 그런 왕족일 수 있게!”
어딘가 필사적인 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발 절 책임지고 가르쳐 주세요! 제게 사과를 하신다고 했죠? 사과는 필요 없어요. 대신 절 제자로 받아 주세요! 디오니스에라도 함께 갈게요!”
스릴 공주가 말을 마칠 때쯤에는 녹안 가득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다른 의미로 다시 한번 만찬장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자칸의 왕과 바흐란이었다. 어떻게 지킨 비밀이었는데 그걸 제 입으로 다 밝히다니. 게다가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제한된 자칸의 공주가 디오니스의 공주에게 베이라 수업이라니…!
자고 있던 자칸의 왕들이 다시 한번 뒷목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게다가 스릴 공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르베나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제발요, 공주님. 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가 날 구해주러 오기만을 기다리며.
평생 누군가의 보호만을 받으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요.
르베나 경이 그날 보여줬던 그런 행동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다칠까 물러서 숨으며 비겁한 나에게 실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르베나 경의 곁에서. 르베나 공주님의 곁에서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발 절 책임져 주세요!”
스릴 공주의 말은 절박했다.
평생 보호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새장속의 새처럼 그녀는 평생을 지내왔다. 어느 날 문득 스릴 공주는 저에게 날개라는 힘이 존재하는 걸 알았지만 날아갈 수 없었다.
그녀를 붙잡은 새장은 더없이 견고했고 더없이 아늑했기에.
그런 새장 속의 그녀를 그나마 위로했던 건. 간간이 들려오는 먼 나라 공주님의 이야기.
때때로 전해오는 그녀의 이야기는 스릴 공주에게 한번쯤 날아보고 싶은 파란 하늘이었고
한번쯤 느껴보고 싶은 하얀 구름이었으며 용기 있게 도전해 보고 싶은 미지의 공간이었다.
스릴에게 르베나는 자신을 새장에서 꺼내 줄 실체 있는 구원이자 빛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르베나가 저의 앞에 있었다.
스릴은 본인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울고만 있지 않았다. 그건 단 한번이라는 실수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스릴은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부끄러운 일을 실수로 만들기 위해. 그녀를 위해 지어진 이 아늑하고 견고한 새장부터 부숴버리겠다고.
하지만, 그녀의 날갯짓은 여기까지였다.
보다 못한 자칸의 왕이 벌떡 일어나 그들 사이로 끼어든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더 가다가는 이제껏 지켰던 비밀이고 뭐고 스릴 공주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나올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스릴, 그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다른 분도 아닌 유파시드 앞에서 감히 베이라가 되길 원하다니 네가 정신이 있는 것이냐!”
왕의 말에 스릴이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스릴 공주는 이 순간을 두려워하는 듯하면서도 용기를 낸 듯 흔들리지 않았다.
“유파시드께서는 세상의 모든 옳은 일을 하는 베이라는 세츠와 같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도 그럴 거예요! 마법을 배우고 강해져서 옳은 일을 행하며 세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거라고요!”
스릴 공주의 말에 자칸 왕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평생 오냐오냐 해 주었더니 이제는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그동안 스릴 공주가 베이라임을 숨기고자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나뿐인 공주를 지키고자, 왕비를 닮은 그녀를 지키고자.
스릴 공주의 외로움을 모른 척하며, 그러면서도 이것만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 위안하며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유파시드 앞에서 이렇게 밝히다니. 보다 못한 왕이 스릴 공주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잡아챘다.
“안 되겠구나. 공주는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러고는 그는 유파시드를 보며 말했다.
“아직 공주가 어려 실언을 한 것이니 개념치 마십시오. 르베나 경을 너무 동경한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모양입니다.”
말을 끝낸 왕은 곧바로 스릴 공주를 데리고 가려 했고 스릴 공주는 이에 반항하며 제 손목을 빼내려 했다. 딸을 끌고 가려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끌려가기 싫은 딸의 몸부림이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먼저 힘을 잃은 건 스릴 공주였다.
그녀가 르베나에게 소리친 것. 베이라 임을 밝힌 것. 이 모든 것이 르베나가 깨어나기만을 바란 며칠 동안 스릴 공주가 그토록 연습하던 내용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이 새장을 벗어나 자신의 날개라는 것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를 가둬 놓은 새장은 그녀를 놔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욱이 슬픈 건 그 새장이 단순히 억압과 분노가 아니라 스릴 공주에 대한 사랑과 걱정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지금 유파시드의 눈치를 보며 떨고 있는 아버지, 자칸의 왕을 보며 스릴 공주가 다시 느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툭.
어느새 스릴 공주의 손에서는 힘이 빠졌고 말간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왕은 스릴 공주를 데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덥석.
누군가의 손이 왕의 손을 잡으며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면.
“이게 무슨……?”
불쾌함을 가득 담은 왕의 녹안이 감히 제 손을 낚아챈 사람의 눈을 날카롭게 향했다.
언제나처럼 무감각한 빛의 붉은 눈.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것 같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그 깊고 아득한 깊이의 붉은 눈을.
왕의 녹안을 똑바로 바라본 그녀, 르베나가 그와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스릴 공주는 전하의 인형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애정이라는 이름표로 묶어 놓은 꼭두각시 인형 놀이는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녀의 말에 만찬장의 분위기에 삽시간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