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7)
르베나가 정신을 잃고 삼일 째 되던 날 아침,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붉은 눈이 드디어 떠졌다.
느리게 두 번.
눈을 깜빡인 르베나가 자연스레 온몸에 흐르는 마력을 점검했다. 그러고는 손으로 검상을 당한 복부를 확인하니 누군가의 치유마법으로 외상은 모두 깨끗이 나아있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르베나의 눈이 다시 한번 제 복부를 향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가까스로 텔레포트로 이동시킨 여성들. 달려들던 적의 무리. 무너지던 동굴.
남은 힘을 짜내어 시전한 마지막 텔레포트.
하지만 복부의 출혈이 심한데다 이미 두 번의 대규모 텔레포트로 고갈된 마력은 르베나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력이 모자람을 느낀 르베나는 위험을 감지했다.
텔레포트를 하다가 마력이나 신력이 모자라면 시전자의 신체는 서로 다른 장소에 떨어지기도 하고 나아가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어떤 힘 덕분에 르베나는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모자란 르베나의 마력을 한순간에 채워줬던 힘.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했던 힘.
마력과는 다른 성질의 힘, 신력.
“유파시드의… 것인가.”
작게 중얼거리던 르베나가 뜻밖의 기척에 놀란 것은 그때였다.
“깨어났군요.”
흠칫.
다소 놀란 르베나가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오른편의 창가에 그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언제나처럼 결 좋은 은발이 사락사락 바람결에 흔들리고 모든 신의 축복을 그대로 받아 옮겨놓은 것 같은 얼굴과 몸. 그리고 그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시리지만 더없이 뜨거운 짙푸른 눈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르베나를 향하고 있었다.
“유파시드…….”
르베나의 다소 멍한 물음에 루드바하가 작은 미소를 짓고는 르베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입니다. 정말로…….”
그의 말에 르베나의 눈에 다시 선명한 붉은 빛이 돌아왔다. 오랜시간 기절을 했다 깨어나서 인지 머릿속이 잠시 뒤죽박죽 이었다. 그런 르베나의 혼란을 알아차린 루드바하가 그녀에게 차분히 말을 전했다.
“아벨디온의 창단식에서 그대에게 축복으로 전했던 제 신력이 무척 불안정하게 느껴져 일단 제 신력을 그대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 자칸 근처에 볼 일이 있어 들렸더니… 그대가 그런… 모습이라서.”
그의 얼굴에 언제나 서려있는 옅은 미소가 오늘은 조금 달라보였다.
조금은 지친 듯한, 그리고 조금은 어두운 듯한 미소.
“감사합니다. 텔레포트 할 때 채워졌던 힘이 역시… 신력이었군요.
아, 치유마법 또한 감사합니다.”
하지만 르베나의 인사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건네져왔다. 그리고 어쩐지 루드바하는 그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자칸에 왔고, 어떤 마음으로 그대를 찾았고, 어떤 마음으로 그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는지 알아도 저 무심한 붉은 눈은 흔들리지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막 깨어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루드바하는 저도 모르게 제 생각보다도 먼저 말을 뱉어 버렸다. 정말이지 그답지 않게.
“그러면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르베나가 잠시간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욕심이라고는 트롤 코딱지만큼도 없게 생긴 유파시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지고 취할 수 있는 젠의 황제. 게다가 언제나처럼 옅게 베어 있는 선한 그의 미소를 보면,
도대체 그가 르베나에게 바라는 소원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생명을 구했고 그가 전해준 신력이 없었다면 지금 그녀는 여기 없었을 지도 모른다. 고민은 짧았다. 르베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르베나의 붉은 눈이 또렷이 저를 향해오자 루드바하의 마음 한 구석이 순간 찌릿하게 아려왔다. 그 감정이 너무 선명해서 루드바하는 이제 그것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루드바하.”
그의 짤막한 말에 르베나의 눈이 물음표를 가지고 바라보자 루드바하가 웃으며 말했다.
“루드바하. 이제 저를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그의 말에 르베나가 세상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젠 제국의 황제를, 세츠들의 왕인 유파시드를 그의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헌데 깊은 인연도 아닌 르베나에게 그를 이름으로 부르라니. 도대체 그가 무엇을 얻고자 이걸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좀처럼 눈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르베나의 눈에 당혹감, 의심, 경계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스쳐지나갔다. 그것을 온전히 눈에 담은 루드바하는 이상하게도 꽤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조금 전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 건넨 르베나의 인사가 잊혀 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저를 그리 불러줬으면 했거든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저를 어려워만 하기에.
이 정도 빚이 있고 매사 정확한 르베나 그대라면… 어쩌면 들어주지 않을까 하여.”
스스로가 이렇게 거짓말에 능하다는 데 루드바하는 굉장히 놀랐다.
반면 르베나는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숨값치고는 참 저렴한(?) 흥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르베나는 다른 귀족이나 왕족처럼 호칭에 큰 의미를 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는 생각 또한 이어졌다. 그래서 결정도 쉬웠다.
“그것이 어떤 외교문제나 또 다른 문제로 야기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해 보입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거짓말로 가장한 그의 욕심을 르베나가 진짜 해주겠다 답할지는 그도 몰랐던 것이다. 곧 루드바하가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말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르베나.”
르베나의 이름을 또렷이 발음하는 그의 얼굴에 어느 때 보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부드러운 미풍을 닮은 그의 미소와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어렸다고 르베나는 순간 문득 생각했다.
르베나가 깨어나고 자칸의 왕궁에는 다시 활기가 돋았다. 궁인들은 이제야 마음 놓고 납치범들을 욕하고 스릴 공주의 생환을 기뻐했으며 중요한 손님이 되어버린 아벨디온 기사단도 드디어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 자칸의 왕은 모든 주요 인물들과 함께 만찬자리를 준비했다.
아벨디온 기사들 전원과 르베나, 자칸의 왕과 바흐란 그리고 스릴 공주. 또 루드바하까지 참석한 자리는 웬만한 곳에서는 보기도 힘든 인물들의 자리였다.
시종들이 끊임없이 내어오는 음식 나르는 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아주 작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마저 기꺼웠다. 그리고 간간이 이어지는 자칸 왕의 호탕한 말솜씨에 따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만찬장의 분위기를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즐기는 만찬자리에 유독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스릴 공주였다. 스릴 공주는 잔뜩 움츠린 자세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르베나를 한번, 아를을 한번, 그리고 루드바하를 한번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어 쉬기 바빴다.
스릴 공주의 이런 모습이 내심 신경 쓰이던 르베나는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나온 디저트를 뒤로 하고는 한 마디를 건네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공주.”
르베나의 물음에 스릴 공주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굳혔다. 그리고 수저를 든 그녀의 손이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르베나가 그녀를 보다가는 문득 동굴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 혹 동굴에서의 일로 아직 기분이 언짢으시다면 제가 정식으로 사죄…….”
“아니에요!”
르베나의 말에 스릴 공주가 발작처럼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만찬장 모두의 시선이 스릴 공주에게 향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스릴 공주가 부끄러움에 온통 빨간 얼굴이 되어서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자칸의 왕이 르베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르베나 경. 동굴에서의 일이라니……?”
안 그래도 납치사건 이후 방안에만 틀어박힌 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공주가 내 신경 쓰이던 그에게 저 말이 뭔가 원인을 알 수 있는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의 물음에 르베나가 스릴 공주를 한번 바라보고는 자칸의 왕에게 말했다.
“제가 공주님을 구출하다 무례한 언행을 했습니다. 혹 그 때문에 공주님께서 여전히 언짢으신지 여쭈어본 겁니다.”
르베나는 일국의 공주였고 르베나가 한 행동은 사실 그 순간 누구의 질책도 받지 않을 만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지금 이곳에 본인이 일국의 공주가 아닌 기사로써 자리함을 잊지 않았다. 또한 기사로써 왕족의 몸에 손을 댄 것은 엄연히 잘못된 행동이다. 비록 타국이긴 했지만. 게다가 상대가 이곳에서 성인이라도 고작 열다섯의 공주였으니 스릴 공주가 그때 기억으로 아직 언짢아 한다면 르베나는 기꺼이 진심을 다해 사과를 건넬 생각이었다.
르베나에게 자신이 잘못한 일을 사과하는 것은 결코 수치와 부끄러움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누구보다 스릴 공주는 잘 알고 있었다. 르베나가 그때 했던 행동에 결코 악의가 없었다는 것도, 지금 르베나가 기꺼이 그 일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때 바흐란이 르베나에게 말했다.
“경이 무엇을 했든 그럴 만 했으니 그리 했겠지. 신경 쓰지 마.”
음식을 바라보며 툭 던지는 그의 말에서 때 아닌 진심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자칸의 왕은 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르베나를 향해 기어코 질문을 던지고야 말았다.
“어떤 언행인지 들을 수 있겠소, 경? 나는 물론 경이 어떤 행동을 했다 해도 그를 질책할 생각은 없소.”
그의 물음에 르베나의 눈이 여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스릴 공주를 향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디저트 푸딩을 조용히 밀어놓은 르베나가 왕과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제가 공주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쨍그랑…!
르베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시종이 들고 있던 식기를 떨어뜨리고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르베나의 말을 들은 왕 역시도 놀란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평생 때리는 시늉도 안한 공주에게 뺨을…! 그것도 납치를 당한 그 힘든 상황에서 때렸다니……!”
아무리 질책을 안 하겠다고 했지만 왕은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함께 화가 치미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이 있었다. 그 순간 스릴 공주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 것이다.
그 기억이 생각나서일까. 그녀의 눈물에 화기애애하던 만찬장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식어갔다. 순간 자칸 왕의 깊음 침음이 조용해진 만찬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