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6)
얼마 지나지 않아, 르베나 공주는 아를의 마음을 넘어 디오니스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들었어? 르베나 공주님이 베이라시래!”
“게다가 제1기사단과 공주님을 공격한 베이라를 죽였다면서? 너무 무서워!”
“이번 귀족회의 이야기 들었어? 글쎄 르베나 공주님께서…….”
“왕족은 명령함으로써 백성들을 지키는 존재다.”
“사람들을 고통에 몰고 간 베이라를 살해한 것에 추호의 후회도 없다.”
“왕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나라와 이 나라의 백성을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다.”
이와 같은 그녀의 말은 마치 엄청난 영웅의 무용담처럼 디오니스 왕궁과 전역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 사건을 기점으로 디오니스는 혼란 속에서 조금씩 바뀌어갔다.
“들었어? 세나르 왕비의 일가가 몰락했대!”
“사이가 틀어졌던 페하와 메이슨 공작가 사이 다시 교류가 시작됐다는데?”
“폐하께서 드디어 예전의 위엄을 되찾으셨어!”
타락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수많은 귀족가가 이 변화속에서 몰락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주인공, 르베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언제나 태연했다.
그녀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도 그녀의 사람들을 지킬 줄 알았고 그녀를 위해 스러져간 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였으며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소리 없이 애썼다.
그럼에도 그녀는 단 한 번도 이것을 자랑으로 내세우거나 이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냥 여성, 그냥 왕족이 아니었다.
스스로와 주변을 지킬 힘과 의지를 갖고, 스스로 나아갈 줄 아는 디오니스의 공주였다.
그래서 아를은 그런 르베나를 지켜보며 결심했다. 언젠가 아를이 모든 것을 걸고 지켜줄 사람을 정해야 한다면 그건 반드시 르베나 공주가 될 것이라고. 그의 심장과 디오니스의 심장을 함께 뒤흔든 그녀라면,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그리고 기회는 너무 늦지 않은 어느 순간 아를을 찾아왔다.
“들었어? 르베나 공주님이 검기라는 걸 할 기사를 모은다던데?”
아를은 그 날 태어나 처음으로 신께 기도했다.
‘제발 나에게 마력이든 신력이든 뭐든 조금만 있었으면……!’
그리고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아를에게 마력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 날, 모두들 제4기사단장 자리를 박차고 일개 단원이 되겠다는 그를 미쳤다고 했지만 아를은 비로소 그가 그녀의 옆을 지킬 수 있음에 감사했다.
유일하게 그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녀의 피를 다시는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랐고 이제는 그가 그녀의 바로 옆에서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 * *
날이 밝았지만 르베나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랬기에 자칸의 왕궁도 스릴 공주의 귀환만을 편안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자칸의 영웅이나 마찬가지인 아벨디온 기사단의 단장, 르베나는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중이었고 두 명의 부 단장은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날 선 검처럼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어쩐 일인지 바흐란 왕자마저 잔뜩 털을 세운 자칼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풍겨대며 내내 저기압의 상태로 궁인들과 마주쳤고 왕궁으로 겨우 돌아온 스릴 공주는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기를 며칠이었다.
그렇게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자칸의 왕궁이 잠시라도 떠들썩해진 것은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손님의 방문 때문이었다. 여느 날 처럼 르베나의 곁을 지키던 아를이 갑자기 날 선 금안으로 닫힌 방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방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이를 보고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그대로 금안에 드러내었다.
반가움, 경계, 안심, 분노 그리고 질투.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담아내던 그의 금안은 그가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를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방 안에 들어선 그를 불렀다.
“…유파시드.”
아를의 부름에 방 안으로 들어서던 그, 루드바하가 그를 보았다가는 누워있는 르베나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르베나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하얗고 긴, 하지만 결코 가늘지 않은 손이 르베나에게 향했다. 곧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신력이 동그란 모양으로 르베나의 살짝 벌어진 입을 통해 들어갔다. 그러자 르베나의 몸 곳곳이 하얗게 빛나더니 조금은 탁해진 빛깔의 신력이 다시 르베나의 입을 통해 토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곧바로 루드바하에게 스며들어갔다.
“…이건?”
빛을 다시 머금은 루드바하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르베나를 보다가는 작게 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벽안에는 이내 르베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크고 거친 손이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격랑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곧 그림같이 옅은 미소를 베어문 그가 르베나의 손을 잡고 있는 아를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군요. 다만 출혈이 워낙 많아 빨리 깨어나지 못한 듯 합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르베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말했다.
“궁의 말로는 마력측정기로 측정을 해도 수치가 잘 나오지 않는다던데.”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 역시 르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 수 없는 불순한 기운이 그녀 안의 마력 생성을 늦추고 있었어요. 제가 신력으로 몰아냈으니 이제 마력은 평소대로 생성될 겁니다.”
‘그녀’
이번엔 루드바하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미치도록 아를의 신경을 긁었다.
그때, 루드바하가 여전히 르베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유지하며 아를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제 신력인 것 같으니. 아벨디온의 부단장, 아를 드 메이슨 경은 자리를 비우셔도 될 것 같군요.”
명백한 축객령.
게다가 그의 말처럼 르베나의 직속 부하일 뿐인 그는 현재 그녀의 회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루드바하의 말 한마디에 구체화된 무기가 되어 말아왔다. 그리고 그 무기에 맥 없이 맞은 아를이 순간 르베나와 잡고 있지 않은 제 주먹을 힘줄이 돋아나도록 꾹 쥐었다. 그러고는 한순간 르베나의 손을 잡았던 제 손에 힘을 빼버렸다.
가만히 르베나를 바라보던 아를의 금안에 혼란스러운 감정의 편린들이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고 이내 아를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휙, 방 문을 나섰다.
달칵.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르베나에게 고정된 루드바하의 벽안이 살며시 흔들려왔다.
피식.
루드바하가 곧 싸늘하게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유치하군.”
그러고는 그의 벽안이 좀 전까지 아를의 손에 붙들려 있던 르베나의 손을 지그시 향했다.
얼마 전 그는 라웅과의 작전 중 축복을 빙자해 르베나에게 심어놓았던 본인의 신력이
급격히 불안정해 지는 걸 느꼈다. 분명 르베나의 몸 속에 잔존하던 마력, 그 이상이 필요한 큰 마법을 구현한 것 같았다.
루드바하는 불길한 마음에 재빨리 빠르게 본인의 신력을 르베나에게 전달했다. 본인의 신력을 심어놓은 상대에게 즉각적으로 신력을 전달하는 것은 오로지 루드바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 일을 누군가에게 시전한 것은 태어나 르베나가 처음이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르베나에게 본인의 신력을 심으면서도 이것을 쓰게 될 날이 올지,
게다가 이렇게 빨리 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쿵쿵.
분명 즉각적으로 신력을 보냈음에도 그의 심장이 불안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왜인지 그 소리가 쉽게 가시지 않아 그는 충분한 양의 신력을 보냈음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본인의 신력이 느껴지는 그 장소로.
“역시… 자칸인가.”
땅을 흠뻑 적신 검붉은 피의 주인이 르베나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끔찍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이미 누가 데려갔는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설상가상 무너진 건물의 자재 속 끔찍하게도 불길한 기운이 그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것을 처리하느라 그는 꼬박 하루를 소비했다. 하지만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침대에 창백하게 누워있는 르베나를 보기 전까지는.
하지만 언제나처럼 선명하고 붉은 눈동자를 감추고 누워있는 르베나를 보는 순간.
또 그런 르베나의 손을 잡고 있는 아를을 보는 순간.
‘뭘 하자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거지, 이 머저리같은…!’
그는 이곳에 하루 늦게 온 자신에 대해 화를 넘어선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결단코 정말 생경하고 낯선 감정이었으며 언제나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공적인 일을 우선시 하던 자신에 대한 지독한 환멸로 이어졌다.
아니다.
‘개인적인 감정… 그런 거 자체가 나에게 있기라도 했나?’
그렇게 처음 느껴본 스스로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너무도 낯설어 루드바하는 그만 아를에게 분풀이를 해 버렸다.
언제나 르베나의 곁에 머무는 아를. 그리고도 르베나를 지키지 못한 아를.
그럼에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아를.
그가 미웠다.
‘밉다니. 내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긴 했나? 정말 미치겠군.’
자조 섞인 스스로의 생각이 낯설었다. 하지만 곧 르베나를 두고 나서는 아를의 뒷모습을 보며 루드바하는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었다. 화풀이를 빙자한 질투였고 시기였으며 본인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는 언제나 르베나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아를이 부러웠고 르베나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으며 그럼에도 이런 마음조차 내놓지 못하는 본인의 상황이 싫었다.
지금 이 순간.
루드바하는 자신이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신의 축복 같은 외모. 어느 누구도 쉽게 대적하지 못하는 세츠들의 왕. 네 개의 왕국을 거느리는 젠 제국의 황제.
그런 것은 본인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이야기들 같았다. 자신의 감정하나 컨트롤 못해 남에게 화풀이나 해대는 치졸하고 비겁한 사람. 눈앞의 여인을 맘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 많은 사람.
아니, 그런 남자.
그게 지금의 루드바하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를 점점 이상하게 만들어 가는 그녀, 르베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저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그대를 내 마음에 품어도 되는 건가… 내가… 감히…….”
루드바하의 억눌린 목소리가 깊어가는 밤, 후덥지근한 방 안에 부는 한 줄기 선선한 바람처럼 스쳐 지났다. 눈앞의 그녀가 이상하게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