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76화 (76/276)

76화

제2장. 아벨디온 上, 아벨과 디온 편 (25)

언제나처럼 혼자 조용히 검을 닦은 아를은 조금 늦게 연무장을 향했다. 언제나 견습 기사의 일과가 끝나면 밤 늦게까지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는 것이 아를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연무장에 사람이 많았다.

“조금 더 자세를 위로!”

“거기선 이 방향으로 틀어야지!”

곧 다가올 정식 기사시험을 위해 모두들 연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벌써부터 연무장에 들어서려는 아를을 보고 하나둘씩 움찔대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분명 아를이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하고 친분을 만들려는 귀족의 아들들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살짝 미간을 찌푸린 아를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돌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저택의 작은 연무장에서 연습을 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연무장을 벗어나던 아를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 역시 익숙치 않은 장소였다.

바로 제1기사단의 연무장. 그 넓은 연무장을 홀로 뛰고 있는 가녀린 실루엣이 아를의 금안을 붙잡은 것이다.

“여… 자?”

오늘 제1기사단은 나라의 행사로 차출되어 나갔다. 그래서 당연히 연무장은 비워있어야 함에도 자그마한 실루엣은 그 넓은 연무장을 끝없이 누비고 있었다. 심지어 자그마한 소녀로 보이는 그 실루엣은 뛰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듯 이, 마치 무엇인가를 떨쳐버리고 싶은 듯.

아무도 없는 연무장을 끊임없이 돌고 또 돌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은 푸석해 보이는 검은 머리가 같이 휘날렸다. 멀리서 보기에도 깡마르고 볼품없어 보이는 몸은 정상적인 성장을 의심케 했다. 하지만 큰 연무장을 도는 소녀의 모습만은 결코 볼품없지 않았다. 한동안 소녀를 바라보던 아를의 몸이 순간 움찔 떨렸다.

“공주님!”

열심히 연무장을 돌던 소녀가 갑자기 넘어진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꽤 아프게 넘어진 듯 보여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멀리에 서 있던 누군가가 소녀를 부르며 달려오려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아를은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귀하신 공주님이니까 울면서 사람들을 부르겠지. 괜히 시간만 버렸네’

디오니스에서 검은 머리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흑갈색의 머리를 가진 이는 많았지만 아를처럼 검은 색의 머리는 메이슨 공작가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는 머리색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궁에서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녀는 단 한 명. 요즘 떠들썩하게 유명한 르베나 공주라는 것을 아를은 알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그녀가 뛰는 모습을 꽤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르베나가 넘어짐과 동시에 아를은 귀찮은 듯 얼른 뒤로 돌았다. 귀족 소녀의 울음소리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을 뿐더러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부터 쏟아내는 귀족 여식들의 모습은 아를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 하네?’

벌써 들려야할 소녀의 울음소리도. 그 소리에 달려와야 할 사람들의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걸음을 옮기던 아를이 문득 제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를의 금안에 약간의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툭툭.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는 엉망이었다. 얼마나 세게 넘어졌는지 하얀 얼굴의 뺨 가득 스크래치가 나 있었고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쓸렸는지 한쪽 팔에서도 덩달아 피가 나고 있었다. 귀족, 아니 왕가의 공주에게는 아주 심한 상처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태연했다. 일어나서 먼지를 툭툭 털고는 입고 있던 옷을 조금 찢어 상처 부위의 피를 대충 닦아냈다.

“공주님 당장 궁의를 부를게요. 어떡해! 피가 나잖아요!”

옆에 다가온 시녀의 극성에도 소녀는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아를의 금안이 아주 조금 더 떨려왔다.

지는 해를 뒤로하고 달리는 소녀의 검은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소녀의 옷은 여기저기 묻은 흙으로 더러웠다. 소녀의 어디에서도 공주의 귀품이나 아름다움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볼품없이 마른 몸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뿐.

하지만 왜일까…?

여기저기 벗겨지고 까져 피와 흙이 잔뜩 묻은 그녀의 모습에 열 네살 아를의 심장이 처음으로 두근거렸다.

오 년 후.

아를은 정식 기사가 되었고 덩달아 최연소 기사단장이 되어 어느새 제4기사단을 맡았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본 것은 기사단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아를은 그날도 여느 날처럼 연무장에 남아 늦게까지 검술을 연습 중이었다. 최연소 기사 단장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일전의 승부가 마음에 걸린 탓이다.

“제1기사단 다한 경과 제4기사단 아를 경, 무승부입니다!”

심판을 본 제 3기사단원의 판정에 잔뜩 땀을 흘린 아를이 제 곁에 있던 물통을 다한에게 넘겼다. 이에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한이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아를 경.”

다한의 도발에 피식 웃은 아를이 물통으로 제 벗은 상체에 물을 뿌렸다.

“날이 너무 더워 나이 많은 다한 경 더위 먹을까 일찍 끝낸 겁니다만.”

아를의 말에 다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순간이었다.

다한 경과 아를. 그들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티격태격하며 막역한 친구같이 지냈다. 직책도 같았고 실력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다한 경의 바른 태도와 모습이 아를의 마음에 썩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한 경의 입장에서는 이런 아를이 싫을 수도 있건만 매사 정직한 그답게(?) 언제나 검술에 매진하는 아를을 전혀 어렵게 생각하거나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아한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그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여느 날처럼 혼자 검술을 훈련하던 아를이 문득 제 머리를 한번 털어버리고는

긴 다리를 움직여 제1기사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한번 붙어볼까.”

다한 경과의 못다한 승부가 생가 난 탓이었다. 그렇게 제 1기사단으로 갔지만 아쉽게도 아를은 다한 경을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곳을 쉽게 떠나지도 못했다.

“어떡하지? 후벤 경이라도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후벤 경은 오늘 외출하셨잖아! 분명 그걸 알고 벌인 일 일거야!”

“단장님이 참지 않으시면 어쩌지, 응? 우리도 갈까?”

모두들 안 좋은 표정으로 수련도 하지 않은 채 불안해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를은 평소 다한 경의 옆에서 자주 보았던 룬 경에게 진위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아를의 꽤 오랜 향수를 자극했다.

“저… 지금 공주님이… 하아… 아무튼 다한 단장님은 르베나 공주님께 가셨습니다.”

오래전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달리던 소녀, 르베나 공주.

한 번도 가까이에서 말을 섞은 적도, 눈을 마주친 적도 없는 그 공주가 문득 생각났다.

그 날 이후로 그녀를 마주하게 될 일은 없었다.

후벤 경의 보호아래 훈련을 했던 그녀의 일정은 다시는 어느 기사들과도 마주할 수 없는 장소와 시간에서 이루어진 듯했고 그녀는 또한 어느 무도회나 귀족들의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에 몇 번 파티장 근처를 기웃거리던 아를은 르베나는 커녕 무섭게 달려드는 귀족가의 여식들을 피해 다니기 급급했고 곧 그런 제 모습이 우스워 르베나에 대한 생각을 지우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룬 경의 입을 통해 들은 그 세 글자가 아를의 변덕을 부추겼다.

아를은 이 행동이 저답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도 르베나 공주의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목적은 그곳에 있을 다한 경을 보는 것임에도 외궁에 가까워 질수록 조금씩 떨려오는 심장의 박동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그가 르베나의 궁에 도착했을 때 본 건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전혀 다른 생경한 느낌의 그녀였다.

그녀는 오 년 전과는 달리 꽤 성장한 모습이었다. 푸석했던 머리칼은 부드럽게 흐드러져 있었고 당시 멀리서 보지 못했던 붉은 눈은 더없이 매혹적이고 선명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몸의 곡선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모든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를의 금안을 붙잡은 것은 그런 외형이 아니었다.

“제발 그만 하세요 왕자님!”

“아악, 공주님!”

외궁의 시녀로 보이는 이들의 비명소리가 난자했다. 르베나 공주가 드록 왕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몸은 나무에 묶인채 드록 왕자의 칼에 끊임없이 베어지고 있었고 윤기 있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는 흐드러지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그녀의 여린 온몸과 하얀 피부에는 여기저기 난 자상에 의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움찔…!

순간 아를의 몸이 알 수 없는 충격으로 떨려왔다.

이 순간. 드록 왕자에 의해 기가 찬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그녀의 붉은 눈만큼은 상처입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과거의 어느 날 연무장에서 넘어진 스스로를 일으켜 다시 달려 나갈 때처럼, 르베나 공주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드록 왕자의 일방적인 괴롭힘과 칼질도 그녀의 눈에 어린 자존감과 긍지를 꺾어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이를 본 아를의 온몸은 말할 수 없는 분노로 떨려왔다.

아를은 기사도를 명예로 아는 기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디오니스를 지키겠다 맹세한 기사였고 그런 그에게 있어 검은 약자를 지키고 죄악을 저지르는 악을 처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지금 드록 왕자의 손에 들린 검은.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나무에 묶어놓고 가해지는 일방적인 학대였다. 게다가 상대는 여성이었고 이 나라, 디오니스의 공주였다.

심지어 이토록 기가 막힌 일이 왕궁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 그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순간 눈이 마주친 다한 경이 가만히 고개를 젓자 아를의 발은 그도 모르게 제 자리에 묶여버렸다.

그때였다.

“꺄아--!”

“왕자님 조심하세요!”

드록 왕자의 칼이 여러 번 그었던 르베나 공주의 밧줄을 다시 그었다. 그렇게 밧줄이 끊김과 동시에 르베나 공주의 발이 망설임 없이 앞에 놓인 검을 처 들어올렸다. 그리고 한 번에 잡은 검은 흔들림 없는 동작으로 드록 왕자의 목에 겨누어졌다.

흔들림 없는 자세. 흔들림 없는 검도. 흔들림 없는 눈빛.

그 찰나의 순간, 아를의 모든 것은 그녀, 르베나에게 얽혀들고 있었다.

미치도록 답답한 숨이 아를을 조여 오는 것 같았고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큰 추가 아를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검을 쥔 손이 분노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떨려왔고 그에 상응하듯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그날처럼 자신의 피를 내보인 그녀는 그렇게 열아홉 살 아를의 심장을 다시 한번 뒤흔들어 놓았다. 아름다움, 매혹적임, 젖은 그녀의 머리칼과 검붉은 피의 흔적. 그리고 주체할 길 없이 뛰던 제 심장의 박동.

그 날이 남긴 모든 것이 아를의 마음 속 깊은 흔적은 남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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